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아주 개판이 따로 없어!
한때 에레스트 대륙에 존재했다는 악신,'카오스 마키나'.
태초의 영웅왕에 의해 그 육신이 해체되고, 전능의 성녀에 의해 영혼마저 먼 우주로 나아가 갈가리 찢겨지게 됐다.
그렇게 악신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비로소 인간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었다.
허나 이제 와서 악신의 편린이라니?
"제대로 설명 좀 부탁."
"저희로서도 제한적으로 알고있을 뿐입니다. 다만, 이 악신의 편린은 과거에 악신처럼 몬스터들을 조종하고 있어요."
"몬스터만?"
"아뇨, 여기에는 인간도 포함입니다."
"그게 말이나 됩니까?"
일부러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지 않기 위해 정중하게 묻는 일라이.
그러나 마음은 벌써부터 동요하고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악신의 편린이다.
그럼 얼마나 사악할까?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세상의 악이라 불리기에 적합할 것이다.
"저희도 처음 발견했을 때는의아했어요. 그건 마치 새까만 연기에 감싸인 거대한 고치 같았죠. 저희 길드의 탐사대원들이 찾아 갔을 때는, 이미 수많은 시체와 유해가 나뒹굴고 있더군요."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그건 잘 몰라요. 사실 세상이 이렇게 되고 나서 이 도시는 나름대로 무사했어요. 그런데 한 차례 큰 충돌음이 들렸고, 그 날 이후로 몬스터들이 미친 듯이 이곳에 몰려 들었죠."
일라이는 턱을 쓸었다.
한 차례 큰 충돌음.
아마 악신의 편린이 자신이 나타났음을 알리는 소리리라.
그렇다면 이것을 근거로, 악신의 편린이 몬스터를 부른다는 길드의 주장도 그럴 듯 했다.
"그건 회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악신의 편린을 회수할 수는 없어요. 말 그대로 크기가 코끼리에 가까운 거대한 고치니까. 그리고 거기에 닿은 인간은, 변해버렸어요."
"변한다니?"
일라이의 질문에 여직원은 잠시 두 눈을 떨었다.
그녀는 바로 눈앞에 악신의 편린이라도 있는 것 마냥 두려워 하고 있었다.
항상 침착함을 강요받는 위치에 있는 여직원이 이럴정도라니.
"마치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어요.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주변에 있는 사람을 죽이려 했어요."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건가……."
"마음인지, 영혼인지. 어느 쪽을 조종하는 것이든 그게 두려운 존재임은 분명해요."
"하지만……."
"이 도시는 가망이 없어요. 제가 이런 말하면 안 되는 위치인 건 알지만, 이 도시는 이미…그것이 나타나고 나서……."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여직원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일라이는 이 사태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냥 지나칠 만큼 가벼운 일은 아니니까.
'나름 번영을 누리던 도시가 절망에 빠져 있다. 이유는 악신의 편린 때문.'
'악신은 분명 해체되어 사라졌다. 그게 설령 전설이나 신화에 불과한 소리라 할지라도 불신할 근거는 안 된다.'
'코끼리만큼 거대한 고치. 거기에 닿은 모든 것을 변질시키는 것까지. 굳이 닿지 않더라도 본래 사악한 것을 끌어들이는 능력이 있는 건가?'
'세계 멸망은 전체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므로 이 도시에 몬스터가 몰리는 건 사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그 수준이 심할 뿐. 그게 그것 때문이라면…….'
생각을 멈춘 일라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그의 시야에 지도가 보였다.
"음?"
"가져가세요. 만약 그걸 조사할 생각이라면 이게 도움이 될 거예요."
"가까이 다가가면 나도 미쳐버릴지 모르는데?"
"길드는…받은 대가만큼 정보를 지불하는 법이랍니다."
애써 웃는 여직원.
그녀의 조금은 당돌한 모습에 일라이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뼛속까지 여직원이지 않은가?
그러니 이 절망적인 곳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거고.
결심한 듯 일라이가 일어섰다.
여직원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여주며 말했다.
