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0화 〉다시 눈을 뜨려면 (70/100)



〈 70화 〉다시 눈을 뜨려면

어느 맑은 날의 오후.
검술 아카데미의 완전이수를 의미하는 학사모를 쓴 일라이.
그는 천천히 검술 아카데미를 돌아다니며 한숨을 쉬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배움을 얻은 곳이다.
이제 이곳과 이별이라는 사실이 와닿지 않았다.

"일라이, 해냈구나."


학사모를  또 다른 인물, '고리스'가 말을 걸었다.
검술 아카데미에서 가장 재능이 있는 인물이 일라이라면, 고리스는 특별한 재능을 지닌 남자였다.
다만 본인은 자신의 재능을 재능이라 인정하지 않았을 뿐.

"해내기는…당연한 거지."
"하하, 나는 여기 10년이나 있었는데 드디어 졸업했어."
"네 재능 정도면 1년 안에 졸업했겠지. 실증주의라는  언뜻 공평해 보이지만, 어딘가 어긋난 룰인 건 맞아."
"무슨…그냥 내가 못한 거야."
"그래서 이제 뭐할 거냐?"


고리스는 평민이다.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기에, 원한다면 왕성이나 변방의 검술 교사가 될 수는 있었다.
기사 역시 될 수는 있었지만, 이미 파벌 싸움이 한창인 기사단으로 가는  그다지 추천할 바가 못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리스는 낙천적으로 웃었다.

"와하하, 글쎄? 우선 좀 쉴까 하는데."
"그것 참 맥 빠지네. 한창 날려야 할 때 쉰다고?"
"뭐, 은둔고수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세상이 나를 부르면 다시 등장하는!"
"지랄을 해요."

고개를 저으며 벤치에 앉는 일라이.
고리스 역시 곁에 앉았다.
둘은 검술 아카데미를 떠나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일라이처럼 단기간에 이수한  아니었다.
누군가는 5년, 누군가는 10년, 어쩌면  이상의 시간을 투자한 것이다.
그런 고난 끝에 얻은결과란 얼마나 값질까?


"이번 기수 중에서 완전이수한 애들이 몇이지?"
"나랑 너 포함 11명인가?"
"윽, 생각보다 적잖아?"
"뭔 소리야? 역대 최고로 수가 많다는데. 그만큼 우리 세대가 대단한 거지."
"네가 대단한 게 아니고?"
"특별한 재능러께서 나한테 그러면 곤란하지."


친근하게 고리스의 어깨에 팔을 두르는 일라이.
언뜻 보면 여자로 보일 만큼고리스는 중성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여장도 많이 당하고, 일라이와 함께 있으면 '훈훈커플 투샷'이라 불리기도 했다.
일라이가 매우 싫어하던 별명이었다.

"나중에 다시 만날 수는 없겠지?"

주저하며 묻는 고리스.
일라이는 고리스를 쳐다봤다.
떠올려 보면 그는 이상한 점이 참 많았다.
학생 문서에서도 그의 본명은 그냥 고리스라고만 적혀 있었다.
평민에게 성이 할당된지도 어언 100년.
무엇보다 고리스는 동방계인물도 아니었기에 평민이라도 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이 보이지 않았다.

'대개 성이 나오지 않는  가명이라는 얘기인데.'

하지만 잡념을 지웠다.
일라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다. 내가 좀 바빠서."
"그렇지, 비싼 남자지."
"비싸기는…동창회도 하고 그러던데. 우리 기수도 그러지 않으려나?"
"그러기에는 다들 잘난 녀석들이잖아? 음, 나는 일라이만 만나면 될 것 같은데."
"닭살 돋는 소리하지 마. 네가 그러니까 여자애들이 자꾸 투샷 투샷 거리잖아."
"와하하, 미안."


오버해서 웃는 고리스.
크게 한숨을 쉬며 일라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젠가 그의 검격을 다시  수 있으리라는 확신과 함께.
학사모를 고쳐 쓰며일라이가 작별을 알렸다.


"그럼 각자 잘 살자고."
"응……부디  지내. 아프지 말고."
"너도, 인마."

가볍게 손을 흔들며 검술 아카데미를 빠져나가는 일라이.
그의 완전이수 기일에 맞춰 왕성에서 마차가 한 대 보내졌다.
물론 그 주변에는 수십 기의 기병들이 호위를 하고 있었다.
검술 아카데미를 지나는 사람들의 눈이 모두 여기로 모였다.
더 시선을 모을 이유는 없기에 일라이가 마차에 올랐다.


"출발."
"네, 알겠습니다! 마차, 출발!"

호위대장의 외침과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올 때처럼 쿨하게 떠나는 일라이.
검술 아카데미에서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프후우……."

문득정신을 차린 일라이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오랜만에 그리운 꿈을 꾼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아련한 기분은 무엇일까?


'나 산 거야? 아니면 죽었다가 깨어난 거야?'

확실한  죽을 때마다 보이던 문구를 본 기억이 없다는 것.
그럼 적어도 죽지는 않은 것이다.
역경을 만나며 강해진다는 확신이 있기에, 일라이는 자신이  강해졌으리라 믿었다.
왜냐하면 그래야 하니까.


"으으……."


주변을 둘러 보니 유계에 있는 숙소였다.
방에 혼자 남아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언제나 그렇듯 여자들이 둘러싸고 있을 줄 알았는데.
다들 식사를 하거나 쉴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일라이는 크게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좀 씻을까?"


몸이 뻐근했지만 겨우 움직였다.
힘들수록 더 움직여서 몸이 역경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발전이란 없다.
무난하게 샤워를 하고 나서 일라이는 새옷을 입었다.

