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창부이자 귀족
오랜만에 루밀다와 단 둘이서 마을을 배회하는 일라이.
안개로 자욱한 이곳이 익숙치 않은지 루밀다가 물었다.
"이러다가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상관없어."
"응?"
"내가 다 해결할 거니까."
세계 최고의 자신감이 느껴지는 발언.
루밀다는 멍하니 일라이를 바라보다가 웃어버렸다.
지금까지 2번 죽었던가.
그럼에도 자신감이 흘러 넘쳤다.
뒷짐을 지며 루밀다가 말했다.
"일라이, 너 앞으로도 죽고 싶어?"
"뭐? 미쳤어? 죽을 때 얼마나 기분이 더러운 지 알아?"
농담이라도 하지 말라는 듯 일라이가 성을 냈다.
그러든지 말든지 루밀다는 짓궂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2번이나 죽었으면 적응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적응한 줄 알고."
"루밀다, 너는 모르겠지. 하지만 죽음이란 건 적응할 수 없어."
좀 더 걷던 일라이가 말을 이었다.
"사람이란, 아니, 굳이 사람이 아니라도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그대로 살아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야."
"그건 그래. 나도 세상 이렇게 되고 나서 살고 싶었지."
"그래서 그런 집에 있었던 거고?"
"거긴 영업하기도 편하거든."
자기 가랑이 사이를 가리키며 피식 웃는 루밀다.
일라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일리있는 말이었다.
유계 특유의 공기를 맡으며 둘은 좀 더 걸었다.
그러다가 어떤 곳에 도착했다.
"또 방향을 잃었네."
일라이가투정을 부렸다.
옆에서 같이 보고 있던 루밀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느 저택이었다.
마치 영주성을 방불케 하듯 높은 담, 두꺼운 철문, 그리고 다 죽어가는 정원.
버려진 저택 같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아마 도적들이 왔어도 이런 곳에는 감히 접근도 못 했을 것이다.
"이런 철의 요새가 있었군."
관심을 가지는 일라이.
루밀다는 일라이의 팔을 잡고 말했다.
"그냥 돌아가자."
"음? 왜?"
"그냥…느낌이 좋지 않아."
낯설어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녀 역시 엘프.
무려 일라이 일행 중에서 가장 잠재력이 높은 순혈 엘프였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나올 정도면 조금은 미심 쩍은 부분이 있을것이다.
"그래도 뭐가 있을지 궁금하잖아?"
"뭔가 꺼려져."
"그럼 여기서 기다려. 조금 보고 올게."
"읏, 무슨 소리야?"
안개가 자욱한 이곳에 혼자 남는다.
그건 곧 소리 소문 없이 죽어도 답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게 싫었기에 루밀다는 일라이를 따랐다.
적어도 반항도 못 하고 죽는 것 보다, 차라리 일라이를 따라 모험하는 게 나으니까.
끼이이익- 처억-
철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니 음산함이 더해졌다.
죽어서 생기를 잃은 화초들이 보였다.
그저 잡초들에게 영역을 내주며 스러져가고 있었다.
"관리 좀 하지."
일라이가 핀잔을 주며 앞으로나아갔다.
정원은 제법 넓었다.
곧게 만들어진 길을 따라 가면 바로 저택 앞이었다.
따지고 보면 저 철문만 지나면 이후부터는일사천리였다.
다만 저렇게 높은 담벼락과 견고한 철문을 넘을 수는 없다.
인간을 뛰어넘은 경지가 아니라면.
"노크해볼까?"
"역시 그냥 가자."
두려워 하는 루밀다.
분위기가 제법 음산해서 일라이 역시 미묘한 감정이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지레 겁 먹고 내빼기는 싫었다.
마을에 있다는 유일한 귀족.
도망귀족이라면 왕족으로서 얘기를 나눠볼 의무가 있었다.
'그들은 잠재적 위협이니까.'
도망귀족은 대체적으로 죄를 지어서 도망친 자들이다.
그런 자가 있는 곳에서 잠시라도 살겠다면 이러는 게 맞았다.
루밀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일라이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 분위기 좋아 보여."
"뭐? 무슨 소리를……."
"여기서 몰래 섹스하면 아무도 모를 거 아니야?"
"흐응, 하여간 색골이라니까."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리는 루밀다.
본인 역시 좋으면서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한없이 음란한 몸을 가진 주제에.
피식 웃으며 일라이는 노크를 했다.
텅텅텅-!
분명 작게 노크를 한 건데, 대문의 속이 빈 건지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 탓에 일라이도, 루밀다도 놀라고 말았다.
"소리가 왜 이렇게 커?"
"으,북소리인 줄 알았네."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일라이는 한 번 더 노크해보기로 했다.
그 귀족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궁금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인원은 어디에 있는지도 물어보려 했다.
"없나?"
"또 마을을 나간 거 아니야?"
팔짱을 끼며 루밀다가 물었다.
하지만 일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문이 저렇게 열려 있는 거면있을 거야. 도적이 또 올지도 모르는데 저렇게 해두겠어?"
"그건 그래."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문이 슬쩍 열렸다.
드디어 도망귀족을 만난다는 사실에 일라이는 짐짓 엄중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나라가 무너졌어도 왕족은 왕족이기 때문이다.
"누구시죠……?"
