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정체불명의 남자
"에이, 제기랄. 숲이 아니라 늪지잖아! 나무까지 있어서 존나 귀찮네."
한때 숲이었던 곳을 혼자서 걷고 있는 일라이.
그는 거슬리는 것들은 그리메로 치며 없애고 있었다.
괜히 이곳에 왔나 싶지만, 사실 함정이 있다면 숲이 가장 치명적일 것이다.
다른 루트에서 오는 여자들이 알아서 저택으로 찾아가길 바라며 일라이는 앞으로 나아갔다.
정신없이 수풀을 헤치며 앞으로 걷고 있자 인기척이 들렸다.
"음? 거기 혹……."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려 할 때였다.
짙은 녹색의 독이 발린 화살이 정면에서 날아왔다.
일라이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뒤로 물러나며 피했다.
후욱- 퓻-!
화살을 피하자 땅바닥이 갈라지더니 사방에서 화살촉들이 날아왔다.
복합적인 구조를 지닌 함정 같았다.
찰나에 가까운 시간동안 함정 여럿이 발동됐다.
하지만 일라이는 군더더기 없이 전부 피해냈다.
지난 밤 그늘백작과의 싸움에 의해서 감각이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졌기 때문이다.
"후우…겨우 이 정도야?"
자신조차 놀랄 만큼 예민해진 감각에 일라이는 웃어버렸다.
전력으로 싸우면 이기지 못할 것도없는 그늘백작.
그런 그라 할지라도 지닌 실력은 의외였다.
자기 치장에 바쁜 이름뿐인 귀족들과는 다르게, 그는 말 그대로 진짜였던 것이다.
"이러다가 누구 나타나면 죽여버릴 것 같은데. 푸흐흐."
그리메를 쥔 손이 떨려왔다.
다시 한 번 그때의 아슬아슬함을 느끼고 싶었다.
언제 다시 그늘백작과 만날 수 있을까?
다시 만난다면 그때.
제대로 결판을 낼 거라 다짐했다.
좀 더 앞으로 나아가니 개활지가 나왔다.
개활지라고 해도 결국 늪지대라서 습하기 그지없었다.
"제길, 여기도 없나?"
머리를 긁적이며 일라이는 방향을 바꾸려 했다.
슈후웃- 콰앙-!
그때 근처에서 거대한 폭발이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새까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숨을 고르며 일라이는 그곳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달려가면서도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타타타타타탓-!
순식간에 폭발이 일어난 장소에 도착했다.
연기가 걷히자 자하와 우린이 보였다.
두 여자는 거대한형체와 맞서고 있었다.
"자하, 측면을!"
"좋아, 우린. 그럼 놈의 머리를 노려 줘!"
둘은 상당한 연계를 보이며 싸우고 있었다.
거대한 형체가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생긴 건 사자의 머리를 지닌 곰 같은 거대 몬스터였다.
크기는 무려 5m 에 달했으며, 거대한 앞발과 뒷발이 위협적인 무기였다.
"'도플리오'……!"
몬스터의 이름을 외치며 일라이도 합류하려 했다.
그러나 괜한 걱정이었다.
도플리오가 전력으로 앞발을 내리꽂았다.
콰아앙-!
대포라도 터진 것처럼 폭음이 들렸다.
근처에 있던 자하가 옆으로 날아가다가 한 바퀴 돌며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빠르게 도플리오의 앞발을 구름발 삼아 위로 떠올랐다.
도플리오의 팔을 타며 위로 올라가던 자하가 순식간에 도약했다.
"흐야하아아앗!"
그리고 도플리오의 코를 전력으로 후려 갈겼다.
그와 동시에 우린이 다시 한 번 마법을 시전했다.
"사랑과 자비의 이름으로, 하트 펌핑 어택!"
뾰로롱- 뾰로롱-!
유치한 연출과는 다르게 위력적인 마법이 도플리오의 가슴에 직격했다.
자하의 공격에 이어 마법까지 맞자 도플리오는 숨을 헐떡이며 쓰러졌다.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던 도플리오가 피를 홍수만큼 토해내며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상대방의 심장에 무리를 주는 마법이었던 것이다.
이기고 나서두 여자는 서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예에, 좋아!"
"호우웃!"
두 여자의 훌륭한 연계에 일라이는 놀라고 말았다.
과연 저 여자들을 기사단에 넣은 건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던 것이다.
천천히 여자들에게 다가가며 일라이가 박수를 쳤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엇, 일라이!"
"왕자님, 살아 있었네?"
자하와 우린이 해맑게 웃으며 다가왔다.
가까이에서 보니 두 사람의 모습은 지쳐 보였다.
심지어 땀냄새까지 났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미녀들의 땀냄새가 불쾌할 리가 없으니까.
"여기서 만나서 다행이다. 다른 여자들은?"
"아오, 이상해. 분명 여기 같이 들어왔거든? 근데 정신 차려보니 우리 둘뿐이었어."
우린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일라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제법 지났어. 똑똑한 여자들이니까 내 흔적을 어떻게든 찾을 거야."
