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그늘백작
"으음?"
편하게 잠을 자던 일라이가 눈을 떴다.
마치 누군가가 깨운 것처럼 바로일어난 것이다.
때마침 궤종시계가 2번 울리고 있었다.
새벽 2시라는 의미였다.
"아, 제길. 왜 이러지?"
이상하게 잠이 확 달아났다.
근처에 무서운 적이라도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선 불을 켜려다가 일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탁자에 있던 휴대용 랜턴을 켜고 땅바닥에 뒀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조심해야했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칼집까지 찬 일라이.
"후우……."
문열 여니 묘하게 싸늘한 공기가 전신을 타고 스쳐 지나갔다.
바로 앞방에 세지가 있었지만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잠입을 하듯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었다.
나선계단을 천천히 내려갈 때, 별안간 문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쿵- 텅텅-!
쌓아놓은 뼈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라며 일라이가 빠르게 내려갔다.
뼈들을 쓸어내는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내 집에 누군가가 침입했나 보군."
가늘면서도 확실하게 감정이 실려 있는 목소리.
화려해 보이는 귀족 복장을 한 남자가 칼집을 찬 채로 들어온 것이다.
나이는 중년, 턱수염은 제법 덥수룩한 모습이었다.
마침 다 내려온 일라이가 그리메를 빼들며 물었다.
"뭐하는 새끼냐?"
"나는 이곳의 주인이자 그늘백작이라 불리는 사람이지."
"이름조차 알려주지 못할 만큼 자신이 없나?"
"그럼 그쪽은 어떻지? 침략자."
그늘백작이 비웃듯 묻자 일라이가 차갑게 웃었다.
그는경계를 늦추지 않고 대답했다.
"망국의 왕자, 일라이다."
"오, 일라이! 망국의 왕자!"
연극을 하듯 과장된 몸짓과 함께 한숨을 쉬는 그늘백작.
그는 천천히 일라이에게 다가갔다.
다가가며 그의 그림자가 더욱 길게 늘어졌다.
마치 무언가에 붙잡힌 것처럼 늘어지더니, 순식간에 줄어들며 원래대로 돌아왔다.
순록의 가죽으로 만든 부츠를 툭툭 털며 그늘백작이 말했다.
"내 영지에는 무슨 일인지?"
"영지 좋아하네. 너, 여기가 어떤 세상인지 알고 있지?"
"후후, 물론. 그리고 이 뼈들 역시…내 하인들을 잘도 없애놨군."
"화 나나?"
"딱히. 어차피 이들은 죽어도 죽을수 없는 처지였어. 적어도 '브로스트람' 대륙은 사자의 대륙이라 불려야 하니까."
처음 들어보는 대륙 이름이었다.
일라이는 간신히 표정관리를 하며 의문을 가라앉혔다.
이곳은 던전.
엄연히 다른 세상이었다가 강제로 떨어져 나온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그늘남작이라는 자 역시 원래부터 귀족일지도 몰랐다.
다만 이미 저주받은 땅의 귀족이 된 순간부터 그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유감이지만 나도 살아야 해서 말이야."
"타인의 영지를 무단 침입하다니. 어디 구석에 붙어 있는 나라인지 몰라도…고작 왕자 따위가 이러면 곤란하지."
스르릉- 타학-!
칼집에서 검을 빼던 그늘백작이 힘을 줬다.
그러자 강렬한기세를 내뿜으며 칼이 뽑혔다.
그 파장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보이지 않는 무색의 파동이 생기며 일라이에게 날아왔다.
[공국령 파동술 - 메아리]
직감으로 피한 일라이가 좀 더 옆으로 물러났다.
뒤로 퍼져나가야 할 파동이 거짓말처럼 다시 되돌아오며 스쳐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마른 침을 삼키며 일라이가 물었다.
"기를 다루는군?"
"물론. 우리나라 기사들이라면 당연히 해야하는 것이지."
태연한 그늘백작의 말에 일라이가 피식 웃었다.
처음부터 자신의 힘을 보여주는 건 초보나 하는 짓이다.
아니면 정말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거나.
어쨌든 기를 다루는 데에 능숙한 사람은 힘 자체를 방출할 수가 있다.
일라이 역시 할 수 있지만, 생각보다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일이라 평상시엔 사용하지 않는다.