"그나저나 세계의 힘이라니…그런 무식한 힘이랑  싸우고 싶어지는데?"

이번에는 압도적으로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근거는 없어도 자신감만큼은 넘쳤다.
오늘 죽을 뻔했던 일은 사실상 굴욕이나 마찬가지니까.

"흐으아암, 더 잘까?"

침대를 내려다보던 일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더 자서 좋을 건 없다.
바깥을 보니 여전히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다.
밤인지 낮인지 알기가 힘들었다.
안개가 뿌연 것을 봐서 해가 아직 떠있는  같았다.

"음? 다들 뭐 해?"


아래로 내려오니 1층에 여자들이 전부 서 있었다.
문제는 대문을바라본 채로 서있었다.
마치 인형들처럼 아무 미동도 없는 모습.
이상하게 여기며 일라이가 다가갔다.

"장난치는 거야? 이거 우린이 시킨거지? 아니면 아넬이냐?"


혀를 차며 일라이가 레피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감촉이 손을 자극했다.


"윽, 씨발!"

급히 뒤로 물러나며 손을 감싸는 일라이.
비명까지 질렀지만 여자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바깥에서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흡사 바다에 있는 것처럼 파도 소리가 들린 것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다들 뭐하는데? 무슨 일이냐고!"

짜증이 나서 외치는 일라이.
물론 대답은 없었다.
파도 소리가 갈수록 거칠어질 때, 여자들이 서서히 뒤를 돌아봤다.
평소에 당황하지 않는 일라이조차 경악해마지 않았다.
여자들 모두 두 눈이 적출된 채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늘백작을 따르는 언데드 몬스터들보다 더 공포스럽고 절망적인 모습이었다.

"뭐야? 왜, 왜 다들…이봐, 장난하지 마!"

그리고 여자들이 서서히 다가왔다.
일라이는 미처 피할 생각조차 못하고 여자들에게 덮쳐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인 걸까?

***


"흐흐읍…끄어어!"
"어멋, 깜짝이야!"

일라이가 발악을 하며 일어났다.
곁에서 지키고 있던 테아가 화들짝 놀라더니 일라이의 뺨을 검지로 찌르며 물었다.

"괜찮아? 혹시 미쳐버린 건?"
"…후우, 후우. 아니거든."
"후후, 다행이다.어디 아프진 않지?"
"너는 어때? 눈은 멀쩡하네."
"눈? 눈이 왜?"

고개를 갸웃거리는 테아.
일라이는 우선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은 던전의 입구를 앞둔 지하도였다.
던전에서 빠져나온 것 같았다.
곧 지하도의 입구에서 여자들이 나타났다.


"으아아, 망할! 안개가 너무 짙잖아!"
"시각은 물론이고 후각과 청각마저 마비시키는 안개라니. 신기하군."


자하와 레스레모나가 동시에 말을 내뱉었다.
그러다가 일라이가 깨어난 것을 보고 급히 달려왔다.
마른 침을 삼키며 일어선 일라이가 물었다.

"다들 무사해? 눈은?"
"음? 그건 무슨 소리야?"


우린이 팔짱을  채로 물었다.
아무래도 꿈인 것 같았다.
여자들은 모두 무사했다.
아넬은 날아오다가 태연하게 일라이의 어깨에 앉았다.
슬슬 무게감이 느껴졌다.

"일라이, 죽은  알았잖아. 완전 피투성이였어!"
"그렇겠지.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야."
"네가 더 다행이지. 또 죽으면 어쩌나 싶었어."

유리엣이 말을 받았다.
그때 일라이는 뒤를 돌아봤다.
몇 발자국만 가면 던전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나와 있다.

"던전은?"
"……무너졌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세지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결코 웃을 일이 아니었다.
장차 전초기지가 될  모를 곳이 무너진 것이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싸움으로 무너진 셈이니 더더욱 놀라웠다.
일라이는 그늘백작과 싸운 얘기를 해주며 고개를 저었다.


"힘의 크기만큼은 놀라운 새끼였어."
"세계급 힘이라……확실히  정도면 인간을 넘어섰겠네. 나머지가 받쳐주지 않아서 죽은 거지."

턱을 괴며 유리엣이 말했다.
테아 역시 거들었다.


"그런 힘은 따로 주인이 있어. 어울리는 사람이 갖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
"맞는 말이야.바깥에 안개 심해?"


일라이의 질문에 여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던전 입구로 들어갈 수도 없다.
한창 붕괴하고 있는지라 들어갔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다.
심지어 진짜 던전이 이 모양이 되니, 허수 던전들도 무너지고 있던 것이다.

"그럼 이 지하도에 꼼짝 없이 갇힌 셈이군."
"식량은 어느 정도 있어서 다행이야."

세지가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짐을 가리켰다.
그나마 상당량의 식량을 얻어서 다행이었다.
또 보물까지 더하면상당한 이득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가치가 있었다.
일라이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아무튼 모두 수고했어. 하아, 목욕이나 깔쌈하게 하고 싶네."
"나도!"
"나도."
"일라이, 후훗. 욕심이 너무 많은데?"


음란하게 웃는 아넬.
일라이가 묻는 표정을 짓자 아넬이 혀를 낼름거리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한테 둘러싸여서 목욕을 하고 싶다니. 완전 갱뱅이잖아."
"미친년……하지만 그런식으로 즐기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흥, 먼저 여길 나갈 때의 일이겠지만."


레피나가 어림도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안개가 더욱 자욱해져 갔다.
그에 따라 분위기도 음산하게 변했다.
아까 꾸던 꿈의 내용이 슬며시 떠올랐지만 일라이는 내색않고 억눌렀다.
그런 악몽은 떠올리는 것조차 싫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