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의외로 느긋한 야영
안개가 조금씩 걷히자 지하도에서 나온 일라이 일행.
그러나 마을까지 갈 수는 없었다.
여전히 마을 근처는 안개가 자욱했다.
또한 주변에 사는 늑대나 몬스터들 소리까지 들렸기에 함부로 다가설 수 없었다.
"아넬, 하늘 위에서는 어때?"
"으, 안 보여. 안개가 구름처럼 끼어 있어."
"진짜 미친 동네구만."
결국 남은 건 야영이었다.
우선 일라이 일행은 마을과는 반대편 길로 향했다.
근처를 지나는 강가에서 야영을 하려는 것이었다.
산맥을 끼고있는 이곳이면 안전하리라.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랜턴이랑 장작은 좀 거리를 둬."
"네, 왕자님!"
리비카는 알뜰하게 자리를 만들며 랜턴들을 켜두고 있었다.
슬슬 기름이 떨어져 갔다.
기름이야 마을로 가서 채우면 그만이지만, 과연 저 안개가 언제 걷힐지가 걱정이었다.
"참 신기하네. 언제는 걷히다가, 언제는 존나게 끼고."
안개를 바라보며 일라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미 밤이 찾아온 지 좀 되었다.
날씨조차 구분하기 어려웠다.
안개가 비단 지상뿐만 아니라, 하늘에도 낀 것 같았다.
"구름과 연계라도 하는 것 같군."
가만히 지켜보던 레스레모나가 말했다.
그때 일라이가 여자들을 불러모았다.
카드에 들어갈 수 있는 여자들은 최대한 들어가게 했다.
던전을 탐험하느라 힘들기도 하고, 다음을 위해 기력을 보충해야 했다.
결국 남은 여자들은 유리엣과 리비카, 세지, 그리고 굳이 남기를 청한 자하와 레스레모나였다.
담요를 펴고 앉은 레스레모나는 부츠를 벗었다.
그녀의 어두운 구릿빛 하체가 여실히 드러났다.
"지금쯤 마을 괜찮겠지?"
자하가 어디서 잡아왔는지 도마뱀 하나를 모닥불에서 구우며 물었다.
굳이 파충류를 먹고 싶지는 않기에 사람들은 고개만 끄덕였다.
리비카가 휴대용석궁을손질하며 의견을 냈다.
"오늘은 야영, 그리고 내일 추이를 보다가 가는 건 어떨까요? 안개가 언제걷힐지는 몰라도, 가끔은 완전히 걷힌적도 있으니까요."
"그게 좋겠어. 그나저나 마을을 눈앞에 두고 야영이라니. 더럽게 억울하네."
"푸흣."
일라이의 말에 리비카가 웃어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웃었다는 사실을 감추려 했지만 일라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랜만에 야영을 하는 터라 몬스터라도 튀어나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의외로 주변은 안전했다.
우선 모닥불과 랜턴으로 불을 밝히고 있어서 야생동물이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거기에 더해 이상하리만치 몬스터들이 보이지 않았다.
"레스, 마을 근처에서몬스터 소리가 들렸지?"
"그래, 일라이. 근데 여긴아무 소리도 없군."
"여기가 마을에서 얼마나 떨어진 곳일까?"
"넉넉하게 잡아도 5km도 안 될 거야."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멀군."
"이러면 몬스터가 없을 만도 하지만, 마을 근처에 몬스터들이 있다는 건 좋지 않은 소식이다."
레스레모나의 말에 일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이 어떻게 될 지 걱정되었다.
하필 근처에서 몬스터들이 얼쩡거렸다.
그렇다고 침략을 당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마을에서 불길이 치솟거나, 몬스터들의 소리가 들리면 사람의 비명도 들려야 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없었다.
"괜찮을 거예요. 내일 가보면 알겠죠!"
격려하듯 말하는 리비카.
자하는 막 도마뱀 꼬치구이를 하나 끝장내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래, 그래. 벌써부터 걱정할 건 없다고."
그때 추가로 장작을 구해온 세지가 나타나며 일라이 근처에 앉았다.
주변에 장작이 많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숨 돌리며 세지가 말했다.
"주변이 진짜 음산하던데?"
"언데드 몬스터라도 본 거야?"
일라이가 바로 물었다.
만약 몬스터가 있다면 가만히 놔둘 이유가 없다.