"'포네스'공국의 그늘백작이 침략자를 사냥하겠다. 침략자 일라이, 내 검을 받을 텐가?"
"좆 까지 말고 덤벼. 이제 여긴 내 땅이니까."
"그렇군! 지극히…침략자 다운 발상이다!"
탓-!
지면을 크게 박차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그늘백작.
일라이는 옆으로 빠지며 그늘백작의 뒤로 우회했다.
그리고 빠르게 그리메를 내질렀다.
후웅- 태앵-!
그러나 그늘백작이 마주 휘두른 검에 상쇄되며 밀려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그늘백작이 빠르게 몸을 숙이며 검을 내리그었다.
[공국령무기술 - 바위 가르기]
무서운 기세로 종베기를 하는 그늘백작.
일라이는 뒤로 텀블링하며 피하더니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일어났다.
그때 코앞으로 파동형의 힘이 날아왔다.
[공국령 파동술 - 서풍]
바우웅- 푸캉-!
"칫……!"
그리메를 들어 막으려 했지만 온전히 막아내지 못했다.
파동형의 힘이 그리메에 의해 갈라지며 일라이의 전신에 직격한 것이다.
살짝 주춤거리는 일라이.
그 틈에 그늘백작이 빠르게 달려들었다.
일라이가 움직임을 읽으려 할 때, 그늘백작이 지그재그로 움직였다.
그리고 푸른 안광을 흩뿌리며 단숨에 일라이의 목을 향해 칼을 내질렀다.
[공국령 무기술 - 표범 참수]
오직 숨통을 끊기 위해 다가오는 그늘백작의 칼.
일라이는 이를 악물며 그리메에 기를 담았다.
기를 담아 내지르는 방식은 조금 다르지만, 그 힘의 형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기술을 발휘했다.
[브류스터드 파검술 - 송곳]
후우욱- 푸훅- 까앙-!
둘의 검이 동시에 맞부딪쳤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일라이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느끼며 생각했다.
'그늘백작…특이한 별명답지 않게 강해. 적어도 제국의 기사들보다 강하다!'
속으로 숨을 고르며 일라이는 그리메를 두 손으로 잡았다.
느긋하게 숨을 쉬며 그늘백작이 말했다.
"과연 왕자는 왕자인가? 주색보다 무에 집중했나 보군."
"꼭 그렇지는 않은데 말이야."
"아, 그런가? 실례."
예의를 갖추며 사과하다가 다시 쇄도하는 그늘백작.
그러나 이번에는 일라이가 먼저였다.
그는 아까 보여준 몸놀림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며 발을 앞으로 가져갔다.
타타탓- 푹-!
그늘백작의 발을 밟으며 어깨로 들이받았다.
순식간에 체술을 사용하는 일라이에 그늘백작은 당황했다.
'기사가 검이 아니라 몸으로……?'
퍼어억-!
이를 악물며 뒤로 밀려나는 그늘백작.
그러다가 그는 눈을 크게 떴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라이가 쇄도하고있었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 추수]
정직할 정도로 빠르게 다가오는 그리메.
그늘백작은 겨우 중심을 잡고 그리메를 쳐냈다.
그리고 한 바퀴 돌며 칼을 비스듬히 놀렸다.
마치 무용수와도 같은 우아함이었다.
[공국령 무기술 - 무명 검무]
첫 검격을 피한 일라이가 미끄러지듯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바로 일라이의 상체를 향해 그늘백작의 칼이 다가왔다.
그걸 그리메로 쳐내며 정면으로 쇄도하는 일라이.
이대로 끝장내고 싶었지만 쉽지는 않았다.
그늘백작의 움직임은 흐트러지지 않았고, 오히려 일라이가 쳐낸 힘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그대로 내지르고 있었다.
"씨발!"
후우웅- 파카아아악- 태탱-!
기술의 시작과 끝, 다른 방향으로의 연계, 그리고 속도와 힘.
모든 게 균형이 맞았다.
벨레르가 인간을 뛰어넘은 레벨의 강자라면, 그늘백작은인간 레벨의 강자들이 본받아야 할 교과서 같은 사람이었다.
문득 일라이는 흥미를 느꼈다.
이 사람을 죽이고 나면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을까?
