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오랜만에 보는 세 여자
"이, 일라이! 저거……!"
이제 막 깨어난 우린이일라이의 발치를 가리켰다.
승리의 여운을 막 떼어내며 일라이가 내려다봤다.
미스레아의 시체가 녹아버린 곳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생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뭐야?"
설마 완전히 죽은 게 아닌 걸까?
아니면 마지막 발악을 하려고?
일라이가 다시 그리메를빼들고 찌르려 할 때였다.
빛나고 있던 핏덩이가 마침내 하나의 형태를 이뤘다.
그건 바로 얇은 붉은색 원피스를 입은 10대 중반쯤의 소녀였다.
"우응……."
"엇?"
마치 미스레아가 어려진 것처럼 생긴 소녀.
그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기우뚱거리며 일어섰다.
보기만 해도 언제 쓰러질지 몰라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비주얼.
가장 처음 본 일라이를 올려다보며 소녀가 물었다.
"아빠?"
"뭐, 뭐? 아니야!"
일라이가 단번에 표정을 구겼다.
결혼은 커녕 제대로 된 연애조차 안 해봤다.
그런데 난데없이 아빠라 불려야 한다니?
재앙에 가까운 소리인지라 일라이가 격렬하게 부정했다.
그 모습이 소녀에게는 퍽 인상적이었다.
"아빠 아냐?"
"아니거든?"
"그럼 치한?"
"……어린애한테 관심없다."
슬슬 인내심의한계치에 근접하는 순간.
미스레아가 놀려먹으려고 남겨둔 게 확실하다고 여겼다.
아니면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때 리비카가 이마를 짚으며 오더니 입을 열었다.
"붉은 혈족의 능력이군요."
"붉은 혈족의 능력?"
팔짱을 낀 채로 일라이가 물었다.
리비카는 흐뭇하게 웃으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얌전한 토끼처럼 소녀는 가만히 있었다.
"네, 붉은 혈족은 어느 정도수준에 도달하면 자신의 후생을 만들 능력이 주어져요. 아마 미스레아라는 여자는 무의식 중에 그 능력을 사용한 것 같아요."
"그년, 확실히 능력은 엄청났어."
"그래요? 아무튼 이 소녀는 그 여자의 분신인 셈입니다."
"그럼 죽여야 하는 거 아니야? 또 그런 짓을 할 텐데."
일라이는 현실적이지만, 또한 냉정하기도 하다.
이 소녀가 미스레아의 분신이라면, 분명 똑같은 일을 저지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자신들까지 위협할 것이다.
그런 꼴은 두고볼 수 없었다.
그러나 리비카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분신이라고는 하지만 꼭 똑같지는 않아요."
"못 믿겠는데?"
"왕자님, 우리 인간은 살면서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죠? 성격이 나쁜 사람이 고아에 대륙을 떠돈다고 해도, 십중팔구 강진모처럼 되는 건 아니듯."
"뭐, 그건 그래. 하지만 이 녀석에겐 연쇄살인마의 영혼이 담겨 있다고."
"그걸 우리가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보면…얘는 그냥 어린애일 뿐이잖아요?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고, 우리가 알던 그녀와 비슷하게 살 거라는 보장도 없어요."
한숨을 쉬며 리비카는 다시 미스레아를 쓰다듬었다.
그때 미스레아는 뒤로 물러나더니 일라이의 다리를 잡으며 입을 비죽였다.
"아빠가 좋아."
"아빠 아니라고, 염병!"
일라이가 한 대 쥐어박을 것처럼 화냈다.
하지만 미스레아는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돌하게 그와 눈을 마주쳤다.
손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화내면 인기 없어."
"야, 너 미스레아 맞지? 지금 나 농락할려고 연기하는 거지!"
"그게 뭐야? 이상한 소리하고 있어, 납치범."
"납치범 아니라고!"
온갖 모독을 당하는 일라이.
지켜보고 있던 여자들이 저마다 피식 웃었다.
비록 위협적인 능력으로 사람들을 죽이던 여자지만.
지금 그녀는 완전히 리셋된 채로 새로 태어났다.
