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의문의 사건
테아와의 섹스를 마치고 내려온 일라이.
그때 누가 찾아왔는지 문이 열려 있었다.
일라이를 대신해서 손님을 맞이한 건 레피나였다.
"일라이……."
"음? 무슨 일이야? 어라, 촌장."
바로 촌장이었다.
그는 처음 보는 중년 남자와 함께 집에 찾아온 것이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그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낸 사람답게 침착할 줄 알았는데.
일라이가 다가오자 촌장이 급히 입을 열었다.
"큰일났습니다. 오늘 우유를 구하려고 목장을 운영하던 장씨에게 가봤습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목장에 남은 젖소라고는 2마리라지만, 그래도 애정을 가지고 키우며 지키던 사람입니다. 이런 성실한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디 이웃마을에라도 간 거 아니야?"
말하고서도 일라이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이런 상황에서 담대하게 이웃마을로 갈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갈 수 있겠지만, 그럴 거면 배를 타고 가는 게 나을 것이다.
그때 촌장 곁에 있던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장씨 맞은편에 사는 이웃입니다. 촌장님이 하도 헤매셔서 같이 장씨를 찾다가 이상한 흔적을 봤습니다."
"흔적?"
어째 얘기가 조금씩 심각해지는 것 같았다.
만약 가볍게 어디 떠난 거라면 그럴 수는 있다.
가망성없는 마을에 남아있느니, 스스로 꿈을 찾아 떠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어쨌든 세상은 멸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일은 경우가 달랐다.
"네, 장씨가 자주 앉던 목장 근처 벤치에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이게 장씨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침만 되면 장씨는 항상 거기 앉아서 명상을 하고는 합니다."
"피……?"
일라이는 표정을 찌푸렸다.
근처에서 듣고 있던 여자들 역시 심각한 분위기에 편승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피라니?
물론 현재 유계는 무법 마을이나 다름없다.
자경단도 없으며, 도적들이 아무때나 들어와서 사람을 죽여도 모를 정도다.
하지만 그런 일을 당연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장씨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았나 걱정입니다. 왕자님께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 온 겁니다."
촌장이 슬픔이 담긴 눈으로 말했다.
일라이가 깊게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었다.
이건 실종사건이 아니라 살인사건으로 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앞뒤가 맞지 않았다.
"우선 조사를 해봐야겠군. 음…촌장, 한 1분만 기다려. 동료들이랑 상의 좀 할 테니."
"네, 그러시죠."
문을 닫고 일라이는 여자들을 둘러봤다.
레피나가 일라이의 팔을 치며 말했다.
"얼른 가 봐. 우리가 집 보고 있을게."
"그나저나 무섭네. 하필 근처에서 살인사건이라니."
"피의 흔적이라…불길해."
"지금 나는 큰 도움이 안 될 거야. 이런 일에 유능한 사람을 생각해 봐."
여러 명이 불길함을 토로했다.
특히 마지막에 유리엣은 아쉬운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선 일라이는 쉬고 있는 여자들 중에서 한 명을 떠올렸다.
그녀를 바로 소환했다.
"레스."
"내 도움이 필요하지?"
푹 쉰 듯한 얼굴로 레스레모나가 나타났다.
일라이는 우선 레스레모나와 함께 조사를 할 예정이었다.
다른 누구보다 네이처 가드였던 그녀라면 안개 따위 큰 문제가 안 될 것이다.
수색에도 유능할 것 같았다.
끼이익- 텅-
"촌장, 장씨의 집이 어디지?"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촌장은 벌써 집에 갔는지 이웃이 남아 있었다.
이웃의 안내를 받아 일라이와 레스레모나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걸었다.
오늘따라 안개가 더욱 서늘하게 느껴졌다.
"얘기는 다 들었다. 좋지 않은 일이군."
레스레모나가 입을 열었다.
한숨 섞인 목소리로 일라이가 대답했다.
"그냥 실종이면 좋을 텐데. 하필 핏자국이라니. 도적이 또 온 걸까?"
"도적이 왔다면 고작 사람하나 잡아가진 않겠지."
"그렇다면 몬스터의 소행일 수 있겠군."
"자세한 건 가보면 단서라도 나올 것이다."
일라이와 레스레모나는 침착하게 대화를 나눴다.
장씨의 집은 멀리 있지 않았다.
촌장이 한 말대로 근처에는 농장이 있었다.
주인을 잃은 젖소 2마리가 외로이 주저앉아 있었다.
