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4화 〉믿을만한 소문 (64/100)



〈 64화 〉믿을만한 소문

"어으, 피곤하다……."
"그래도 정신차리라고."
"어허으."
"간밤에 했길래 그래?"

아침 식사를 마친 둘은 1층에서 쉬고 있었다.
세지가 물었으나 일라이는 앓는 소리만 냈다.
현재 일라이는 세지의 가슴에 뒤통수를 댄 채로 쉬고 있었다.
푹신해서 잠까지 올 것 같았다.

"침입자가 있었지."
"침입자? 이런, 나를 깨우지."
"그 정도는 아니야. 내가 격퇴했어."


손을 내저으며 일라이가 대답했다.
세지가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역시 대단하군."
"하지만 죽이지 못했어. 분명 다시 만날 거야."
"또 이기면 되는  아니야?"
"이게 권선징악 연극도 아니고…내가 성장하는 만큼 적도 성장할  있단 말이지. 게다가 다른 대륙인이고."
"그렇구나. 궁금하긴 하네. 다른 대륙인들은 어찌 싸울지."
"조금 신기하고, 많이 진부하더라고."

센스있는 대답을 하며 일라이는 바로 섰다.
피식 웃으며 세지가 팔짱을 끼자 일라이는 목 뒤를 주물렀다.
슬슬일라이가 정신을 차리는것 같자 세지가 물었다.


"그래서, 오늘은 뭐할 건데?"
"여자들 행방을 찾아야지. 이 던전에서 나가긴 힘들지만, 여자들도 지금쯤 이곳에 들어올 테니까."
"대충 계산해보면 그럴지도?"
"다만 여자들이 어디에 있을지 걱정이야. 최악의 상황엔 각개격파될 수 있어."

각개격파 된다면 좋을 게 없다.
그걸 미연에 방지하려고 여자들의 조를 나눌 때 더욱 신중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라이는 불안한 마음을 떨쳐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나아가자 세지가 조심스럽게 따라오며 말했다.

"여자들은 잘 있을 거야."
"그렇게 믿어야지. 그나마  던전이 에레스트와 다르지 않아서 다행이야."

침식된 것 같긴 해도 곳곳에 건물이며 문명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운이 좋다면 정신 멀쩡한 생존자들을 만날지도 몰랐다.
그것 하나를 바라며 일라이가 저택을 나서려 했다.
세지가 따라오려 하자 일라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저택을 가리켰다.


"세지는 여길 맡아 줘."
"흠, 보물이나 식량이 제법 되긴 하지만. 내가같이 가는 게 낫지 않아?"
"됐어, 혹여 여자들이 찾아오면 반겨줄 사람이 필요하잖아."
"그럼 조심히 다녀오라고."

흐뭇하게 웃으며 배웅하는 세지.
일라이는 믿음직스럽게 웃더니 저택을 나섰다.
그는 우선 건물들이 몰려 있을 곳을예상하려 햇다.

"여기에 저택이 있으니…근처에 분명 민가들이 있을 거야."


만약 이곳을 하나의 영지, 혹은 하나의 국가라고 가정한다면?
대륙을 막론하고 인간의 기술력은 어디나 상당히 비슷하다.
그러므로 저택 근처에 다른 건물들이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곳을 찾고 싶었다.
어제 폐가가 있던 곳은 완전히 틀렸으니, 그 반대편으로 가면 될 것 같았다.
저항의 탈리스만 때문에 일라이의 발은 늪지대에 빠지지 않았다.


"사뿐하구만."

짧게 웃으며 앞으로 전진하는 일라이.
한참을 갔을까?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보였다.
마침내 길을 발견했다는 즐거움도 잠시,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부웅-!

"흠!"

그리메를 빼들며 바로 공격을 막는 일라이.
자세히 보니 자신을 공격한 몬스터가 보였다.

"치짓, 그히힛…인간이다."


카멜레온의 머리, 갑각류의 몸을 가진 몬스터 '브리첼'이었다.
집단생활을 하며, 기후에 크게 영향을  받는  특징이었다.
브리첼들은 주로 자신들이 벗어둔 허물을 뭉쳐서 둔기를 만들고는 했다.
브리첼의 등장에 일라이가 바로 대응했다.

"난 벌레는 싫어해서 말이지. 뒈져."


[브류스터드 파검류 - 피바라기]

후우욱- 파파파파파파파팟-!

순식간에 난도질되어 쓰러지는 브리첼.
그때 뒤는 물론이고 사방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무래도 브리첼들이 포위하려는 것 같았다.


"어림없지."


