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핏빛꽃이 물들 때
아침이 찾아오자 바로 짐을 싸는 일라이 일행.
다행히 시야가 확보될 만큼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멀리 있는 유계 마을이제대로 보이는 것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세지에 올라타며 일라이가 말했다.
"얼른 가자고. 침대가 그리우니까."
"전직 네이처 가드는 어디 갔어?"
자하가 물었다.
레스레모나의 피로를 덜어주기 위해 일라이가 카드에 보낸 걸 모른 것이다.
"돌려보냈어."
"흐에, 난 아직 쌩쌩한데!"
"불침번도 안 선 주제에……."
한숨을 쉬는 일라이.
자하는 피식 웃으며부지런히 걸었다.
그때 곁에 있던 리비카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어딘가 경직되어 있었다.
나름 친해지기도 했기에 자하가 물었다.
"음? 어이, 시녀.왜 그래?"
"아뇨, 그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녀는 보이지 않는 걸 보려는 사람처럼 두 눈을 가늘게 뜨기도 했다.
그러다가 말을 이었다.
"마을이 어딘가 음산해 보여서요."
"안개가 걷혔는데? 뭐, 평소에도 음산한 마을이긴 하잖아."
자하의 말에 리비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유계는 안개가 껴있지 않아도 음산해 보일 때가 많았다.
다만 이번 경우는 조금 달라 보였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데, 어딘가 이상해요."
"기분 탓이겠지."
일라이가 리비카의 어깨를 쓸어주며 안심시켰다.
이제야 다시 침대로 돌아갈 수 있다.
분명 던전 탐험과 야영으로 인해 지친 것이리라.
리비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리엣이 말없이 마을을 쳐다봤다.
그녀는 턱을 살짝 당기며 두 눈을 빛냈다.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내 기분 탓일까?'
과거에 비해 한없이 약해진 드래건, 유리엣.
그런 그녀이니 만큼 자신의 힘을 확신하지 못했다.
자신은 약해졌다.
하지만 이 직감은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다시 오니 반갑구만."
"그러게!"
일라이와 세지가 말했다.
마을에 도착하자 한숨 놓을 수 있었다.
피식 웃으며 세지에서 내린 일라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이거 뭔 냄새지?"
"냄새?"
별 일이라는 듯 세지가 물었다.
일라이는 계속해서 코로 킁킁대며 주변을 살폈다.
불쾌한 냄새가 사방에 퍼진 것처럼 다가온 것이다.
한참을 냄새 맡던 일라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뭔 냄새 안 나? 엄청 익숙한 건데. 좀 미묘하다."
"글쎄요, 무슨 냄새가 나긴 하는데."
"근처에 강이 있으니 비린내 같은 거 아니야?"
"피냄새."
그때 유리엣이 무표정한 얼굴로말했다.
일라이 일행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쏟아질 때.
마침내 이변이 발생했다.
즈으으으응- 푸화아아악- 쉬힛-!
갑자기 마을 전체에 피의 안개가 펼쳐진 것이다.
갑작스런 사태에 일라이 일행은 당황했다.
일라이 역시 당황하며 급히 그리메를 뽑아 들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일까?
또 꿈을 꾸는 걸까?
'꿈 따위가 아니야!'
이를 악무는 일라이.
사라진 줄 알았던 안개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마을 역시 온통 핏빛으로 물들며 음산함을 자아냈다.
재앙이 한 순간에 덮친 것 같았다.
"안개가 빨개!"
"미친…이게 뭐야?"
"도, 도망가야 하나?"
일행이 당황할 때 일라이가 급히 외쳤다.
"모두 우선 뛰어!"
일라이 일행은 급히 마을 밖으로 나가려 했다.
오자마자 나가야 한다는 건 정말 억울한 일이다.
그러나 목숨이 가장 귀했다.
리비카가 가장 먼저 달려가다가 뭔가에 부딪쳤다.
타타탓- 터엉-!
"꺄아악!"
"음? 으악!"
일라이와 세지 역시 달려가다가 뭔가에 부딪쳐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급히 멈춰선 유리엣이 정신을 집중했다.
"결계야."
"결계?"
