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산채 도시, 도프스
세계 멸망의 영향으로 잔뜩 얼어붙은 되른 강을 넘어, 마침내 오소리 산맥에 도달한 일라이 일행.
산채 도시인 도프스는 생각보다 더욱 아름다운 경관을 지니고 있었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식물과 작은 야생동물들이 이곳저곳에서 보였다.
무엇보다 열대지역에서만 볼 수 있다는 화려한 부리의 앵무새들까지.
이곳은 어쩌면 세상에 하나 남은 이상향이 아닐까 싶었다.
"산 전체가 너무 음산한데."
"이 정도규모의 산이 음산하기까지 하면 사실 안 들어가는 게 맞다."
일라이의 말에 레스레모나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미 행선지로 정한 이상 안 갈 수 없었다.
그나마 밤을 새서 달린 가치는 있으니까.
도프스에 들어서니 음산함은 한층 더해졌다.
"우으으……."
"괜찮아, 조금만 버텨. 제발 조금만."
"우린 다 죽을 거야. 우린 다…끝…장."
광활한 영토를 자랑하는 산채 도시 도프스의 거리는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임의로 쳐놓은 방책은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을 만큼 위태로웠다.
그나마 도개교처럼 문을 만들기는 했지만, 지키는 사람이 중상을 입었는지 그냥 열고 들어가는 게 가능했다.
거기에 더해 거리에 널려 있는 수많은 시체와 그걸 갉아먹는 쥐들, 그리고 곧 시체가 될 모험가들이 모였다.
그들 중에 갑옷까지 입은 이들이 있어서 간신히 이곳의 자경대라고 알 수 있었다.
"멸망 직전이군."
일라이가 한숨을 쉬었다.
그걸 보고 있던 미스레아가 우울한 표저을 지었다.
"다…죽는 거야?"
"글쎄다.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시간이 해결해주면 살아?"
"아니, 그 반대다."
결국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다.
이미 세상에 버려졌고, 운명에 버려졌다.
파멸만이 남은 세상에서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건 오직 힘뿐이었다.
일라이의 대답에 미스레아가 입술을 비죽였다.
"미워."
"시끄러, 현실을 말한 것 뿐이야."
"하지만 저 사람들 불쌍한 걸? 그리고……."
"그리고?"
미스레아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두 눈을 서서히 가늘게 떴다.
어린 모습임에도 묘하게 색기가 넘쳤다.
"맛있을 것 같아."
"……다시 그런 말하면 때릴 거야."
"힝, 왜?"
대답을 피하는 일라이.
그는 리비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애라고 해도 본능은 살아 있다.
그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붉은 혈족이기 때문이다.
리비카가 간신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일까?
"일라이, 저곳이 여관인 것 같다."
"그럼 거기로 가자고."
일라이와 레스레모나가 말을 맞췄다.
이 모든 걸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세지가 표정을 찌푸렸다.
불길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저기, 일라이. 여기 말고 다른 데 없어?"
"느낌 안 좋지? 나도 알아. 그런데 여기 말곤 없어."
"여긴 다른 곳도 아니고 산채 도시야. 산 위에 도시를 만든 것도 어렵지만, 그 지형을 이용하면 쳐들어오는 것도 힘들어."
"알아."
"그런 곳이 이렇게까지 망가졌어. 대체 뭐에 시달린 건데?"
세지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필요한 건편히 쉴 곳 뿐이었다.
그나마 도시 자체가 마비된 건 아닌지 운영되는 여관은 제법 보였다.
여관에 들어서니 불안한 기색의 사람들이 먼저 보였다.
"어, 어서 오세요…손님."
여관주인으로 보이는 듬직한 체구의 남자가 말을 더듬었다.
그의 얼굴은 살짝 창백해져 있었다.
일라이는 방을 요구하며 물었다.
"요 며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네? 그, 악몽으로 치부하렵니다. 하하, 그게 현실일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게 심각해?"
"꿈입니다, 꿈. 네, 모두 악몽이라…고요."
급기야 현실도피까지.
이쯤되면 이곳이 얼마나 심각한 곳인지 알 수 있었다.
차라리 펠로르드처럼 체념한 채로 주저앉은곳이면 나을 텐데.
