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1화 〉어느 곳에 박을까요? (61/100)



〈 61화 〉어느 곳에 박을까요?

꼬박 하루가 지났다.
숙소에서만 지낼 수는 없기에 일라이는 마침내 던전을 찾기 위해 여자들과 나섰다.
전투에 도움이 안 되거나,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경우를 빼고 모두 총출동한 상태.
일라이는 세지에 오르며 말했다.

"이번에는 대박 던전이면 좋겠는데."
"그러다  벨레르 같은 거 뜨는  아니야?"

아넬이 사악하게 웃으며 물었다.
물론 일라이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녀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으각!"
"재수없는 소리하지 마. 지금 드래건이니, 사도니, 뭐니로 골치 아파. 자꾸 적들이 늘어나면 좆 같다고."
"싸움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야, 넌 섹스 좋아하면 하루종일 수천 명의 남자한테 박힐 수 있냐?"
"…그건 좀 지겨울지도."
"힘든  아니라 지겨운 거냐? 몽마답다."

한숨을 쉬며 얘기를 마치는 일라이.
그는 여자들과 던전이 있다는 곳에 도착했다.
공교롭게도 환수가 산다는 유계산이었다.
별 일이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조심하고 싶은 일라이.


"여기에 광산이 있었나 보네."

유리엣이 정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테아가 튀어나오며 외쳤다.

"오오, 광산! 그럼 보석이나 이런 것도 많겠다!"
"관심많아?"
"당연하지! 너는?"
"나도 기본적으로 드래건이라서 말이지."


드래건인 유리엣은 보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던전을  때도 다른 누구보다 물건보존에 힘쓴 것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일라이는 의지만 드높이고 있었다.
그 옆에서 자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오늘도 한탕 털어보자고!"
"자하, 아무리 그래도 도적같은 발언은……."


레피나에 이어 자하까지.
일라이가 한숨을 쉬자 그를 뒤에서 안으며 우린이 나타났다.


"뭐 어때앵! 이참에 부자되는 것도 좋지!"
"멸망한 세계에서 부자되면 뭔 의미냐?  목적이랑은 안 맞아."

포옹을 풀며 앞으로 나아가는 일라이.
그를 따라 여자들이 천천히 뒤따르기 시작했다.
본래 광산을 위해 만들어진 갱도가 길게 나있었다.
그곳을 따라 가니  좋지 않은 공기가 몸속으로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여기도 공기는 최악이군."
"왜 던전은 항상 음산한 곳에 있는 거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레피나가 물었다.
하지만 일라이는 손을 내저었다.

"탑처럼 솟아 있거나, 특정 건물의 형태를 지닌 던전도 많아. 단지 우리가 운이 없는 것 뿐이야."
"제길, 어떤 카드게임처럼 운도 실력으로 불리겠구만!"

자하가 아쉬운 듯 벽을 쳤다.
제법 벽이 단단했다.
마침내 던전의 입구까지 도착한 일라이 일행.
그러나 도착하고 나서 얼어붙을수밖에 없었다.


"이, 이건?"
"엥? 실화야?"
"미친……."

던전 입구가 있을 거라 믿었다.
던전 입구는 확실하게 있었다.
다만 그 입구가 하나가 아니었다.

"제길, 어느 구멍에 박을지 고민되는군."


욕까지 섞으며 자기 기분을 표현한 일라이.
예상을 훨씬 뛰어 넘는 4개의 입구가 있었던 것이다.
여자들이 놀라자 일라이는 길드에서 받았던 자료를 떠올렸다.

"여기 분명 던전은 하나라고만 되어 있는데."
"혹시 여러 개의 던전이 한꺼번에 나타날 수도 있나? 아니면 복층 던전이라거나."

당황한 기색을 간신히 지우며 우린이 물었다.
일라이와 함께 자료를 봤던 리비카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렇지 않아요. 복층이었다면 하나의 던전에 있었을 겁니다. 이건…말그대로 독립적인 던전들이죠."
"길드의 정보가 틀릴 리 없어. 적어도 이곳 던전에 대한 신뢰도는 99%였다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며 일라이는 던전 입구들을 살펴봤다.
모두 똑같이 생겨서 진짜가 뭔지 헷갈릴 정도였다.
만약 이 중에 가짜가 있다면 낭패였다.
하지만 전부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할 거지?"