"걱정마요. 내가 성자는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내 직분에 어울리는 짓은 할 테니."
"네? 그게 뭐죠……?"
"용사."
시크하게 대답하며일라이는 길드를 나섰다.
지도를 자세히 살펴 보니 제법 복잡한 지형과 X자로 표시된 곳이 보였다.
아마 이곳에 악신의 편린이 있는 것 같았다.
우선 일라이는 근처 벤치에 앉아서 고민하기로 했다.
"왜이제 와서 악신이…이거 혹시 암흑의 존재 아니야?"
아직 암흑의 존재가 뭔지도 알려지지 않은 상황.
그러나 암흑의 존재가 악신과 동일인물이라 해도 이상할 건 없다.
이미 세상은 멸망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충분히 개판이기 때문이다.
주변에 널려 있는 시체에서 나는 구린내에 일라이는 표정을 찌푸렸다.
그는 일어서며 지도를 접었다.
"좀 더 고민하기 좋은 곳은 없나?"
거리에 버젓이 시체가 널려 있다.
그걸 치울 생각조차 않는다.
그 정도로 도프스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한적한 곳을 찾으려 할 때, 주변을 순찰하고 있는 자경대원들이 보였다.
"오늘은 몬스터들이 얼마나 올까?"
"몰라…그냥 살고 싶어."
"나도, 나도 살고 싶어. 제발……."
"애처럼 징징대지마. 결국 살고 싶어도 죽어야 하는 게 지금 상황이라고."
자경대원들끼리 암울한 얘기를 나눴다.
그걸 멍하니 서서지켜보던 일라이가 허탈하게 웃었다.
마땅히 도시의 치안을 유지해야 할 이들도 마음이 꺾인 것이다.
"아주 별 지랄들을……."
분위기가 영 좋지 못했다.
가만히 있어도 자살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였다.
이제는 물조차 나오지 않는 분수대를 지나 계속 걸어가는 일라이.
곧 도시의 다른쪽 입구가 보이는 곳까지 오고 나서야 겨우 한적한 곳이 나왔다.
경계탑에 병사들이 있긴 했지만, 저들은 하나 같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경계서는 거 봐라. 씨발, 왕성이었으면 한 마디 오지게 박았을 텐데."
혀를 차며 벤치에 앉는 일라이.
그는 지도를 펼치며 숨을 골랐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 명확하게 구분했다.
"나는 용사야, 선택받은 놈이니 선택받은 놈답게 일을 해야겠지? 그럼 이 도시의절망을 조금은 덜어주자고."
그러려면 그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악신의 편린을 박살내야 한다.
그러나 그게 쉬울까?
잠시 지도를 멍하니 내려다보던 일라이가 피식 웃었다.
지금까지 싸워온 상대를 떠올렸다.
"어려울 것 없지. 고작 악신의 편린이야. 악신이 대단한 놈인지 모르겠다만, 그 편린이라면 그저 일부분이지. 사람을 미치게 해? 그건 아넬도 하겠다."
따지고 보면 그다지 대단할 것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 몬스터들을 부르는 건 곤란했다.
말 한 마디 없이 지도만 살피던 일라이는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제길, 내가 마법사였으면 이걸 이용했을 텐데. 몬스터를 부르는 힘이 흔한 것도 아니고."
제법 비상한 생각이지만 그럴 마법이 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우선 여관으로 돌아가서 여자들과 상의를 해야 했다.
그에 앞서 일라이는 눈에 보이는 입구로 향했다.
지도도 얻었겠다, 당장 하고 싶은 게 생긴 것이다.
그가 버젓이 입구로 나가는 위험한 짓을 하는데도, 경비들은 막지 않았다.
"군기 봐라."
일부러 들으라는 듯 한 마디 하며 도시를 나서는 일라이.
그는 그리메를 빼들며 천천히 산길을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산길은 걷는 것만으로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이러다가 드래건이 나와도 절로 고개를 끄덕일 만큼 살기가 사방에서 도사렸다.