"나는 왕국의 왕자였…이런."
일라이는 자기 소개를 하려다가 나온 사람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아래로 갈수록 짙어지는 긴 금발, 오똑한 코와 동안, 주황색 눈동자, 그리고 온몸을 감싸고 있는 붉은색 드레스.
그야말로 우아함의 정점이며 동시에 루밀다의 퇴폐미까지 느껴지는 여성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엘프였다.
뾰족한 귀와 조금 창백한 얼굴이 특징이었다.
"네?"
"아, 나는 한때 왕국의 왕자였던 일라이라고 한다. 그대에게 관심이 있어 와봤지."
"그렇군요, 왕자님. 저는 '미스레아'라고 합니다. 성은……."
"됐어, 자기 임지를 벗어난 귀족에게 성은 의미가 없지."
이미 알고 있지만 듣지 않는 일라이.
미스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루밀다를 바라봤다.
항상 퇴폐적이면서도 당당하던 루밀다의 얼굴이 심각해 보였다.
신경 쓰지 않고 미스레아는 문을 좀 더 열었다.
그리고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들어오시죠?"
"그럼……."
그때 루밀다가 일라이의 소매를 보이지 않게 잡아끌었다.
루밀다의 행동에 일라이는 내색하지 않고 턱을 괴었다.
그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기야 오랫동안 관리가 안 됐으니 음산하다고 해두자. 그런데 루밀다는 왜 이러는 거지?'
'돌아가서 말을 들어보자. 미스레아가 보는 앞에서 아웅다웅하는 건 자칫 안 좋게 보일 거야.'
'아쉽다. 저 붉은 드레스에 감춰진 가슴이 궁금했는데.'
루밀다와는 다르게미스레아는 가슴마저 D컵이었다.
충분히 손에 잡히면서 말랑말랑하게 남심을 휘어잡을 가슴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귀족.
예법을 알면서도 억눌러왔던 성욕 역시 있을 터였다.
여러모로 아쉽지만 일라이는 사양했다.
"오늘은 단지 그냥 알아보려고 온 것 뿐이야. 어쨌든 혼자서 지내나?"
"네, 그렇습니다."
미스레아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라이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가족들은?"
"모두…당했습니다."
"그렇군. 그런 세상이니까. 그럼 다음에 또 와도 될까?"
일라이의 질문에 미스레아는 순간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일라이 같은 남자를 기다렸다는 듯 보였다.
손 끝으로 문을 살살 긁으며미스레아가 대답했다.
"물론이죠, 왕자님."
"좋아, 그럼 잘 지내기를."
루밀다를 데리고 속히 저택을 나서는 일라이.
뒤에서 느껴지는 미스레아의 시선에도 일라이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당장 저 여자를 쓰러트리고 덮치고 싶었다.
따지고 보면 요즘 항상 보던 얼굴 말고는 뉴페이스가 없지 않았나?
끼이익- 텅-!
철문을 닫고 나온 일라이가 루밀다에게 물었다.
"왜 그런 건데?"
"저 여자 귀족이 맞는 거야?"
"왕성에서 귀족들 많이 봤는데, 사소한 움직임으로도 평민과 귀족을 구분할 수 있어. 저 여자가 보인모습은 귀족의 것이 맞아."
"평민이 따라할 가능성은?"
"진짜 오랫동안 노력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지. 왜?"
"…저 여자한테서 동업자의 냄새가 났어."
예상치 못한 루밀다의 말에 일라이가 표정을 찌푸렸다.
그는 머리를 살짝 쥐어 뜯으며 저택을 바라보았다.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럼 미스레아가 창녀라는 것일까?
"그녀가 창녀라고?"
"그래, 그런데그 냄새가 너무 짙었어. 아마 마약까지 하면서 일을 하는 것 같은데. 그런 건 가까이해서 좋을 게 못 돼."
"어이가 없군. 이제 막 집에 돌아온 도망귀족이 실은 창녀였다니. 이게 뭐야?"
"아무튼 얼른 가자. 저 여자 마음에 안 들어."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의견을 내놓는루밀다.
배신당한 느낌에 일라이는 허탈해 있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슬쩍 저택을 돌아봤다.
그토록 우아하고 아름다웠던 미스레아가 창녀였다니.
창부이자 귀족인 미스레아.
'대체 뭐하는 여자야? 더 궁금해지잖아!'
결국 일라이의 호기심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한숨을 쉬며 일라이는 루밀다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자그마한 체구가 오늘따라 더 왜소해 보였다.
어딘가 자신감이 결여된 모습 같기도 했다.
"루밀다, 기운 없어 보여."
"우리 창녀들 사이에서도 급이 나뉘어. 특정 마니아들을 제쳐두면 결국 가슴 크고 기럭지가 좋은 여자가 급이 높아."
루밀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일라이는 웃어버렸다.
아마 미스레아의 우월한 체격에 놀란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루밀다는 음란함은 대단하지만, 결국 몸은 로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라이는 루밀다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런 걸로 주눅들지마."
"주눅든 거 아니거든!"
"그럼 됐어. 나한테는네가 더 화끈한 여자니까."
일라이가 가볍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루밀다는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더없이 아름다운 여자를 봤으면서 결국 자신을 인정해준 것이다.
간만에 아랫도리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루밀다는 일라이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