마치 때가 되면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불사조처럼.
"아무튼 왕자님. 이 애한테 죄는 없어요."
"그런 것 같다. 없던 죄도 만들고 싶어진다만."
"호호호, 그럼 어떻게 하실래요?"
"데려가야지. 여기에 내버려두면 똑같이 될 테니까."
일라이의 말에 모두가 놀랐다.
물론 이런 곳에 미스레아 혼자 내버려 두는 건 옳지 않다.
들짐승이나 몬스터한테 습격당할 수도 있고, 멀쩡히 살아 있더라도 이전의 실수를 반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동행시키는 것도 위험했다.
"그, 그래도 되겠어?"
세지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일라이는 미스레아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안아올렸다.
갑자기 눈높이가 올라가자 미스레아가 기뻐했다.
"와아, 난다!"
"그럼 어쩌겠어? 여기서 버려둘 수도 없고. 딱히 맡길 곳도 없잖아? 읏차."
대답을 마치며 일라이는 왼쪽 어깨에 미스레아를 올려뒀다.
그러자 미스레아는 마치 자기 자리인 것처럼 익숙하게 걸터앉았다.
갑자기 자리를 빼앗기게 된 아넬이 불퉁거리며 날아왔다.
"잠깐, 거긴 내 자리라고!"
"……내 어깨가 언제부터 네 전용석이 됐냐?"
"그래도! 그래도오!"
"으아, 시끄러. 너 나랑 놀면서 가슴도 서서히 나오고, 몸도 커지잖아? 슬슬 너 올려두기 빡세다고."
"쳇, 잘만 올렸으면서!"
"이제 좀 내려올 때도 되지 않았냐? 미래의 글래머 누님."
일라이의 말 한 마디에 아넬은 얼굴을 붉혔다.
모든 몽마라면 어린 몸매보다 성숙한 몸매를 원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넬은 자신이 벌써부터 글래머가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후후, 몸매만 더 나아진다면 누구라도 홀릴 자신 있어. 드래건이라도!'
속으로 호언장담하는 아넬.
일라이는 미스레아를 어깨에 얹은 채로 세지에 올라 탔다.
유계 마을이었던 곳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미스레아의 능력에 휘말려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일라이는 카드를 살펴보다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런……! 미스레아, 좀 내려와 있을래?"
"응!"
미스레아는 능숙하게 어깨에서 내려오더니 일라이의 앞에 가서 앉았다.
그녀의 통통한 엉덩이가 일라이의 허벅지에 닿았다.
잠시 미스레아를 내려다보던 일라이가 급히 카드를 확인했다.
엘브루트 영지에 있던 세 여자가 위급하다는 표시가 떠오른 것이다.
"제길, 언제부터 이런 거지? 밀레라, 발렌, 자넷 소환!"
급히 세 여자를 소환하는 일라이.
그러자 엄청 지쳐보이고, 옷도 너덜너덜한 세 여자가 순식간에 나타났다.
엘브루트 영지에서 본 이후로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앗……."
레피나가 놀라며 여자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넬은 일라이의 뒤에 앉은 채로 말했다.
"귀족 여자들이네? 반갑다, 반가워."
하지만 여자들은 전혀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여자들은 떨고 있었다.
결국 일라이는 세지에서 내려서 여자들을 최대한 안아주려 했다.
일라이의 얼굴에 여자들은 그제야 안도하며 그에게 안겼다.
"고모, 대체 무슨 일인데요?"
일라이가 정중하게 물었다.
머리칼을 위로 올리며 밀레라가 애써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다.
"여, 영지로…새까만 사람들이 나타났어. 아니지, 자기들을 사도라고 하던데."
"칠흑의 사도들?"
"맞아! 그래서막으려고 했는데. 조금이라도 더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는데……으흑."
"괜찮아요, 저희도 그놈들 만나서 도망친 적 있어요. 괜찮아요."
일라이는 다시 한 번 밀레라를 안아주며 위로했다.
그의 품에 안긴 채로 밀레라는 오열했다.
귀족으로서 사람들을 지켜야 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한 것이다.
