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질척하지만 더러운 그곳
던전 내부는 말 그대로 종말을 맞이한 에레스트와 비슷했다.
단지 모든 지면의 90%가 늪지였다.
그나마 마른 땅이나 제대로 발 내디디고 다닐 수 있는 곳도 상태는 좋지 않았다.
지난 번 던전처럼 땅에서 고구마나 감자가 날 거라 비는 건 도둑놈심보로 보일 정도였다.
"제길, 최악이군."
"그러게. 지하도시도 이보다는 나은데."
일라이와 세지는 어느 버려진 폐가에서 쉬고 있었다.
그 지구력 좋던 세지조차 지칠 만큼 던전의 늪지형은 최악이었다.
이런 곳에알맞은 도구가 있다면 좋을 거라고 일라이가 생각할 무렵.
영원히 지속되는 밤하늘 아래,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생각보다 차가운 바람에 일라이는 건물 벽에 기댔다.
"여자들은 잘 있겠지?"
"……지금 우리가 가장 위험한 것 같은데?"
"그래, 내 주제에 뭘 걱정하는 거냐. 하아."
머리를 긁적이며머쓱하게 웃는 일라이.
세지는 일라이를 보더니 가볍게 웃고는 꿇어 앉으며 집 벽에 기댔다.
비록 짚더미가 없는 마굿간 같았지만, 이렇게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 좋았다.
"세지, 여기 오면서 봤던 곳 있지?"
"저택? 응. 벽이 좀 높아서 가려다가 말았잖아."
"아무래도 거기 뭔가 있는 것 같아. 대개 그런 곳에 보물이 있는 법이잖아?"
"흐음…그건 그렇지만."
뺨을 긁으며 세지가 한숨을 쉬었다.
미리 가지고 온 건량도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애초에 가짜 던전에 가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건량이 많을 리가 없었다.
결국 이런 건물에서 얻을 거라고는 잠깐의 휴식 뿐이었다.
일라이가 바지를 털며 일어났다.
"거기로 가자. 자도 거기서 자자고."
"전초기지로는 적합하겠지."
"미안하지만 고생 좀 해줘야겠어."
"알아, 알아. 그러기 위해 내가 있는 거잖아?"
별 문제 없다는 듯 앞으로 나아가는 세지.
그녀는 늪지형에 거의 가까워질 무렵 일라이를 돌아봤다.
그리고 윙크를 했다.
"야, 타!"
"좋아!"
일라이가 날렵하게 타자 세지는 다시 달렸다.
저택으로 가는 길은 무난하다.
다만 늪 특유의 질척함 때문에 속도를 내기가 어려웠다.
주변을 경계하던 일라이가 표정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자잘한 함정은 본 적 있어도, 몬스터는 본 적 없어. 그 저택에 몰려 있는 걸까? 이렇게 질척한 곳은 처음이야!'
높에 대해 경악하고 있을 무렵.
세지는 근성을 발휘해서 저택의 철문 앞까지 다가왔다.
쇠창살이 보다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그리메를 빼든 일라이가 세지에게서 내려섰다.
그리고 단숨에 창살을 향해 그리메를 휘둘렀다.
후우웅- 파캉-!
어렵지 않게 창살을 자르고 안으로 들어가는 일라이.
이 정도의창살문이라면 무난하게 들어갈 수 있다.
적어도 미스레아가 사는 저택 문 정도는 되어야 넘보기 힘든 수준일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역시 늪에 가까운 정원들이 보였다.
"이봐, 세지."
"응?"
"이 던전 말이야. 아직 다 둘러본 건 아니지만…어째 던전 자체가 늪에 침식되는 것 같지 않아?"
"그러게. 여기만 보더라도 원래 늪이 아닌 것 같아 보이는데."
바닥에 깔린 타일조차 조각나며 늪에 물들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몰라도 오래 있고 싶지는 않았다.
혀를 차며 일라이는 앞으로 향했다.
슬쩍 열린 채로 주변에 핏자국이 가득한 저택이 보였다.
그리메를 쥔 손을 살짝 풀며 일라이는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래도 빛이 필요한 것 같아서 일라이는 휴대용 랜턴을 꺼냈다.
"좋아, 가보자고."
휴대용 랜턴을 칼집이 있는 곳과는 반대편의 허리춤에 거는 일라이.
그 상태로 저택에 들어섰다.
순간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나더니 살벌한 느낌이 들었다.
"씨발!"
툭- 티잉- 후우우웅- 파악-!
거대한 투창이 일라이가 있던 곳으로 날아와 박혔다.
악랄하게도 저택에서조차 함정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과연 던전이라 불릴만 했다.
유연하게 투창을 피한 일라이가 주변을 둘러봤다.
"조심히 들어와, 세지."
"걱정 말라구."
거대한 투창을 들어보이며 흐뭇하게 웃는 세지.
마침내 어울리는 무기가 나왔다고 여긴 그녀가 투창을 살필 때, 일라이는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면에는 양쪽으로 퍼져나가는 것처럼 나선형의 계단이 2개 보였다.
두 계단의 가운데에는 누구인지 모를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분명 사람의 모습이지만, 새까맣게 물들어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슬슬 1층 로비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생각만큼 잘 되지는 않았다.
기기기긱- 지기긱-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일라이가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돌렸다.
신기하게도 언데드 몬스터인 해골 병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저택을 점령한 몬스터는 언데드가 주류인 것 같았다.
"나타나셨구만. 엘브루트에서는 좀비, 여기서는 해골. 가지가지하셔?"
일라이가 반갑다는 듯 말을 건넸다.