이곳은 그런 것도 아니라서, 죽지도, 살아 있지도 않은 묘한 상태였다.
방으로 올라가며 일라이가 말했다.
"각자 잘 쉬고. 식사 때 보자고."
"그래."
"켄타우르스인 나한테까지 방을 주다니. 저 여관주인, 정신이 나간 것 같은데?"
"후우……."
일라이는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문이 열리며 유리엣이 들어왔다.
벽에 칼집을 기대며 일라이가 물었다.
"왜?"
"하나 제안을할까 해서. 여기 제법 암울하잖아? 실제로 그 근원이 웅크리고 있는 곳이고."
"뭔가 느꼈구나? 제안이라니 들어나 볼까."
침대에 걸터앉아 턱짓을 하는 일라이.
유리엣은 방문을 등진 채로 서있더니 흐뭇하게 웃었다.
"잠깐 다른 얘기를 해볼게. 에레스트 대륙은 그 오랜 역사동안인간이 드래건과 이어진 적이 없어. 이건 알지?"
"야사로라도 존재할 줄 알았는데. 정말 없나 보군."
어깨를 으쓱이는 일라이.
머리칼을 손질하며 유리엣이 웃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최초의 주인공이 네가 될 지도 모르지."
"내가?"
"너랑 같이 다니며 많은 걸 봐왔어. 어떤 때는 리더처럼 행동했고, 어떤 때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기도 했어. 내게 기술을 날렸을때처럼."
"내가 한 용기 하지."
"이곳에서는 어떨까? 처음부터 답을 말하면 시시하니 감춰두도록 할게."
"하, 상관없어. 여기에 뭐가 있든, 얼마나 대단한 놈이 있든. 다 개박살내고 내가 세상의 왕이라는 걸 증명하면 그만이야."
침대에서 일어나 자신감을 표출하는 일라이.
세상에 왕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오직 자신뿐이다.
그 누구도 왕을 자칭할 수 없고, 그건 참칭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일라이는 스스로 유일왕이 되기로 했다.
일라이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유리엣은 시선을 돌렸다.
안개가 희미하게 낀 바깥이 창문을 통해 보였다.
"이곳의 문제는 조만간 밝혀질 거야. 네 스스로 알아봐도 돼. 그걸 네가 해결한다면, 나랑 동침하게 해주지."
"호오, 강제로 바란 건 아닌데."
"알아, 내 마음이 움직여서 그런 거야. 하지만 가능할까?"
도발하듯 묻는 유리엣.
일라이는 피식 웃었다.
도전은 항상 반기니까.
"충분해. 그럼 그 날을 위해 몸이나 깨끗하게 하고 있으라고."
"나는 언제나 깨끗해. 드래건이니까."
가볍게 윙크를 하며 방을 나가버리는 유리엣.
그녀가 있던 곳을 바라보며 일라이는 히죽 웃었다.
흥미와 쾌감과 사악함이 서려 있는 미소였다.
더없이 일라이다웠다.
"드디어 마음이 넘어 온 건가? 그나저나 이곳의 문제라니? 흠……."
턱을 괴며 창가로 가는 일라이.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거리에는 온통 상처입거나, 좌절해서 주저앉아 있는 이들이 많다.
저런 이들이라도 막상 무슨 일이 일어나면 싸우기는 할 것이다.
"그 싸움이 투지가 아니라 발악에 가까운 짓인 게 문제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처음에는 저들도 이곳을 희망이라 여기며 왔을 것이다.
넓은 도시이니 만큼, 모험가 역시 많을 것이다.
그만큼 내로라하는 이들 역시 많았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들 한 가지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좌절.
이 하나로 모든 게 설명되고 있었다.
"하여간 좆 달고 태어났으면서 고개나 숙이고. 새끼들…죽는 한이 있어도 싸우라고."
조금은 양심없는 소리를 하며 일라이는 외출 준비를 했다.
원래 입고 있던 코트는 벗어 던지고, 짧지만 두꺼운 조끼를 입었다.
그리고 칼집을 차며 아래로 내려갔다.
수많은 사람이 머무는 곳이니만큼 여러 소음이 나야 정상이다.