레스레모나가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 같았다.
일라이는 세지에게기대며 대답했다.


"시간이 없어. 지금 그나마 안개가 걷혔지만, 언제  몰려들지 알  없지."
"시간을 절약하긴 해야 해."

유리엣이 동의하듯 말했다.
일라이는 턱을 쓸며 말했다.


"유리엣,  진짜 던전이야?"
"모르겠어. 원래 던전에 대한 세부정보가 떠야 하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
"뭐?"
"마치 무언가가 방해를 하는 것처럼 원활하지 못해……."

당황하는 유리엣의 모습은 처음이 아닐까?
일라이는 혀를 찼다.
그나마 던전에 대해서라면 전문가인 그녀마저 무력화됐다.
그럼 할  있는 방법이 별로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인원을 나눈다."
"뭐어?"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뜨며 레피나가 다가왔다.
아넬 역시 말도  된다는 듯 외쳤다.


"대체 어떻게 나누겠다고? 그러다 각개격파 당하면?"
"유리엣, 이런 던전 본  있어?"

일라이의 질문에 유리엣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기억을 끄집어내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던전은 복층 던전이 아니야. '허수 던전'이라 하지."
"허수?"
"허수 속에 실수가 있어. 그걸 잡아내면 돼. 일종의 야바위 같은 거야. 이 4개중 1개는 진실한 던전이야. 나머지 3개는 던전처럼 보이는 이계의 찌꺼기일뿐."

앞으로 나아가는 유리엣.
그녀는 던전의 입구를 하나하나 쓰다듬다가 고개를 저었다.
역시 진짜가 무엇인지 가려내기 힘들었다.

"이계의 찌꺼기는 안전해. 일부러 헤매라고 만들어진 미로 같은 곳일뿐. 조금만 노력하면 빠져나가는 것도 어렵지 않지."
"그거 다행이야."
"하지만 진짜 던전에 간다면…각오하는 게 좋아. 지난 번보다는 난이도가 높을 테니까."


경고하듯 유리엣이 무섭게 말했다.
그녀의 모습이 다른 어느 때보다 차갑게 느껴졌다.
일라이가 얼어버리자 테아가 그의 팔을 안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에헤잉, 나랑 함께 하자. 그럼 아무 걱정 없어!"
"아니, 인원을 나누겠지만 밸런스 있게 나눌 거야."


일라이는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여자들을 둘러보며 차례대로 말했다.

"우선 유리엣과 리비카, 레스가 한 조. 그리고 테아와 레피나, 아넬이 한 조.  다음은 자하랑 우린이 한 조. 마지막으로 나랑세지가 한 조다."


일라이의 지시에 여자들이 놀랐다.
물론어느 정도 밸런스를 생각해서  구성으로 보이긴 했다.
우월한 힘과 방대한 지식을 지닌 유리엣에 작전참모로 손색이 없는 리비카, 거기에 파수꾼인 레스까지.
유리엣에 뒤지지 않을 만큼 강력한 테아와 힐러인 레피나, 그리고 원거리 마법을 담당할 아넬의 조합.
마지막으로 함께한 시간만큼 호흡이 잘 맞는 자하와 우린의 조합.
다만 일라이는 그저 세지와 함께 한다는 게 여자들의 마음에 걸렸다.

"일라이, 그건 위험하다."

고개를 저으며 레스레모나가 다가왔다.
하지만 일라이는 여자들을 생각해줘서 이런 구성을  것이었다.
물론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여기엔 이유가 하나 있어. 만약 나랑 세지가 가짜 던전으로 들어갔다고 해보자. 그럼 나머지 너희들 중에  조가 진짜 던전이겠지? 그럼 위험하다고. 나는 어디까지나 기동성을 중점에 둔 조합을  거야."
"잠깐, 그럼 내가 너한테 가도 되잖아?"