이제 저 둘의 운명도 풍전등화였다.
"여깁니다."
"벤치가 여기 있군. 여기서 목장까지는 고작해야 20걸음 정도."
일라이는 먼저 벤치로 갔다.
레스레모나 역시 주변을 경계하며 벤치로 향했다.
벤치에는 길게 핏자국이 늘어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만져 보니 뿌려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일라이는 턱을 쓸며 고민했다.
'이런 습한 곳에서 피가 여전히 따뜻하게 묻어 있어. 시간은얼마 지나지 않았다.'
'도적의 소행은 아니야. 고작 사람 하나 잡으려고 여길 다시 와? 그 머릿수로? 비효율적이야.'
'그럼 몬스터인가? 아니면 근처를 우연히 지나던부랑자가 인육을 먹으려고 사람을? 역시 추측일 뿐이야.'
'내부인의 소행은? 촌장이나 이웃이 범인이라면 어떻게 하지?'
우선 일라이는 이웃에게 물었다.
"하나 묻지."
"그러시죠."
이웃이 짙은 갈색 머리칼을 쓸며 대답했다.
일라이가 입을 열었다.
"혹시 여기 있는 마을 생존자들…각자 식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나?"
"넉넉할 겁니다. 여긴 원래 곡창지대가 근처에 있었거든요. 강가에 물레방아 말고도 조금 더 멀리 가면 풍차들도 많습니다."
"오, 그래? 망할 안개 때문에 그걸 못 봤네."
"그리고 다들 성실하고 착한 사람들입니다. 외부인의 유입이 거의 없고, 다들 전과조차 없는 사람들입니다."
일라이에게 필요한 걸 모두 말해주는 이웃.
적어도 멍청하지도 않고, 오히려 눈치가 빠른 편인 것 같았다.
다시 일라이가 고민을 하려 할 때 레스레모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상한데."
"왜?"
"흔적을 못 찾겠다. 원래 누군가가 피를 흘리면 그 핏방울이 사라진 곳을 향해서 간헐적으로 나있거든. 그런데 그게 없어."
벌써 근처를 둘러본 레스레모나가 한숨을 쉬었다.
말없이 있던 일라이가 허공을 바라봤다.
"날개를 가진 몬스터가 하늘을 통해서 날아갔다면?"
"그러고 보면 비명은 들리지 않았나?"
레스레모나의 질문에 이웃은 고개를 저었다.
비명은 없었다.
장씨라는 사람이 그 일을 당했다면, 그게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라면 비명을 지르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몬스터는 철두철미하지 않아. 그놈들은 사악할지 몰라도, 철저하게 인간의 파괴를 목적으로 움직이는 놈들이야."
"그렇지."
"그런 놈들이 인간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고, 비명을 못 지르게 막은 다음 하늘로 데려가서 공사를 친다? 말이 안 돼."
이번 소행이 몬스터라는 것도 보기 어렵게 됐다.
지켜보던 이웃이 의견을 냈다.
"비명을 못 지를 만큼 순식간에 당한 것 아닐까요?"
"아마 그랬겠지. 근데 그 정도의 피해를 받을 거라면 근처가 피바다가 됐을 거야. 고작 이 정도 피 흘리고 아무 비명도 없이 죽어버렸다? 이상해. 근처에 난리를 치거나, 범인의 흔적을 알려줄 단서조차 없잖아."
일라이의 말대로 근처는 깔끔했다.
오히려 누가 놀리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핏자국만 벤치에 나있을 뿐이었다.
원래 이런 사건이라면 주변에 단서가 분명히 존재하는 법이다.
무엇보다 네이처 가드인 레스레모나조차 잡지 못하는 것이라면 단서는 없다고 보는 편이 좋다.
하지만 이게 정상일까?
"정말 이상한데……."
말 그대로 하늘로 솟은 것 마냥 사라진 체였다.
그나마 핏자국이라는 흔적이 있지만, 이것만으로 모든 것을 할수는 없었다.
핏자국을 내려다보며 일라이가 생각에 잠겼다.
'이럴 때 심령술이나 사령술을 할 수 있는 사람만 있다면…좋을 텐데.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멸망을 맞이한 시대다.
사람 하나 죽는다 해서 그게 큰 의미를 갖지는 못한다.
다만 특정 공동체에게는 비보가 될 지도 모르리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일라이가 이웃에게 말했다.
"저 젖소들은 훌륭한 자원이야. 맡아줄 사람 없겠나?"
