〈 77화 〉오크 여전사, '무타샤'
목소리의 주인공은 색기과 근육이 적절하게 뒤섞인 글래머 체형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바로 오크였다.
하얀색 버프코트에 잿빛 유니콘 조끼, 사슬로 이뤄진 스커트에 검은색 가터 벨트까지.
무엇보다 오크 특유의 하늘빛 피부가 매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오크……?"
"그렇게 놀랄 건 없잖아?"
"수도에서는 보기 드문 종족이라서 말이지. 물론 여긴 수도가 아니지만."
"후후, 의외로 안 떠네?"
도톰하면서도 도발적인 그녀의 입술이 움직인다.
오크를 보는 건 몇 번 있으나, 지금 그녀처럼 아름다운 오크는 처음인 일라이.
그는 그리메를 옆으로 늘어트리며 물었다.
"설마하니…나를 쫓던 게 너였어?"
"맞아. 저 도시에서 혼자서 밖으로 나가는 바보는 잘 없거든."
"그럼 틀렸어. 나는 바보가 아니거든."
"흐응, 무모하다고 봐야 할까?"
탐색을 하듯 일라이를 훑어보는 여자.
일라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통성명이나 하지. 나는 일라이."
"'무타샤'. 우리 고장에서는 용감한 여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
"좋은 이름이네."
무타샤가 다가오며 거리가 좁혀졌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가슴에 눈이 갔다.
유니콘 조끼에 가려진 가슴은 생각보다 풍만해 보였다.
D컵, 어쩌면 E컵에 근접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수많은 단련과 실전으로 다져진 그녀의 몸매가 군침을 돌게 만들었다.
'이 정도면 글래머 중에서도 상글래머잖아?쯧, 한달 뒤였으면 오크 창녀도 들어왔을 텐데.'
사창가에 자주 드나들어 본지라, 그곳의 사정을 잘 아는 일라이.
아마 멸망이 찾아오지 않았다면창녀 오크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적어도 그때는 기대했었다.
오크는 말 그대로 수도에서 보기 힘든 종족이니까.
"너무 빤히 쳐다보지 말라구."
"아, 실례."
"그렇게 쳐다보면……!"
스윽- 파팟- 탱-!
순식간에 몇 번의 공방이 오갔다.
무타샤가 갑자기 단검을 꺼내서 일라이에게 들이댄 것이다.
들고 있던 그리메로 가볍게 쳐낸 일라이가 뒤로 물러나려 할 때, 무타샤가 그리메에 단검을 들이밀며 힘을 줬다.
그러고서 짓는 미소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오크 특유의 두꺼운 인상보다, 인간에 가까운 매혹적인 인상이 더 많이 보였다.
"이렇게 하고 싶어지니까."
"무서운 여자라는 건 알겠군. 좀 치워 주실까?"
"후훗, 그래. 나도 이건 특기가 아니라서."
손아귀에서 가볍게 단검을 돌리던 무타샤.
그녀는 한 번 윙크를 하며 재빨리 칼집으로 단검을 되돌렸다.
생각보다 손이 빠른 것 같았다.
거기에 더해 몸놀림도 방심할 수준이 아니다.
한 순간에 일라이의 이목을 끌 만한 인물이었다.
일라이도 그리메를 거두며 물었다.
"그래서 왜 따라온 건데?"
"그저 흥미. 그리고 저기 있는 놈들과는 달라 보이더군."
"나야 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솔직한 대답.
하지만 무타샤는 고개를 저었다.
"후후, 그래도 저기 있는 인간들보다는 강인해 보이는데?"
"혹시 모르잖아? 나 역시 지속적으로 몬스터에게 시달리면 저렇게 될 지도."
"그럴 리가. 그 정도로 유약한 인간이었다면 이런 곳에 혼자서 나서진 않겠지."
"그것도 그런가?"
"저 도시에서 고작 50번의 격전을 치른 것 뿐이야. 고작 그 정도로 저 인간들은 지쳤지."
무타샤의 말에 일라이는 놀라고 말았다.
말이 좋아 50번이지, 크고 작은 싸움까지 전부 더하면 100번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지겹게 싸운 거라면, 몬스터에 질리고, 스스로의 한계에 질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충분히 도시의 인간들이 지친 이유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타샤는 강인한 성격인지, 고작 그 정도로 인간들이 지쳤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아, 이봐. 너희 오크는 전투종족이라 모르나 본데. 인간은 원래 그 정도로 지쳐."
"그런가? 내겐 아무 것도 아닌데 말이야."
