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그녀와의 재회
레피나와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는 일라이.
그는 귀를 파더니 물었다.
"이런 곳에서 뭔 산책을 한다는지."
"너는 인간이라 모르겠지만, 나는 반은 엘프거든?적어도 이런 게 큰 문제는 안 돼."
"아, 그러셔?"
"조, 조금은 문제 될 지도."
바로 솔직해지려는 레피나.
피식 웃던 일라이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안개 너머로 그늘진 산이 보였다.
몇 개의 능선으로 이뤄진 험해 보이는 산이었다.
안개 때문에 운치가 있다고 느껴질 때였다.
구우우우우우-
갑자기 산맥에서 그림자 하나가 일어서더니 길게 울기 시작했다.
일라이와 레피나는 동시에 이 소리를 듣고 멈춰 섰다.
알 수 없는 형체였기에 놀라움은 배가 되었다.
"저게 뭐지?"
"모, 모르겠어."
"반은 엘프라며!"
"나머지 반은 인간이라고!"
뻔뻔한 레피나.
일라이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산을 올려다봤다.
방금 전까지 울부짖고 있던 형체가 그대로 사라졌다.
안개가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둘은 다시 걸으며 얘기를 나눴다.
"젠장, 그거 대체 뭐였지? 뱃고동 소리인 줄 알았잖아."
"혹시 때맞춰서 배가 온 거 아닐까?"
"헛소리하지 마."
배가 와서 그런 소리가 났다면 반대 방향에서 소리가 나야 했다.
그러나 소리가 난 방향은 명백히 의문의 형체가 있던 산 쪽이었다.
여러모로 불길하기 그지없었다.
괜히 으스스해졌다는 생각에 레피나는 손을 들었다.
"저기 저택이 있네?"
"도망귀족이 있는 곳이야. 흠, 저기 갈까?"
"그러자. 저 사람이면 뭔가 알지도 모르니까."
"너 사실 겁나지?"
"아니거든!"
피식 웃으며 일라이는 레피나와 함께 미스레아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철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저택에 혼자 사는 주제에 무방비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남자라면 누구나 들어오라고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음란마귀가 찾아올 즈음에 일라이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리고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이번에는 무슨 일인지 문이 텅 빈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일라이가 놀라자 레피나가 주변을 둘러보며 바로 문을 두드렸다.
똑똑- 똑똑똑-!
"아오, 왜 이리 안 나와?"
"레피나, 좀 기다려라. 하여간……."
"하여간 도망귀족 주제에 건방져!"
얼굴조차 본 적 없는 미스레아에게 건방지다고 하는 레피나.
일라이는 답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곧 문이 열리며 미스레아가 나왔다.
"어머, 왕자님."
"아, 어쩌다 보니 오게 됐어. 얘는 내 동생."
빙긋 미소지으며 일라이가 레피나를 소개했다.
미스레아는 흐뭇하게 웃으며 레피나를 맞이했다.
묘하게 혈색이 좋아 보였다.
"반갑습니다, 공주님. 미스레아가 인사드립니다."
"흥, 이대로 세워둘 거야?"
"얼른 들어오시죠."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성큼 들어가는 레피나.
일라이는 문을 닫고서 자리에 앉았다.
마침 벽난로가 활활 타오르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유계는 안개 때문에 축축하고 서늘한 기온이기 때문이다.
미스레아가 차를 권했다.
"차라도 드실 건가요?"
"응, 아무거나 괜찮아. 그나저나 오늘은 얼굴 좋아 보이네?"
"간만에 잠을 푹 잤거든요. 잠시만 기다리시길."
미스레아가 매력적으로 웃으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벽난로를 바라보며 레피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일라이에게 물었다.
"쟤 혼자 살아?"
"그렇다는데? 가족은 이미 당했다고 하더라."
"이 저택 창고가 궁금한데."
"뭔 소리야?"
일라이가 표정을 찌푸리며 묻자 레피나가 바로 대답했다.
"혼자서 저렇게 유유자적하며 살 정도면…식량이 많다는 거지. 좀 얻어갈까?"
순간 일라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저렇게 말하는 여자가 한때 공주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성격이솔직하지 못하고 우악스럽다지만.
그리고 로리 체형에 불과한 하프엘프 공주님이라지만, 뒷골목 도둑들이나 할 법한 말을 하다니.
"햐아…레피나. 너도 변하긴 변하는구나?"
"그 말 무슨 의미야? 기분 더럽네."
"뭐, 좋은 말이라 생각해."
"얼른 말 안 해? 무슨 의미냐고!"
그때 미스레아가 차를 가지고 돌아왔다.
얼그레이와 홍차, 그리고 녹차였다.
일라이와 레피나를 번갈아 보며 미스레아가 찻잔을 건넸다.
"두 분, 정말 친해 보이시는군요. 남매라서 그런 건가요?"
"친해?"
"야, 너 미스레아라고? 제정신이야? 저런 놈이랑 친해 보여?"
당장 물어 뜯을 것처럼 레피나가 노려봤다.
그러자 미스레아는 당황하다가 겨우 고개를 숙였다.
물론 옆에 있는 일라이는 심기가 불편했다.
"야, 내가 뭐 어때서?"
"됐어, 멍청아."
할 말이 없어지는 상황.
세 사람은 곧 느긋하게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차마다 향이 다르고, 그 풍미가 다르다.
그리고 이런 아늑한 곳에서 마셔서그런지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미스레아가 찻잔에서 입을 떼며 말했다.
"이 마을의 특산품 중 하나가 녹차죠. 정말 향이 좋답니다."
"응, 그런 것 같네."
순순히 동의하는 일라이.