"제가 맡겠습니다. 저대로 놔두기엔 가여운 녀석들이니까요."
"그러도록 해. 아무튼 단서가 너무 적어. 이것만으로는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어. 그저…돌아올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져보자고."
"네, 알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의미없고 멍청한 말, 희망.
그걸 자기 입으로 말한 일라이는 저절로 벌레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이런 세상에서 무슨 희망을 가지란 말인가?
오늘은 이웃이, 내일은 내가 사라질지도 모를 현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희망을 가진들 무슨 의미일까?
그래도 이웃은 사람좋게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후우……."
"일라이, 아무리 생각해도 단서가 없다는 게 수상해."
"그러게. 무엇보다 그 단서를 지우려고 아둥바둥댄 흔적조차 없어. 말 그대로 단서가 없도록 범인이 판을 짠 거지."
"조금 무서운 걸. 그럼 최면술같은 걸 쓴 걸까?"
"최면이라…환상마법 같은 걸 써서 사람을 낚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럼 피는 왜 있는 거지?"
"글쎄…범인이 일부러 피해자의 몸을 그었다거나?"
되도록이면 추리를 하지 않고 실증주의를 펼치는 레스레모나였지만 이번에는 무리였다.
일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단서가 너무 없어. 제기랄, 생존자도 몇 없는 곳인데. 더 흉흉해지겠구만."
"그저 살아 돌아오기를 바랄 수밖에."
"돌아가자고. 이러다 안개가 더 짙어지겠어."
"응."
둘은 다시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와중에 많은 생각을 했지만, 뾰족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라이는 왜 벤치에 피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피해자가분명 어떤 공격에 당했기 때문에 피를 흘렸을 것이다.
그럼 그 공격을 맞고 그대로 기절한 걸까?
'원거리에서 마법이나 화살 같은 것에 맞아 기절? 그러고 나서 범인이 소리 소문없이 데려갔다? 아니야, 레스가 분명 그랬어. 흔적이 없다고.'
일라이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범인은 환상마법에 특화된 마법사라는 것.
평소에 허공을 떠다니며, 역시 원한이 있다거나 필요에 의해 장씨에게 실력행사를 했다.
그러다가 장씨의 몸을 마법을 이용해 들어올리며 어디론가 가지고 사라진 것이다.
'지금으로써는 이런 결론밖에 낼 수 없겠군. 씨발, 머리 복잡하네.'
스스로 탐정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일라이는 쇼파에 앉아서 벽난로를 바라봤다.
장작이 멋지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일이 더 없어야 할 텐데."
"하아…꿀꿀하구만."
두 손을 깍지끼고 뒤통수에 대며 일라이가 말했다.
그런 일라이를 말없이 바라보던 레피나가 우물쭈물댔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솔직하지 못한 그녀 성격에 바로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쳇, 바보 일라이. 뭘 저렇게 있어?'
원한다면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번 사건에 본인 역시 관심이 많기에 여러 의견을 내고 싶었다.
이 정도로 철두철미한 범인이라면 의외의 인물인 경우가 있으니까.
심지어 레피나는 추리소설을 좋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일라이에게 다가가야 했다.
'어머, 공주님. 주저하고 계셔!'
그런 레피나를 지켜보던 리비카가 싱긋 웃었다.
그녀는 레피나를 도와줄 겸 언질을 줬다.
"왕자님은 지금여기 계시면 안 돼요."
"응?"
"공주님, 그렇잖아요? 왕자님은 항상 바깥 바람을 쐬면서 힘을 충전하는 스타일이라고요."
"그, 그렇겠지? 역시 그렇지?"
힘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비카.
레피나는 자신감을 가지고 일라이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발 끝으로 일라이의 다리를 차며 말했다.
"야, 나 산책가고 싶어."
"그런데?"
"같이 가자고! 하여간 왕자라는 인간이 멋대가리가 없어."
"…내가 왜 너한테 그런 얘기를 들어야하는데?"
"아무튼 따라 와. 나를 에스코트할 기회를 주지."
"나 방금 돌아…야, 잠깐! 아오, 저거."
레피나가 멋대로 나가버리자 일라이가 급히 따라갔다.
이런 곳에서 레피나 혼자 나가게 하는 건 자살행위였다.
급히 레피나를 따라가는 일라이를 보며 리비카가 흐뭇하게 웃었다.
부디 좋은 시간을 보내고 오기를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