"잠깐, 그게 쉬워?"
걱정되는지 자하가 물었다.
그러나 일라이는 걱정하지 않았다.
무려 유리엣과 테아가 나머지 여자들을 맡고 있었다.
그럼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그 여자들이라면 해낼 거야. 저택으로 가자. 거기를 전초기지로 쓰고 있어."
"오오, 저택, 오오!"
"따뜻한 물은 나오겠지? 밥도?"
우린이 급히 물었다.
일라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여자들과 함께 저택에 도착하니 시끌거렸다.
이미 여자들이 전부 와있던 것이었다.
식량을 나눠주느라 세지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다들 있었구나!"
"밥이다, 밥!"
자하와 우린이 달려나가자 일라이는 한 숨 돌렸다.
그가 다가오자 유리엣이 흐뭇하게 웃었다.
"다시 봐서 반가워."
"나도 그래."
"이, 일라이…반갑다."
레스레모나가 어설프게나마 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감정을 드러내기 어려워 하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조차 사랑스러워 보였다.
"응, 반가워. 레스!"
여자들에게 방을 배정해주며 일라이는 밖으로 나갔다.
식사하느라, 그리고 방을 보러 가느라 여자들은 일라이에게 신경 쓰지 못했다.
저택을 나서며 문을 닫는 일라이.
그는 정면을 노려봤다.
지잉- 지이잉-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흐릿한 게 보였다.
그것이 점차 형태를 갖춰 나가며 순식간에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 사람의 모습은 소름끼칠 정도로일라이와 닮아 있었다.
"엇……?"
"제법인데? 적어도 이 세계의 너는 이름만 왕자는 아닌가 보군."
자신과 같은 사람을 보며 경악하는 일라이.
물론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일라이가 바라보는 사람은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었다.
반대쪽 뺨에는 크게 칼자국이 나 있었다.
입고 있는 옷 역시 넝마에 가까운 로브였다.
하지만 적어도 본래 가지고 태어났을기품은 사라지지 않았다.
"너…뭐하는 새끼냐? 도플갱어냐?"
"후후, 직관력은 조금 떨어지나? 나는 꼭두각시 따위가 아니야. 온전히 너다. 아니, 네가 나인가?"
"말장난 하지 마."
차갑게 말을 내뱉으며 그리메를 빼드는 일라이.
다른 어느 때보다 위기상황이었다.
만약 자신과 똑같은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그 어떤 냉철한 사람이라도 심리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다.
"말장난이 아니야. 던전의 존재를 알면 잘 알텐데? 우리는 우리 세계에 남을 수 있지만, 동시에 다른 세계로 통할 수 있지."
"그건 제한적이야."
"여긴 아직 기술의 발전이 이 정도인가 보군. 하지만 곧 놀라게 될 거야. 분명 네 세계는 파멸을 맞이했지?"
예리한 질문에 일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른 침을 삼키자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파멸이 아니야. 파괴는 창조의 다른 이름이지. 그렇게 파멸하며 새로운 세계로 거듭나는 거라고."
"갑자기 나타나서 개좆같은 소리하지 마! 너…분명 아까부터 나를 쫓고 있었어. 처음에는 그 기색 자체를 의심했지."
"호오, 감은 좋아."
"내 앞에 나타난이유가 뭐냐? 네 정체성은 뭐지?"
"이렇게만 대답해주지."
남자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등을 돌렸다.
무모한 행동이었다.
당장 칼을 꽂아버린다 해도 어찌하지 못할 만큼 무방비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에 합당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마치 거울을 보듯, 나는 또 다른 너다. 네 세계의 너는 누구지? 왕자인가? 기술자인가? 헌터? 아니면 고대방식의 용사? 뭐든 상관없어."
"이 새끼……."
"단지 너와 내가 만났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래, 174번의 리프 끝에 간신히 만난 거야."
"너 뭐냐니까!"
"앞으로 지켜보겠어. 지켜보고 나서, 내가 너한테 협력할지, 네 적이 될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될지 결정하겠다. 무운을 빈다고."
핑거 스냅을 하며 순식간에 사라지는 남자.
일라이는 급히 정면으로 뛰어들며 그리메를 뽑았다.
하지만 남자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몸을 숨기고 있나 싶지만 그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기척마저 사라진 것이었다.
"씨발, 도대체 뭐하는 새끼야?"
이미 자기 일로도 골치가 아픈 일라이.
거기에 더해 자신과 닮은 사람까지 나타난 셈이다.
혼란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일라이는 저택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자신의 상식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저택에 들어서자 여자들이 물었다.
"어딜 갔다 온 거야?"
"아니야. 그나저나 방은 마음에 들어?"
일라이의 질문에 여자들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기뻐하니 일라이도 기뻤다.
"응, 물론이지!"
"따뜻한 물이 나오더군."
"흥, 이 정도는 돼야 저택이지!"
"배불러엉!"
여자들이 저마다 표현을 하자 일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여자들 앞에서는 웃고 싶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말이다.
여자들에게 편하게 쉬라고 말한 뒤 일라이는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이제 조금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