"얼마나 많은 몬스터들을 해치웠는지 몰라도, 저 녀석들도 최선을 다 하다가 한계에 부딪친 거라고. 적어도…존중은 받을 자격이 있어."
상대가 죽은 전사든,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죽음을 기다리든 전사든.
누구에게나 존중은 필요하다.
그들은 충분히 그걸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겼다.
일라이의 말에 무타샤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신기하군. 전사를 존중하는인간이라. 너희 인간은 서로 시기하고, 못 잡아먹어 안달이지 않나?"
"꼭 그런건 아니지만, 그런 부류가 많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나는 원래 왕자라서 말이야."
"놀라움의 연속이군. 왕자라니……그런데 오만하지 않군."
"아니, 실은 오만해. 단지 인정할 건 인정하자는 취지지."
적막이 감도는 산 속.
일라이와 무타샤는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블랙 팽의 시체가 썩어가며 악취를 풍기기 시작했다.
비정상적인 힘을 얻은 대가로, 시체가 빠르게 썩는 탓이다.
혀를 차며 일라이가 말했다.
"아무튼 이 주변 몬스터들 수준을 알고 싶어서 여기 온 거야."
"동행해도 될까?"
"안 될 것도 없지."
서서히 그녀에게 관심이 기울었다.
일라이는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실력 있어, 성격 좋아, 몸매도 죽여줘, 외모도 오크치고 저 정도면상급. 나쁘지 않아.'
사실 일라이는 궁금했다.
인간 이상으로 단련된 육체인 오크.
그런 오크 여성이 두 다리로 허리를 안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보지를 있는 힘껏 수축시켜서 조이는 그 느낌은 어떨까?
그저 궁금한 것 투성이었다.
"용기 있기는 한데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무타샤, 그건 왜지?"
일라이가묻자 무타샤가 웃었다.
"나도 이미 해본 적 있거든. 그나마 적정선까지는 좋은데, 그 이상 나아가면 함정이니 뭐니 귀찮더라고."
"그래?"
몬스터들은 이 산 전체를 아지트로 삼을 요량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생각보다 혼자서 공략하긴 어려웠다.
무엇보다 나중에 악신의 편린에까지 근접하려면 더욱 애로사항이 생길 것이다.
"쯧, 어쩔 수 없나."
멈춰 서며 팔짱을 끼는 일라이.
그러자 곁에서 무타샤가히죽 웃었다.
"응, 어쩔 수없지."
파스슥- 타탓-!
그때 양쪽에서 몬스터들이 출현했다.
하마만큼 거대한 사슴인 '점보 스태그'와 뒤뚱거리며 걸어다니는 거대한 앵무새'푸와르'였다.
푸와르가 거대한 부리로 찍어 누르려 하자 일라이가 재빨리 그리메를 빼들어 막았다.
쉬익- 태탱-!
푸와르가 정신없이 뒤뚱거리며 빠르게 걸어다녔다.
움직이며 고개를 까닥이는 건 푸와르 같은 보행조류들의 특징이었다.
일라이는 푸와르에게 공격을 퍼부으며 슬쩍 돌아봤다.
그녀 역시 점보 스태그를 맞아서 싸우고 있었다.
"꾸와악!"
푸와르가 소리치며 날개로 퍼덕였다.
비록 날지는 못하지만 이걸 무기로 사용하는 푸와르.
일라이가 대각선으로 구르며 날개를 피했다.
그리고 앞에 있던 나무를 향해 뛰어올라 박찼다.
"하앗!"
타탓- 팍-!
나무를 박차는 그대로 푸와르를 향해 그리메를 내질렀다.
날개를 들어 막으려던 푸와르가 주둥이를 크게 벌렸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부리가 환상적으로 보였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 송곳]
쑤훅- 푸우욱-!
"꾸와하악!"
날개를 막을 수 있다고 여긴 푸와르가 당황했다.
그리메는 정확히 날개를 뚫고 푸와르의 왼쪽 눈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다만 죽지는 않았다.
푸와르에게서 그리메를 빼낸 일라이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제자리에서 방방 뛰던 푸와르가 제자리에서 도약하며 일라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꾸우까아아아아아악!"
[Scared howl]
푸와르의 기술 중 하나인 공명파동에 의한 외침이었다.
정면에서 이걸 맞는다면 제아무리 일라이라 하더라도 고막이 터질 것이다.
한참 움직이던 일라이는 파동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고 정면으로 굴렀다.
위험을 만날 수록 도망가기 보다 앞서 나가는 일라이.
그런 그에게 이 정도는 그다지 위협이라 할 수 없었다.
"당장 치킨을 해먹고 싶지만, 부리 하나로 참는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 숨통 자르기]
순식간에 푸와르에게 접근해서 대가리를 썰어버리는 일라이.