그때 레피나는 미스레아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여자인 내가 봐도 예쁜데? 게다가 엘프인가? 저 가슴은…살이 너무 쪘군.'
가슴 큰 여자들을 무조건 돼지로 보려는 레피나.
그만큼 부럽기도 하다는 의미였다.
슬쩍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본 레피나는 한숨을 쉬었다.
몽마인 아넬조차 가슴이 커가고 있는 것 같은데, 정작 자신은 발전이 없었다.
'아냐, 여자의 전부가 가슴은 아니잖아? 제길!'
레피나가 혼자서 내면과 싸우는 동안, 일라이는 차를 들이켜며 미스레아에게 물었다.
"맞아, 미스레아."
"네, 왕자님."
"아까 그 소리 들었어? 뭔가 길게 울리는 것 같은 소리."
일라이의 질문에 미스레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기 가슴에 손을 올려둔 채로 그녀가 대답했다.
"저도 들었어요."
"그거 무슨 소리인지 알아?"
"사실 여기서 지내면서 가끔 듣고는 한답니다. 배 들어오는 소리 아닌가요?"
역시 미스레아도 비슷하게 착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저택에서 별로 나오지 않는 인물이라고 확신한 일라이가고개를 저었다.
그는 아까 전에 레피나와 함께 본 것을 말해줬다.
"아무튼 그렇게 된 거야."
"그건 몬스터인가요?"
미스레아가 공포에질린 얼굴로 물었다.
가뜩이나 저택에 혼자 사는데, 이제 몬스터까지 걱정해야 한다.
사실 이렇게 혼자 사는 것도 대단한 것이었다.
만약 유계에 안개가 끼지 않았다면,진작 몬스터나 도적들이 본격적으로 활보를 쳤을 것이다.
"몬스터일 것 같기는 한데…아무튼 저택에서 나오지 않는 걸 추천해."
"물론 나갈 일이 없기에 별로 나가진 않아요. 그래도 무섭네요."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미스레아.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그녀를 보며 일라이가 능글맞게 말했다.
"원한다면 내가 곁에 있어줄 수 있는데. 흐흐……."
"아이고, 화상아!"
뻐억-!
일라이의 뒤통수를 있는 힘껏 후려 갈기는 레피나.
뒤통수를 잡으며 일라이가 노려보자 레피나가 시선을 회피했다.
대놓고 작업을 건 자의 최후였다.
마음을 안정시키려는 듯 차를 마시며 미스레아가 고개를 저었다.
"호호, 괜찮습니다. 저도 나름 제 몸을 지킬 방법은 있으니까요."
"아, 그래? 아쉽네."
일라이가 진심으로 아쉬운 표정을 짓자 레피나의 시선이 더 사나워졌다.
여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린다고 여긴 것이다.
어느 정도 얘기를 더 하고 일라이와 레피나는 저택을 나섰다.
언제라도 놀러오라는 미스레아의 인사를 받으며.
철문을 막 지나자 레피나가 혀를 찼다.
"여자면 아주 발정이 나는 거지?"
"시끄러. 남자들은 다 이래."
"세상 남자들이 너처럼 쓰레기는 아닐 것 같은데."
"쓰레기라니…말하는 것 참."
"그런데 좀 이상하더라."
"음?"
잘만 얘기하고 나온 뒤다.
그런데 이제와서 뭐가 이상하다는 것일까?
팔짱을 낀 채로 걷던 레피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미스레아한테서 향수 냄새가 나서."
"아, 그거 지난 번에 루밀다랑 가봤는데 창녀들이 뿌리는 냄새라는데?"
"엥? 걔 창녀였어? 귀족이라며?"
"귀족이면서 창녀지."
복잡하진 않지만 복잡하게 느껴지는 일라이의 대답.
레피나는 허탈한 얼굴로 웃었다.
"그랬었구나. 그래도 뭔 향수를 그리 뿌리는지…어으."
"그래도 얼마나 예쁘냐? 햐아, 창녀할만 하지."
"미친…그럼 너는 평생 창녀나 끼고 살아라."
"거 참, 말 좀 예쁘게 해라."
"응, 쓰레기."
"너!"
안개가 아까보다 더 걷혀 있었다.
간만에 시야가 탁 트여서 기분이 좋은 두 사람.
둘은 숙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는 도중에 마을우물에서 식수를 보충하고 있는 촌장이 보였다.
일라이가 가볍게 인사하자 촌장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왕자님. 아, 그리고 공주님이시군요!"
"흥."
레피나가 코웃음을 치자 촌장은 인자하게 웃었다.
그때 일라이가 물었다.
"아까 뭔가 울리는 소리 못 들었어?"
"아, 들었습니다."
"그거 대체 뭔 소리야? 몬스터 같은데."
"몬스터? 아…실은 저 산에 사는 환수입니다."
환수라는 말에 일라이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환수.
환상의 시대에서부터 살아온 짐승들이자, 현재의 드래건에 맞먹을 만큼 오래된 몬스터들.
그게 이 근처에 있다는 것일까?
"환수?"
"아마 환수에 대해 들어보셨을 겁니다.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환수는 '기린'이죠? 아무튼 저 산은 '유계산'이라는 곳입니다. 정기가 맑고 순수한 곳이죠."
"저기에 환수가 산다고?"
"네, 하지만 딱히 저희에게 해를 끼치진 않습니다. 환수치고 온순하기도 하고요. 이름이 뭐였더라……."
"그렇군. 그 정도면 됐어."
촌장의 어깨를 다독이며 일라이는 레피나와 함께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은 여러 가지를 알아낸 것 같았다.
다만 살인사건이 걸렸다.
언제쯤이면단서가 나올까?
부디 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일라이는 근처에 있던 비스킷으로 손을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