"웃고 있군, 망국의 왕자."
그늘백작이 얼굴의 반을 그늘진 채로 서있다가 말했다.
일라이가 어깨를 으쓱이며 다가왔다.
"재미있어서. 그리고 흥미로워서."
"호오, 적에게 흥미를 느끼나?"
"그럼. 내가 이 새끼를 죽여서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을지 기대되거든."
"후후, 그런 착각은 오늘로 끝이겠군!"
말을 마치며 그늘백작이 야수처럼 달려들었다.
일라이가 뒤로 크게 물러나며 거리를 두다가 지면을 박차며 다시 쇄도했다.
둘은 동시에 검을 맞댔다.
태탱- 까아앙-!
쇳소리가 고요하던 저택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늘백작이 유연하게 일라이를 뒤로 밀어내며 칼을 내질렀다.
일라이는 숙였다가 일어나며 피하고는 그리메로 횡베기를 했다.
칼을 늘어트린 채로 있던 그늘백작이 바로 방어하며 파훼했다.
그러다가 일라이가 대각선으로 구르며 변칙적으로 검을 휘두르자 미소를 지었다.
'이 왕자, 쉽게 볼 수가 없는데?'
후웅- 태앵- 태태탱-!
서로 치열하게 검격을 주고 받으며 일정 거리를 두는 둘.
그늘백작은 실험이라도 하듯 일라이의 곳곳을 찌르거나 베며 공격의 활력을 더해가고 있었다.
반면에 일라이는 아까 그늘백작이 한 대로 그가 내지른 힘을 자신의 것으로 하며 그대로 내질렀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승부.
그때 변수가 생겼다.
빠르게 움직이며 싸우던 일라이의 발에 뼈가 걸린 것이다.
"아……!"
후욱- 탱그랑-!
뼈를 밟고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
그때 그늘백작이 무서울 정도로 환한 미소와 함께 안광을 흘렸다.
그의 검이 파동형의 힘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일라이의 심장을 향해 내질렀다.
[공국령 파동술 - 찢어발기는 질풍]
온 힘을 다해 내지른 기술.
흡사 돌풍이 몰아치듯 엄청난 기류가 형성되어 그대로 일라이에게 내질러졌다.
그 위험한 순간에 일라이는 이를 악물었다.
질 수 없었다.
이런 곳에서 지려고 지금까지 죽고, 일어나고, 다시 죽으며 고생을 한 게 아니었다.
"해보자고……!"
[브류스터드 파검류 멸검 - 종식]
몸 안에 흐르던 기를 전부 검에 담아 거칠게 내질렀다.
두 사람의 기술이 정면에서 부딪쳤다.
후우욱- 콰하아아아악-!
두 검이 맞붙자 그 여파로 주변에 있던 해골들이 처참하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조형물이나 커튼, 카펫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심지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들도 있었다.
일라이는 밀릴 듯 하다가 온 힘을 불어넣었다.
마침내 힘의 균형이 깨졌다.
후우욱- 두둑- 콰카카카칵-!
"윽!"
놀란 얼굴로 일라이를 쳐다보는 그늘백작.
칼을 쥔 오른손과 팔은 물론이고, 어깨 부분까지 처참하게 찢어발겨지기 시작했다.
결국 총합적인힘에서 일라이에게 밀린 것이었다.
허무한 얼굴로 뒤로 나가 떨어지는 그늘백작.
"후우, 하아, 씨발."
막판에 해골을 밟지 않았다면 더 확실한 기술이 됐을 것이다.
하필 그러지 못해서그늘백작이 살게 되었다.
그는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일라이를 보다가쓰게 웃었다.
"그래,역시 그늘에서 싸우지 않으면 별 수 없겠군."
"도망치려고?"
"작전 상 후퇴지. 이곳은 잠시 맡기마."
"너 이 새……."
"다음에 볼 때까지 각오 단단히 해두라고, 애송이 왕자!"
뒤로 크게 뛰며 순식간에 저택을 나가버리는 그늘백작.
일라이는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침을 뱉었다.
달려가서 잡기에는 복병이 있을 수 있기에 하지 못했던 것이다.
검을 쥔 손이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이런 적을 만난 게 벨레르 이후로 얼마만일까?
떨리는 마음과는다르게 일라이는 웃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