바닥을 쓸듯 빠르게 움직이며 일라이가 옆으로 뛰어들었다.
막 쇄도하려던 브리첼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일라이가 검을 휘둘렀다.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내지른 검이 브리첼의 목을 날렸다.
그러자 브리첼의 동족들이 바쁘게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인간이다, 인간!"
"더 먹는다, 인간!"
"그기기긱!"


일라이는 목이 날아간 브리첼의 시체를 쥐었다.
목이 날아가도 브리첼의 몸은 얼마간 움직일 수 있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역겨움이 드는 갑각류의 몸.
잡고 있던 브리첼의 몸을 바로 정면으로 내던졌다.
그와 동시에 온 힘을 다해 달려나갔다.

푹푹- 팍-!

동료의 몸이 날아온 것도 모르고 신나게 찔러대는 브리첼들이 보였다.
가까이에 있던 브리첼의 목을날린 일라이가 지면을 박찼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브리첼들이 고개를 돌리려 할 때였다.
마치 바람처럼 움직이던 일라이가 기묘하게 검을 놀렸다.


후욱- 파아앗- 푸화악- 써걱- 쑤욱-!

순식간에 브리첼들을 쓰러트린일라이가 태연하게 길을 내려갔다.
그는 그리메를 칼집으로 되돌리며 말했다.


"함정도 없이 고작 수로 밀어붙이려 하다니. 지나가던 르갈론이 웃겠다."

가볍게 비웃어주며 일라이는 근성있게 걸었다.
길을 다 내려오니 민가들이 나왔다.
다만 브리첼들에게 습격당한 건지 성한 곳이 없었다.
이곳 역시 저택처럼 늪에 침식당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던 일라이가 혀를 찼다.

"씨발, 멀쩡한 곳이 없네.여기 원래 이래? 뭣 때문인지 모르겠네."

죽은  얼마   시체들도 보였다.
길거리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기가 꺼려졌으나 정보가 필요했다.
살아 있는 자가 있다면, 적어도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으, 개판이다."

중심지에 있던 우물을 살펴보니사람의 시체가 둥둥 떠있는  보였다.
결국 물조차 마시지 못하는 곳이다.
아무래도 큰 가치가 없는 것 같아서 일라이는 떠나려 했다.

"우으, 우으윽!"

근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일라이는 멈춰 섰다.
소리는 근처 대장간에서 들리고 있었다.
무기들이 널려 있는 곳으로 조심스럽게들어섰다.
모험가로 보이는 남자가 가슴에 자상을 입은 채로 주저앉아 있었다.
일라이가 나타나자 남자는 흠칫 놀라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크윽, 뭐야? 살아 있는 용병이 있었나?"
"용병? 나는 용병이 아니다만."

일라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남자는 놀란 듯 일라이를 올려다봤다.
이 남자의 신분은 용병 같았다.


"용병이 아니라고? 그, 그럼 공국에서 드디어 지원을?"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여긴 대체 어디지? 그리고 왜 이 모양이 된 거고?"


침착하게 질문하는 일라이.
남자는 멍하니 일라이를 보다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어지럽게 헝클어진 금발을 쓸며 남자가 쓰게 웃었다.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젠장, '메지'가 한 말이 맞았어. 진짜 완전 다른 세계로 온 같군."
"우린 이곳을 던전이라 부르고 있지."
"던전? 하, 젠장. 대륙 한 구석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우리나라가…고작 던전으로 갈라져 나왔다고?"
"그런 현실이지."

정 떨어질만큼 냉정하게 대답하는일라이.
남자는 길게 한숨을 쉬다가 격하게 기침을 했다.
피가 거품처럼 튀어나왔다가 멎었다.

"크흐, 허흠. 우리가 다른 세상에 유배됐다는 건 사실이었군. 제길, 여기가 어딘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안 그래?"

안색이 창백해지며 남자가 겨우 말했다.
일라이가 뺨을 긁으며 물었다.


"그럼 여긴 네가 살던 세계였나? 그러다가 던전으로 분할되고?"
"그래, 쿨럭큭. 어차피 그렇게  됐어도 죽음은 피할 없었겠지만."
"왜?"
"우리 세계는 멸망하고 있었거든. 빌어먹을 제국놈들, 멸망 따위 막아준다고 해놓고서 결국한 게 없다고!"


이젠 이 자리에 없는 제국을 탓하는 남자.
일라이가 동의하듯 말했다.


"맞아, 제국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그렇지. 자지만 큰 무뇌새끼들 같다니까."
"푸흐흐흐, 웃기는 소릴 하는군. 아무튼 여기를 보면 알 거야. 늪지가 되어가고 있어."
"왜 이러지?"
"나도 몰라. 커흑, 우리도 어제 밤까지 야영을 하다가 알아챈 사실이라고."