그러자 낫을 들고 있던 해골 병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바로 일라이를 향해 낫을 휘둘렀다.
바웅-!
마치 몽둥이를 휘두르듯 웅장한 소리가 들렸다.
일라이는 외쳤다.
"전투 준비!"
"읏챠!"
투창을 휘두르며 압도적인 기세로 싸우기 시작하는 세지.
그녀는 다가오는 해골 병사들을 다리로 걷어차거나, 투창을 휘둘러 분쇄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무난하게 싸우고 있음을 깨닫고 일라이 역시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낫을 휘두르던 해골이 한 바퀴 몸을 돌리다가 바로 낫을 내질렀다.
[공국령 무기술 - 변형 휘두르기]
해골이 제법 빠르게 낫을 휘둘렀다.
일라이는 느긋하게 피하더니 그리메를 한 번 떨쳐냈다.
그리메의 궤도에 걸린 해골이 더 버티지 못하고 목이 끊어지고 말았다.
투툭- 땡그랑-!
몸과 연결이 끊어진 두개골이 땅바닥에 굴러다니다가 빛을 잃었다.
해골 병사들은 저마다 붉은 안광을 뿜어내며 일라이와 세지에게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둘의 실력이 워낙 출중하기에 바라던 것을 이루지는 못했다.
오히려 둘의 준비운동을 도운 꼴이 되고 만 것이다.
해골 병사들을 다 처리하자 일라이는 크게 한숨을쉬었다.
"환영인사가 조촐한데?"
"그래? 나는 얘네들이 더 안 나왔으면 좋겠는데."
상체에 흐르는 땀을 털어내며 세지가 대답했다.
일라이는 어깨를 으쓱이다가 근처를 둘러봤다.
로비 자체에도 양쪽으로 향하는 길이 있었다.
왼쪽은 식당으로, 오른쪽은 예배당으로 향하는곳 같았다.
아마도 어느 저택에나 있는 손님맞이방은 2층부터 있는 것 같았다.
"일라이, 타."
"음?"
"적어도 여긴 늪이 아니야. 상쾌하게 속력을 낼 수 있지."
"좋아, 한 번 즐겨보자고."
멋지게 웃으며 세지에게 올라타는 일라이.
세지는 먼저 왼쪽 길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저택에 존재감을 내비치는 그녀였다.
***
1시간도 안 되어 저택을 장악한 일라이와 세지.
둘은 자신들이 모은 것들을 2층 층계참에서 확인하고 있었다.
먼저 일라이가 입을 열었다.
"이거 짭짤한데? 지난 번 던전보다 더 많은 금은보화가 있어. 게다가 이 목걸이 봐.마법 도구 같아."
"자기 스스로 빛을 내는 목걸이라니. 신기하네. 아, 여기 식량들이 많더라고. 이 정도만 해도 여자들 와도 거뜬하겠어."
둘은 서로를 보며 웃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많은 것들을 얻을 줄 몰랐던 것이다.
그야말로 저택을 구석구석 뒤져 얻은 것들이었다.
우선 일라이는 목걸이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목에 걸자 눈 앞에 글씨들이 나타났다.
[마법 도구 '저항의 탈리스만'이 당신의 소유에 들어갑니다.]
"저항의 탈리스만?"
일라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걸이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그는 옅은 녹색빛에 물들기 시작했다.
그 시간은 아주 짧았다.
세지가 놀라며 그에게 물었다.
"어, 어이…괜찮아?"
"응. 아프지는 않아. 근데 이거 진짜 마법 도구 같은데?"
"어디에 쓰는 건데?"
세지의 질문에 일라이는 바로 알아보려 했다.
저항의 탈리스만을 쥐고 있자 자동적으로 정보가 출력됐다.
[저항의 탈리스만은 지형의 패널티를 받지 않게 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아군들에게 효과가 있습니다. 효과를 받을 아군을 정해주세요.]
제법 친절한 도구였다.
가장 필요한 게 나오자 일라이는 웃어버렸다.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이게 나한테 뭘 알려주는 것 같아."
"그래?"
쿨하게 웃는 세지.
일라이가 세지를 가리켰다.
"이건 바로지형의 패널티를 지우는 도구야. 늪지에서도 평지처럼 걸을 수 있을 거야."
"하아, 그거 정말 다행이군. 이제 덜 피곤하겠네."
말을 마치며 웃는 둘.
이로써 늪지조차 그들의 문제가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쉬고 싶었다.
일라이는 빠르게 아래로 달려내려가서 해골들의 뼈를 모았다.
혹여 누가 올 지 모르기에 문에 기대어 놨다.
"이렇게 하면 누가 올 때 쓰러져서 요란한 소리를 내겠지."
일종의 덫이었다.
뼈를 다 세워놓고 일라이가 세지에게 돌아왔다.
"아무튼 슬슬 쉴까?"
"그거 좋지. 얼른 여자들이랑 만났으면 좋겠는데."
"반드시 다시 만날 거야. 여자들이 여기로 알아서 왔으면 좋겠는데."
"길이나 헤매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친근하게 얘기를 나누며 둘은 방으로 들어갔다.
이 저택은 절망에 침식된 것처럼 우중충했다.
하지만 온수며, 불은 깔끔하게 나오고 있었다.
이것만 해도 상당한 가치를 지닌 곳이었다.
'그래, 이 저택이라면…이 던전이라면 어쩌면?'
어쩌면 좋은 전초기지가 될 지 모른다.
그런 생각에 일라이는 환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이번 던전을 무난하게 클리어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들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