그런데 공동묘지도 아니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쌀쌀하구만."
아래로 내려가니 아예 여관 로비에 주저앉아 있는 이들이많았다.
거지인지, 모험가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나 살고 싶어, 여보, 어흑……."
"그래, 괜찮아, 우린 꿈을 꾸고 있잖아? 하하."
여관주인과 그 와이프가 서로 끌어안은 채로 울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모습이 당연하게 나타나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
머리를 긁적이며 일라이는 바로 밖으로 나갔다.
"살고 싶어, 제발."
"엄마가 보고 싶다. 헤헤, 엄마……."
"우으, 고향이 그리워. 하지만 못 돌아가겠지."
여기 저기서 우는 소리, 죽는 소리가 들렸다.
일라이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굳이 시선을 끌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길드를 찾으며 중얼거렸다.
"아주 개판이로군. 사기가 이 정도면 전력으로 삼기도 애매한데. 제발 길드는 이러지 말자."
크게 한숨을 쉬며 길드를 찾는 일라이.
10분여를 돌아다니니 간신히 길드를 찾아낼 수 있었다.
길드 근처에는 머리에 붕대를 감거나,아예 팔 하나를 잃은 모험가들이 보였다.
암울함이 한층 더해졌다.
그 암울함을 뒤로 하며 일라이는 길드에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모험가님."
그나마 길드는 정상이었다.
직원들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흐르는 건 비슷하지만, 그래도 정상인 다운 모습이었다.
"뭐 좀 물읍시다. 원래 뭐 물어볼 때마다 돈을 지불해야 하지만, 지금 존나 답답하거든?"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된 분이시군요. 네, 대가없이 말씀해드리죠."
이제익숙한 건지 일라이를 알아본 여직원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붉은 머리칼을 트윈테일로 땋은 여자였다.
20대 초반은 되어 보이는 외모였지만, 어두운 빛이 얼굴에 서려 있었다.
"이 도시는 현재 몬스터들에게 공격받고 있어요."
"종류는?"
"다양해요. 놀들이 조직적으로 쳐들어 오거나, 거인들이 방벽을 박살내러 오거나, 심지어 유령 같은 것들도 자주 출몰해요."
"미친……."
"칠흑의 사도에 대해서 아시나요? 가끔 그들이 뒤섞여서 오기도 합니다."
"……여기에 사람들이 살아남은 게 기적이군."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칠흑의 사도까지 가세한 것이면 힘들 정도였다.
다만 이 얘기에서 일라이는 이상한 걸 찾아냈다.
칠흑의 사도들은 자기들끼리 움직이지 않는 건가?
"칠흑의 사도는 자기들끼리 움직이잖수?"
"꼭 그렇지도 않은가 보더라고요. 어제까지만 해도 살아있던 마법사님이 말하더군요. 이 도시에는 악을 끌어들이는 무언가가 있다고."
"그런 게 있어? 그나저나 어제까지 살아 있었다면 지금은?"
"네, 그래요."
죽었다는 말을 다른 말로 대체하는 직원.
일라이는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알면 알수록 암울하기만 한 곳이었다.
세계에 파멸이 찾아오고, 사람들이 무수히 죽어나갔다.
국가 역시 무너진 게여러 곳.
그러니 어쩌면 이 분위기야말로 정상일지도 몰랐다.
"그것에 대해 좀 물어봅시다. 악을 끌어들이는 게 대체 뭔지."
"하지만그건 비용이……."
"그런 건 걱정 말고."
텅-!
금화가 가득 든 주머니를 꺼내 데스크에 올려두는 일라이.
그의 거침없는 모습에 여직원이 밝게 웃었다.
오랜만에 웃는 것처럼 간절함까지 엿보이기도 했다.
일라이가 피식 웃자 여직원이 바로 입을 열었다.
"조금 비싼 정보일지도 모릅니다."
"됐어, 알고 있기만 해도 이득일 테니까."
"네, 그럼……."
심호흡을 한 여직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얼굴은 제법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악을 끌어들이는 존재, 그건 바로 과거부터 존재했다는……."
"존재했다는?"
"악신의 편린……이라고 합니다."
"뭐?"
여직원의 얘기에 일라이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