'산이면 엄폐물도 많고, 자생할 수 있는 여건도 어느 정도는 된다. 괜히 괴짜 금수저들이 산에서 자연인 코스프레하는 게 아니라고.'
우린에게 들은 말들까지 써먹으며 생각을 마치는 일라이.
산은 천혜의 요새가 될 수도, 천연 음식의 보고가 될 수도 있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웅크리고 있다면 몬스터라도 오랫동안 자리를 지킬 수 있다.
그러므로 일라이는 그런 몬스터들을 조금이나마 줄이고 싶었다.
사실 이렇게나온 가장 큰 이유는 몸이 근질거려서였다.
'음? 오호라…….'
뒤에서 따라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드디어 몬스터들이 냄새를 맡은 것이라 여겼다.
마른 입술을 적시며 일라이가 싸울 준비를 했다.
스슥- 슥-!
그때 양쪽 수풀에서 무언가가 튀어 올랐다.
일라이가 두 눈을 빛내며 외쳤다.
"하아, '블랙 팽'! 호랑이만큼 거대한 늑대 괴물새끼들!"
"커허를!"
거칠게 짖으며 일라이를 덮치는두 마리의 블랙 팽들.
뒤로 물러나며 전열을 가다듬은 일라이가 바로 지면을 박찼다.
가까이에 있던 블랙 팽을 향해 그리메를 부드럽게 휘둘렀다.
으르렁거리며 몸을 비틀며 피하는 블랙 팽.
그때 일라이가 기다렸다는 듯 막 회피한 블랙 팽을 발판 삼아 허공으로 뛰어 올랐다.
뒤에서 연계를 준비하고 있던 다른 블랙 팽을 향해 전력으로 그리메를 휘둘렀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 추수]
콰직- 푸화악-!
순식간에 머리가 이등분된 블랙 팽이 비명도 못 지르고 죽었다.
튀는 피를 피하며 일라이가 그리메를 떨쳤다.
동료를 잃은 블랙 팽이 바로 침을 튀기며 쇄도했다.
그 속도는 무척 위협적이었으나, 일라이에게는 하품 나올 정도로 느리게 느껴졌다.
바앗바앗- 타악-!
허공을 향해 뛰어오르는 블랙 팽.
자신을 향해 그림지가 크게 지는 것을 보며 일라이가 웃었다.
그는 날렵하게 앞으로 뛰어 나가며 블랙 팽을 피했다.
블랙 팽이 막 지면에 착지할 때, 일라이가 등을 보인 채로 지면을 박차 거리를 좁혔다.
그와 동시에 블랙 팽이 꼬리를 휘둘러 견제하려 했다.
"어설퍼."
안광을 흩뿌리며 블랙 팽의 꼬리를 피하는 일라이.
상체를 피하고, 무릎을 살짝 굽힌 다음, 몸의 방향을 일시적으로 틀어 폭발적인 가속을 발휘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블랙 팽의 정면으로 돌아간 일라이가 그리메를 한 손으로 내질렀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 송곳]
푸우욱- 뿌각-!
"케, 케에헹……!"
순식간에 당해버린 블랙 팽이 다 죽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리메에 찔려 버둥대던 블랙 팽은 애처로운 표정과 함께 죽어버렸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일라이가 혀를 찼다.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것들이 저 도시를 괴롭히던 놈들 중 일부겠지? 확실히 일개 자경대원이나 애송이 모험가들이 상대하기에는 벅차겠군."
일라이니까 쉽게 죽인 것이다.
만약 일반적인 모험가나 자경대원이라면, 블랙 팽 하나를 잡는 데 최소 10명의 인원이 필요하다.
이 정도로도 불안하다고 평가받을지도 모른다.
블랙 팽의 시체를 넘어서 더욱 산의 안쪽으로 들어가려 했다.
오늘 안에 악신의 편린을 볼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 주변에 널려 있는 몬스터들의 수준을 알고 싶었다.
"이봐, 그 앞은 지옥일 수 있다고?"
그때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나른한 여성의 목소리가 일라이의 뒤통수를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