일라이는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정말 다른 세계로 와버렸다는 것 조차 이제야 알고 있다.
그러니 굳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남자를 믿기로 하고 일라이는  가지를 더 물었다.

"혹시 다른 정보는 없나?"
"흐으, 어이. 포션은 없어? 나 죽겠는데."
"유감이지만  흔한 포션이 없군. 나야 죽어도 다시 살아나서말이지."

일라이의말에 남자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곧 죽을 것처럼 폭소를 터트렸다.


"후흐하하하, 진짜 웃긴 자식이네."
"웃을일이 아니야. 난 죽을 맛이라고."
"죽지도 않으면서 뭔 죽을 맛이라는 거야?"
"그건 그래."
"제기랄, 그럼 이대로 죽겠군. 망할 벌레새끼들……."
"몬스터들 말인가?"

일라이의 질문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어제 밤까지는 이들도 무사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아침이 밝아서 습격당한  같았다.
새삼 근처에 널려 있는 브리첼들의 시체를 둘러봤다.
아마 인간들과 싸우다가 죽은 것이리라.

"젠장, 혹시 지원군이 있나 기대했는데. 염병, 다 틀렸어."
"따로 연락이라도 있었나?"

질문을 받은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쿠흑큭. 우리쪽 척후병이 어제 이런 소문을 가져왔더군. 쿨럭크헉! 어으, 근처 숲이나 황야에서  보던 여자들이 나타났다고."
"여자들?"


여자들이라는 말에 일라이의 눈빛이 달라졌다.
서서히 시야가 흐려지는 남자에겐 보이지 않았다.
그는 겨우 정신을 붙들어 맨 채로 말을 이었다.

"후으으, 우린 그게 지원군인 줄 알았어. 왕국 기사단은 원래 여자들로만 편성되거든."
"특이한 세계로군. 여자만으로 기사단이라…하지만 로망이지."
"쿨럭크헉, 허윽. 무슨 소리야? 기사는 원래 여자들만 하는 거라고. 나 같은 남자는 모험가를 하거나, 집안에서 살림을 하는 게 당연한 거잖아?"

예상치 못한 남자의 말에 일라이가 놀라고 말았다.
그는 잠시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여자가 기사가 되는 건 당연하지만, 남자가 살림을 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
어딘가 상식과는 어긋난 것 같았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이제 곧 죽는데, 어윽, 농담을 하겠냐? 후으, 여자들 대체 뭐였던 거지? 제길, 기사가 아니면 뭐냐고…괜히 기대만 하게 하고."
"……아무래도 네가 살던 세계는 남자와 여자의 성별이 역전되었나 보군."
"크큭, 그래? 그럼 네가 살던 세계는? 반대겠지, 뭐. 멋지구만."

이제 보니 남자는 어딘가 색기가 흐르는  같았다.
거칠게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린 일라이가 마른 입술을 적셨다.
남자에게 색기가 있다는 느낌을 받다니.

'미친 세계로군.'

고개를 저으며 일라이는 남자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물었다.


"그 여자들 봤다는 거 있잖아. 방향이 어디지?"
"숲이나 황야에 있겠지…제길. 방향은 알아도 거리는 모른다고."
"그래? 그거 아쉽군. 일일이 찾아봐야 하잖아."
"이봐, 부랑자들이면 어떡해? 쿠흑,그러다 강간당할 수 있어."
"그럼 좋지 뭘. 역강간을 해서 합법적으로 강간을  수 있는 거잖아?"

일라이의 상식을 뒤바꾸는 대답에 남자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서서히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웃었다.
그나마 가는 길, 외롭지 않게 가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쓰러지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쥐어짜내듯 말했다.


"이곳에, 아니,  지역 전체에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 있어. 그게 뭔지 몰라도 분명 불길한 거겠지. 진심으로…무운을 빈다, 이름 모를 자식아."


유언 비슷한 말을 남기며 쓰러진 남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일라이는 쓰게 웃었다.
근처에 있던 짚더미를 가져와 남자에게 덮어줬다.

"무덤 만들어줄 여유가 없다. 미안하고, 편히쉬어라."

짧게한숨을 남기며 자리를 벗어나는 일라이.
아무튼 여자들에 대한 정보는 입수한 셈이다.
그렇다면 늦지 않게 찾아야 했다.
부디 여자들이 알아서 저택으로 오길 바라며 일라이는 한 곳으로 향했다.
그 발걸음이 어딘가 경쾌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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