그는 무겁게 떨어지는 푸와르의 부리를 깔끔하게 해체하며 안아들었다.
만약 이걸 길드에 가져가서 판다면 제법 거금을 마련할 것이다.
푸와르의 부리는 크고 단단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장식품이나 장비를 만들 때 자주 쓰인다.
단지 푸와르 자체가 무서운 몬스터라 자주 보기 힘들 뿐.
"후우……무타샤는?"
새삼 부리의 무게를 체감하며 고개를 돌렸다.
막 무타샤가 점보 스태그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녀의 손 끝에서 어두운 에너지가 모이더니 번개 모양으로 변하며 점보 스태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흑선술 - 검은 벼락]
콰르릉- 타아앙-!
"브우어어엉."
음울한 괴성과 함께 점보 스태그가 죽어버렸다.
무타샤가 사용하는 힘은 오크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힘중 하나인 '흑선술'이었다.
자연에 퍼진 수많은 에너지 중 원초라 할 수 있는 어둠.
그 어둠을 가져와 친근하게 힘으로 다루는 능력이었다.
보기 드문 능력이라 일라이는 바로 무타샤에게 말했다.
"이봐, 무타샤! 너 나랑 계약하지 않을래?"
"엥?"
갑작스런 소리에 무타샤가 당황했다.
일라이는 바로 웃어 넘기며 그녀와 함께 도프스로 향했다.
푸와르의 부리 때문에 무겁기는 해도 마음만은 가벼운 일라이.
그는 호쾌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신기한 힘을 쓰더라?"
"흑선술이다. 아마 너는 모를 거야."
"내가 나름 모험가들에 관심이 많아서. 흑선술은 들어는 봤지."
"호오, 그래? 다른 인간들은 이게 불길하다며 싫어하던데."
"불길하기는. 만약 네가 동료라면 엄청 든든할 것 같은데?"
확실히 일라이는 다른 인간들과는 다르다.
다른 인간들은 색안경을 끼고 무조건적으로 무타샤를 대한다.
그녀의 외모가 훌륭하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오크.
언제 인간의 뒤통수를 치고 본색을 드러낼 지 모른다.
하지만 일라이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온전히 그녀를 실력자로서 대우하고 있었다.
"일라이, 정말 신기한 남자로군."
"그런 말 하도 들어서 질린다."
"호오, 그런가?"
"아무튼 얼른 가서 쉬자고. 이 애물단지 좀 갖다 팔고 싶으니까."
일라이가 가지고 있는 푸와르의 부리는 제법 큰 것이었다.
20kg짜리 쌀 한 가마니를 가지고 가는 것과 비슷했다.
그나마 타고난 근력이 아니었다면 푸와르의 부리는 본래 둘이나 셋이서 들어야 할 물건이었다.
뒷짐을 진 채로 무타샤가 일라이에게 물었다.
"함께 들어줄까?"
"됐어, 됐어. 아무리 멋진 여전사라도 결국 여자.이런 건 내가 드는 게 나아."
"…나를 여자로 대하는군."
"아, 그 소리도 들은 적 있지."
멋지게 웃어 젖히는 일라이.
무타샤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마른 침을 삼켰다.
살면서 평생 누군가에게 가슴 두근거릴 일이 없을 거라 여겼는데.
'내가 어떻게 된 거지?마치 술을 처음 마신 것처럼…….'
가슴이 쉽게 진정되지 않을 것 같았다.
도프스에 도착하자마자 일라이는 푸와르의부리를 길드에 팔아치웠다.
제법 거금을 만진 일라이가 웃으며 무타샤에게 소정의 사례금을 지불했다.
무타샤가 놀라며 물었다.
"이걸 왜?"
"네덕이기도 해. 만약 네가 아니었다면 내 뒤를 점보 스태그가 쳐버렸겠지."
"너 정도의 실력자라면 그 정도는 피했을 거야."
"그래도 받아둬.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으니까."
일라이의 배포에 무타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남자였다.
다른 인간들처럼 고정관념에 입각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자신을대한 것이다.
"무타샤, 만나서 반가웠어. 나도 한동안 여기 있을 건데. 자주 보겠네?"
"그렇군."
"그럼……."
일라이가 막 헤어지려 할 때였다.
입술을 적시며무타샤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일라이."
"음?"
"내가 묵는 곳으로 오지 않겠어? 혹시 모르잖아. 비상시에 서로 연락을 취해야 할 지도…모르니까."
말 끝을 살짝 흐리는 무타샤.
일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건 그야말로 단 둘이 남고 싶다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