거기에 자기들 목숨만 간신히 부지한 채로 살아 있으니 더욱 불명예라 여기는 것 같았다.
오늘따라 가냘픈 밀레라의 어깨를 잡아주며 일라이는 한숨을 쉬었다.
뒤에서 발렌과 자넷이 풀죽은 모습이 보였다.
"너흰 어때? 다친 데 없어?"
"다치기보다 죽을 뻔했어. 사도들이 막 영주관을 박살내려 했거든. 그 직전에 여기로 온 거야."
"타이밍 참 기가 막히군."
일라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대답하던 발렌이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자넷은 아쉬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크로스백 형태의 가방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핸드 캐논을 더 개조해야 할 것 같아. 이 정도로는…갑옷에 흠집도 못 냈어."
"너라면 더 나아질 수 있을 거야. 아무튼 반가워요, 숙녀분들. 여긴 내 동료들이야."
일라이는 레스레모나와 다른 여자들까지 소환해서 서로 인사를 시켰다.
루밀다는 낯을 가리는지 일라이뒤에 숨었고, 조세핀은 음란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우아하게 인사했다.
특히 바리언 영지는 엘브루트와 나름대로 교류한 적도 있기에 밀레라와는 아는 사이였다.
의외라는 듯 밀레라가 물었다.
"혹시 조카에게 도움을 받으신 겁니까?"
"호호, 그런 셈이죠. 지금은 충실한 육노예가 되었답니다. 우흐흣."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죠. 조카의 자지는 굉장하니까요."
"어머머, 그럼 설마? 우흣, 정말 음탕한 남자라니까요?"
두 여자가 음담패설을 하고 있자 일라이가 눈치를 줬다.
이 상황에서 그런 얘기를 하다니.
대체 어떻게 된 여자들인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아무튼대충 인사를 나누자 일라이는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전부카드로 돌려보냈다.
엘브루트의 세 여자를 둘러보며 일라이가말했다.
"여러분도 카드에 들어가서 쉬실 겁니다. 아무튼 거긴 여기보다 편할 테니 너무 불안해하지 마시길."
"고마워, 일라이."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밀레라가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지친 모습이지만, 그래도 눈에는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일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다지 대단한 일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마워하실 필요 없어요. 별 것 아니니까."
"우리를 구해줬어. 마치 구원자처럼……."
"구원자라……."
턱을 쓸던 일라이가 피식 웃었다.
그는 콧잔등을 긁적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야 저는 용사니까요. 아무쪼록 편히 쉬시길!"
엘브루트의 세 여자들까지 카드로돌려보내자 남은 인원이 얼마되지 않았다.
일라이와 계약을 맺지 않은 여자들과 체력을 비축한 레스레모나 뿐이었던 것이다.
걱정이 되는지라 유리엣에게 물었다.
"유리엣, 지치지 않아?"
"별로. 나보다 저 시녀가 걱정이지."
갑자기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가자리비카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하하, 왕자님! 저는 체력에 자신 있어요! 그러니 걱정마시길."
"아, 그래?"
이렇게 보니 계약하지 않은 여자들이 정말 한 손에 꼽았다.
굳이 강제할 생각은 없으므로 일라이는 그대로 세지에 올랐다.
레스레모나 역시 말에 오르며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 거지?"
"어디로 가든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구만. 그래서 불안하지만……행선지는 잡아뒀지.리비카!"
일라이의 외침에 리비카가 바로 옆으로 왔다.
그리고 지도를 꺼내며 말했다.
"이곳을 지나 '되른 강'을 넘어서 '오소리 산맥'에 들어서면 산채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로가실까요?"
"그거 좋지. 이름이……'도프스'였나?"
"네, 맞아요! 산 위에 영지에 맞먹는 규모의 마을로 정평이 난 곳이죠."
"참 신기한 곳이지. 거긴 얼마나 안전할 지 모르겠네. 가보자!"
일라이 일행은 다시 길을 떠났다.
그 어떤 일이 있다 하더라도 바로 일어설 만큼 그들은 강인했다.
그러므로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느새 미미해진 안개를 뒤로 하고 그들은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음 시련과 성장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