게다가 던전에 갔다 온 뒤라 시간개념을 잡기도 힘들었다.
던전에 들어가서 꼬박 며칠이 흘렀지만, 현실에서는 그보다 시간이 더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건 아니고. 안개가 희미하게나마 다가오고 있어서 말이지. 지하도시는 그런 일이 없었거든."
"낯설기는 하겠다. 나는 안개가 좀 익숙해. 여전히 적응 안 되기는 하지만."
"호오, 전직 왕자님께서?"
흥미를 보이며 세지가 물었다.
회상하는 얼굴로 일라이가 입을 열었다.
"3년 전이었나? '덴투스'라는 곳에서 몬스터들과 공방전을 치른 적이 있었어. 도시가 위협당하고 있었는데, 놈들의 뒤를 치고 진형을무너트렸지."
"호오, 과연!"
"문제는 그 다음이었어. 패주하던 놈들을 뒤쫓는데, 본거지인 산으로 들어가버린 거야. 그 산은 안개가 자주 끼기로 유명했지."
"그래서 어떻게 했어?"
팔짱을 끼다가 세지는 좀 더 편한 자세로 바꿨다.
하체가 말인지라불편하지 않을까 싶지만, 태생이 켄타우르스인 그녀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짧게 하품을 하며 일라이가 대답했다.
"처음에는 병력을 어느정도 보냈거든? 그런데 안개 때문에 제대로 못 싸우고 자꾸만 피해를 입는 거야. 그래서 한 가지 방법을 고안했지."
"아, 그 얘기들은 적이 있어요!"
리비카가 아는 척을 했다.
일라이는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레스레모나는 조용히 경청하고 있었다.
"바로 그 산을 불태웠어."
"헉, 산 전체를……?"
놀란 표정으로묻는 자하.
아무리 그래도 산 하나를 불태우는 건 정말 엄청난 짓이었다.
아예 사람으로서 재앙을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일라이는 태연하게 해낸 것이다.
"응. 산 하나를 잃는 건 무척 아쉽지만,그건 다시 재개발하면 그만이야. 하지만 놈들을 그때 해치우지 못했다면 내내 걸림돌이 됐겠지."
"지상도 치열하긴 마찬가지구나. 햐아……."
세지가 혀를 내둘렀다.
모닥불 근처에 앉아 있던 자하가 도마뱀하나를 더 꺼내며 가랑이를 벌렸다.
속옷조차 입지 않은 하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는 도마뱀을 꼬치에 꽂아 구우며 물었다.
"그런데 그 몬스터들 다 뭐였어?"
"음, 놀이나 브리첼, '볼런' 같은 유사인종들이었지."
"하긴, 그런 녀석들이니 전략적으로 싸울 수 있을 테니까."
"귀찮은 놈들이라니까. 번식력도 엄청나서 한 번 조지면 반년 뒤에 다시 번성하고 있고."
머리 아프다는 표정과 함께 일라이는 뺨을 긁었다.
일라이 일행은 서로 여러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어차피 불침번을 서도 이 인원 그대로일 것이다.
오늘 하루만 상황을 보는 것이니 가볍게 임했다.
생각보다 몬스터들의 위협도 없어서 좋았다.
"가끔은 사람처럼 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 얘기가 오갔다.
그 중에서 세지가 일라이에게 말했다.
목 운동을 하고 있던 일라이가 물었다.
"켄타우르스도 그런 생각을 하네?"
"다 그렇지. 인간이 되면 어떤 모습일까 자주 상상해. 지금 내 모습에 자긍심을 느끼지만."
"흠……."
새삼 일라이는 세지를 다시 살펴봤다.
그녀는 출중한 혀놀림과 쿠션 같은 가슴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여자가 된다면 지금과는 많이 바뀌는 하체에 관심이 쏠릴 것이다.
켄타우르스인 그녀는 하체가 말인지라 상당히 튼튼해 보였다.
"하체미녀가 될지도 모르지."
"하핫, 내가?"
별 일이라는 듯 웃는 세지.
일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다고 하체만 미녀는 아니니 걱정말고. 너 정도면 운동한 여자들처럼 꽉 조여줄 것 같은데?"
"이런, 말 하나하나에 음란함이 묻어 있잖아? 하지만 듣기는 좋네. 하체미녀라…후후후."
"만약 네가 인간이 되면 밤새도록 따먹을 거야."
"그게쉬울까? 뭐, 그런 일은 없겠지만."