책에서만 보던 걸 실제로 겪게 되니 일라이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유리엣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서서히 정면으로 가져가며 평평한 벽을 쓰다듬는 것처럼 손짓했다.
그러자 핏빛 안개 너머에 투명한 막이 보였다.
언제 생긴건지 몰라도, 이것 때문에 마을을 나가지못한 것이었다.
"크으, 마을 사람들은?"
결계를 주먹으로 치다가 포기한 자하가 고개를 돌렸다.
마을 사람 그 누구도 보일 기미가 없었다.
적어도 생존자라도 찾고 싶었지만 희망이 안 보였다.
그리고 하늘에 떠오른 붉은빛이 보였다.
"어서 오세요, 저만의 공간에."
허공에 떠오른 것은 바로 미스레아였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퇴폐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 사태의 주인공이 그녀인 것을 직감한 일라이가 소리쳤다.
"미친, 이거 다 네가 한 거냐?"
"네, 그렇습니다만?"
"미쳤어? 이게 뭔 개짓거리야!"
"호호호, 너무 흥분하지 마시길. 어차피 언젠가 죽을목숨, 제가 유용하게 거둔 것 뿐입니다."
말을 마치며 미스레아는 두 손을 허리 높이까지 들었다.
그러자 핏빛 안개 너머로 창백하게 굳어 있는 마을 사람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을사람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핏기가 없는 모습이었다.
주먹을 꼭 쥐며 자하가 따졌다.
"설마 다 죽인 건 아니겠지? 엉?"
"말했잖아요? 유용하게 거뒀다고."
"큭……!"
결국 미스레아는 마을사람들을 전부 죽인 것 같았다.
그녀는 우아하게 손짓을 했다.
부드럽게 허공을 쓰다듬던 손길에 마을사람들의 시체가 서서히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살이나 피부가 전부 찢어지며 조각나버리고 말았다.
남은 건 아직 남아 있는 장기와 뼈였다.
"걱정마세요, 여러분도 곧 이렇게 되실 겁니다."
"미스레아, 너 뭐냐? 평범한 도망귀족이 아닌 건 알았다만, 이게 뭔 씹짓거리냐고?"
일라이가 그리메로 겨누며 물었다.
배신감보다 황당함이 앞섰다.
이제 편히 쉬나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일라이의 질문에 미스레아는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저를 도망귀족이라 생각하시나요? 왕자라면서…정말 둔하고 멍청하네요."
"뭐?"
"저는 미스레아, 과거에 존재하던 '붉은 혈족'의 후손이며, 유계 마을의 위장귀족이기도 하죠."
"붉은 혈족? 미친……."
아무리 공부를 대충 하던 일라이라도 붉은 혈족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500년 전부터 존재하던 피를 다루는 일족, 붉은 혈족.
그들이 지닌 힘은 하나같이 위력적이었고, 생명체를 제물로 바치는 힘이라 경원시되었다.
성기사들의 노력과 여러 은둔고수들의 활약으로 붉은 혈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미스레아가 바로 그들의 후손이라는 것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놀라는 사람들의 표정을 음미하며 미스레아가 말했다.
"이렇게 여러분을 만나게 된 건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붉은 혈족이 부활할 가능성이기도 하겠죠."
"좆까고 있네. 부활? 개소리 집어쳐!"
일라이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투지가 담긴 눈으로 미스레아를 쏘아봤다.
"미안하지만 붉은 혈족이 되살아날 일은 없을 거다. 내가 반드시 막겠어!"
"왜 저희를 그렇게 증오하시는 거죠? 사람들은 특이해요. 왜 다름을 인정하지않는 건가요?"
"다름? 아니지. 다름이란 건 내게 없는 게 상대에게 있는 것이지.그런데 너흰 그걸 이용해서 부정하게 사용했어. 적어도, 적어도 너희가 능력을사용할 때 동물들을 사용했어도 이렇게 배척받지는 않았을 걸?"
"후후, 그건 안 된다구요. 동물보다 사람의 피가 더 효과적이니까."
얼굴에 광기를 드러내는 미스레아.
그녀의 우아하면서도 퇴폐적인 매력이 한껏 발산되고 있었다.
그때 일라이의 뒤에서 유리엣이 빠르게 마법을 사용했다.
"이 이상 안개가 퍼져나가서는 안 돼."