아넬이 입술을 비죽이며 따졌다.
하지만 일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다가 테아랑 레피나가 진짜 던전에 가버리면? 테아가 강한 건 사실이지만 주의력이 부족해. 그걸 레피나로만 커버할 수는 없어."
"우으……."
"그러므로 진형은 이렇다. 모두 따라주길 바란다."

일라이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여자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일라이는 마음이 놓였지만, 반대로 여자들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만약 일라이가 진짜 던전으로 들어가버리면 이 구성은 최악의 선택이 될 것이다.
어디가 진짜 던전일지 빨리 탐색하는 게 먼저였다.

"그럼 모두 다시 만나자!"

세지에 오르며 일라이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지체할시간이 없었다.
이대로 진짜 던전을 알아내고 싶었다.


다그닥다그닥-!


세지가 힘차게 지면을 박차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리낌없이 던전의 입구를 향해 뛰어들었다.


쉬히잉- 후웅-!

바람이 불다가 회오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일라이와 세지는 어디론가 들어섰다.
척 보면 달이 떠있는 밤 시간대의 어딘가였다.
문제는 달의 모습을 보니 정상적이지 않았다.
달 자체가 새까맣게 물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월식?"
"아니, 뭔가 달라."

세지가 바로 잡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진짜 던전일까?
 수는 없었다.
먼저 일라이와 세지는 미로처럼 생긴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가 가짜면 좋을 텐데."
"내 생각도 그래. 그런데 넌 여자들이 그렇게 걱정되냐?"
"당연하지. 내 보물들인데."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일라이.
세지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부럽네."
"뭐가 부러워? 너 역시 그중 하나야. 네가 없으면 나 혼자서 여기서 거지처럼 다녀야 한다고."
"조금 위안이 되는데? 엇, 길이 끊어졌어."
"본격적이군."

일라이는 서서히 세지에서 내렸다.
더 타고 다녀도 되지만 제법 정돈된 평지가 나왔다.
밤하늘에는 불길할 만큼 새까맣게 물들어가는 달이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 빛은 희미하면서도 밝힐 건  밝히고 있었다.

부엉- 부어엉-


근처에서 들리는 부엉이 소리.
혹시 부엉이 암살자가 나타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일라이가 웃어버렸다.
여긴 던전이다.
설마 여기서 그런 게 나타날 일은 없을 것이다.
세지와 함께 걷고 있자, 일라이는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  있었다.


"이런, 씨발……."
"왜?"

근처에 있던 길고 굵은 나뭇가지를 꺾어 무기 대용으로 쓰려던 세지가 물었다.
일라이는 자리에 멈춰 서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삽질한  같아."
"응?"
"여기 진짜야. 이런, 우라질."
"그걸 어떻게 알아?"
"뒤를 봐."


일라이가 뒤를 가리키자 세지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자신들이 지나왔던 곳의 풍경이 아예 달라져 있었다.
분명 미로같은 길이 나있어야 하는데, 지금 보면 무너진 협곡처럼 막혀 있었다.
세지의 표정이 변하자 일라이는 주변을 가리켰다.


"그리고 여기…늪지야."
"늪지? 그런 것 같네. 어쩐지 습하더라니."
"씨발…늪지면 식량 구하기가 힘든데."
"어이, 발이 빠질  있으니 다시 타."
"그래, 미안."
"미안하기는……."


다시 세지에 올라탄 일라이.
그는 어둠이 내려앉은 늪지를 둘러보며 혀를 찼다.
만약 이 던전 전체가 늪지로 되어 있다면 낭패였다.
문제는 여자들을 위해 세지와 단 둘이서 온 자신이었다.
전력이라고는 자신과 세지가 전부.
무엇보다 세지는 진짜 무기도 없으니 사실상 자기 혼자서 싸워야 했다.


"이거…개고생 예약인  같은데."

일라이가 힘없이 말했다.
그 말에 세지가 쿨하게 웃었다.


"걱정말라고. 내가 목숨을 바쳐서같이 싸울 테니."
"그래, 힘이 된다."

가볍게 세지의 어깨를 두드리며 일라이는 침착함을 되찾았다.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뭐가 나타날지 몰라도 흔들려서는 곤란하다.
마른 침을 삼키며 세지와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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