장난스럽게 얘기를 나누는 둘.
그때 자하가 입가에 꼬치 소스가 묻은 채로 외쳤다.
"마을에 거대한 도마뱀이 나타나더라? 그래서 당장 달려가서 패줬지. 육질이 질겨지도록 패고, 패고, 또 팼어!"
"훗, 대단하군."
있는그대로 칭찬하는 레스레모나.
리비카 역시 두 손을 맞잡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주도적으로 하는 강한 여성, 자하.
그녀는 한때 시녀였던 리비카에게 좋은 귀감이었다.
"도마뱀 따위 내 상대가 아니라고. 그 뒤부터 도마뱀 고기에 빠졌지."
"대단하시군요. 그런데 도마뱀은 크기 대비 육질이 별로 없지 않나요?"
"그건 그래, 쩝쩝."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도마뱀 꼬치는 잘만 먹는 자하.
일라이는피식 웃더니 자리에 누웠다.
지상은 몰라도 하늘의 안개는 서서히 걷혀가고 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새까만 바탕에 형형색색의 별들이 보였다.
세상은 멸망의 끝으로 가고 있는데, 하늘은 이상하게 평화로워 보였다.
'멸망이 진짜 창조의 다른 말일까?'
또 다른 자신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믿을 수 없었다.
그 말의 의미는 결국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게 지워져야 한다는 의미였다.
정말 그런 게 창조라고 불릴 수 있을까?
"음?"
그때 시야에 불쑥 유리엣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일라이를 내려다보더니 포근하게 웃었다.
표정의 변화가 자연스러우면서도 우아했다.
"고민 있지?"
"유리엣, 드래건의 관점에서 볼 때……."
"응?"
"파괴는 창조의 다른 말이야?"
조금은 의미심장한 질문.
유리엣은 고민해볼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꼭 그렇지는 않아."
"꼭?"
"대개 그런 경우가 있어. 너희 인간의 역사를 봐도, 거대한 국가가 무너지면 새롭게 움트는 국가들이 생겨나잖아? 그중에서 결국 세상을 지배하는 국가가나오고."
"그렇지."
"그것과 비슷한 개념이야. 하지만 확실한 건, 파괴는 창조의 다른 말이라고 볼 수는 없어."
단호하게 선을 긋는 유리엣.
파괴가 창조의 다른 말일 리가 없다.
인간의 역사로 인해 수없이 반복됐지만, 잘못된 것을 올바르다고할 수는 없으리라.
그래서 일라이는 안심했다.
"그럼 다행이네."
"이 세계에 찾아온 멸망이 신경 쓰여?"
"조금은."
"신경 쓰지마. 좋을 게 없어."
"하지만 우린 그 중심에 있어. 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 아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야."
여자들이 단란하게 떠드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눈을 깜박이며 일라이를 내려다보는 유리엣.
그녀는 흐뭇하게 웃더니 일라이 곁에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은은한 향과 함께 묘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고뇌하는 왕자, 나쁘지 않네."
"컨셉으로는 좋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는 더할 나위 없고."
"후후후, 너는 주인공이야. 분명 네 인생에서는."
"그건 당연한 거고."
"어쩌면 이 세계의 새역사에서도."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유리엣은 눈을 감았다.
일라이는 말없이 그녀를 지켜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잠을 청하려는 듯 유리엣은 움직이지 않았다.
드래건도 잠시나마 잠을 자기는 하는구나.
일라이의 머릿속에서 드래건은 강대하면서도 겨울잠을 자는 동물로 그려졌다.
당연한 소리다.
긴 잠을 자다가 깨어난 드래건이 바로 곁에 있으니까.
"걱정은 해도, 모두를 지킬 거야. 지겹도록 죽는 한이 있어도."
그녀가 듣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일라이가 말했다.
이토록 훈훈했던 날이 있을까?
던전에서 얻은 보물을 둘러보며 재잘대는 여자들이 보였다.
세지 역시 자하가 어깨동무를 하며 보물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리비카와 레스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지켜보며 혹여 사고라도 치지 않나 경계했다.
다들 자신의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 지켜보라고, 또 다른 나."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남자를 향해 일라이가 말했다.
그는 무릎을 살짝 올려 팔을 걸쳤다.
아무래도 오늘은 선잠을 자야 할 것 같았다.
불침번은 자신의 몫이여야 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