[마력 결계 - 억제]
방대한 양의 마나를 넓게 퍼트려 결계로 이룬 유리엣.
그녀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미스레아가 비웃었다.
"그걸로는 부족할 텐데요?"
"글쎄, 꼭 그렇지도 않네."
유리엣의 말에미스레아는 주변을 둘러봤다.
핏빛 안개가 더는 주변으로 퍼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결계에서 또 다른 결계가 펼쳐져 막힌 경우였다.
혀를 차며 미스레아는 핏빛 안개를 모두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후후후, 상관 없습니다. 여기서 당신들 모두를 죽이도록 하죠. 그럼 저는 더 강해질 겁니다. 더, 더, 더……!"
두 눈을 크게 뜨며 광기에 젖은 미소를 보이는 미스레아.
일라이가 굳은얼굴로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미스레아, 후회 안하냐?"
"후회?"
"잘만 하면 그 힘을 이롭게 사용할 수 있어. 내 여자가 될 영광 역시 주지. 어때?"
일라이로서는 백보 양보해서 내미는 제안이었다.
마을 사람들을 죽인 건 괘씸하지만,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흔한 일이다.
오히려 미스레아 정도의 능력자를 같은 편으로 포섭하는 게 이득이었다.
하지만 미스레아는 손을 내저었다.
"능욕은 그쯤 해두시죠? 제가 왜 원수같은 자들과 한 패가 되어야 합니까?"
"후회 안 하는 거지?"
"할 이유가 없죠. 필요하다면 당신의 여자들 전부 찢어 죽일 자신 있습니다! 그리고 고작 인간들 몇이 모여 있다고…저를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나요?"
"인간들 몇이 아니라고. 지금 내게는……."
일라이가 말을 끊었다.
그는 카드를 만지작대며 흐뭇하게 웃었다.
지쳐 있을 레스레모나를 제외하고, 싸움에 도움이 안 되는 이들 역시 제외하고, 모든 여자들을 소환했다.
여자들이 한 순간에 나타나자 미스레아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으으, 뭐야?"
"쩝, 자려고 했는데."
"마법소녀, 우린 등장!"
여자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미스레아를 올려다봤다.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간다는 생각에 미스레아는 숨 죽여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혀를 내밀어 음란하게 입술을 핥았따.
그리고 촉촉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요…항상 그랬죠. 당신네 인간들은 우리 혈족을 이렇게밖에 대하지 않았어요."
"자업자득이야, 미스레아."
"닥쳐요! 여기서 보여드리죠. 우리 혈족의 분노, 원한, 그리고 슬픔을!"
펼치고 있던 두 손을 천천히 주먹쥐는 미스레아.
그와 동시에 유계 마을 전체가 떨리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면서 분명 힘을 모았을 것이다.
아마의문의 살인사건 역시 그녀가 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못해도 엄청난 양의 힘을 축적했을 것이다.
"먼저…어중이떠중이들은 좀 쓰러져 주시죠!"
분노에 서린 일갈과 함께 미스레아가 힘을 개방했다.
[Blood circle - Mind blast]
슈후우우웅- 파아앙-!
"꺄아아악!"
"아악!"
"꺽!"
피의 안개가 다시 몰려드나 싶더니 강렬한 파장을 보이며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여파에 말려든 여자들이 전부 쓰러졌다.
일라이는 면역의 사슬로 인해 그나마 버틸 수 있었지만, 몇몇 여자들은 그대로 뻗어버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미스레아가 음산하게 소리까지 내며 웃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에서 핏빛 날개가 한쌍 펼쳐졌다.
그리고 핏빛 안개가 위로 올라가며 그녀를 감싸는 모습이 보였다.
"미스레아……."
"말했죠? 이곳은 나만의공간이라고. 이제 죽으세요."
머리를 휘날리듯 손을 가볍게 휘젓는 미스레아.
일라이의 눈앞에서 핏빛 안개가 일렁이더니 순식간에 쇄도했다.
[Blood circle - Shockwave]
프슈웃- 콰앙-!
"컥……!"
순식간에 한 방 먹으며 뒤로 나가 떨어지는 일라이.
불에 타는 것처럼 전신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만의 능력일까?
아니면 기분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