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6화 〉안개낀 항구마을, 유계 (56/100)



〈 56화 〉안개낀 항구마을, 유계

새벽녘에 가까워져서야 간신히 유계에 도착한 일라이 일행.
이곳은 에레스트 대륙에서 3번째로 규모가 큰 '청홍강'을 끼고 있었다.
그래서 딱히 바다에 인접한 것도 아닌데 항구마을이라 불리기도 했다.
워낙 물이 흔한 곳이라 일라이 일행은 천천히 말을 걷게 했다.
세지에게 귓속말을 하며 일라이가 주변을 둘러봤다.

"천천히 걸어. 그러다가 수상한 게 있으면 방향을 틀고."
"그러지."

안개가 자욱하게 껴서 앞뒤 분간이 어려웠다.
일라이는 일행끼리 짧은 거리를 두고 같이 걷게 했다.
그리고 함부로 랜턴을 켜지 않았다.
만약 랜턴을 켰다가 저격을 당할  있기 때문이다.

"너무 으스스한데?"

아넬이 아예 일라이 뒤에 숨은 채로 말했다.
설마 여기에서도 습격이 벌어진다면 정말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다.
잠도 제대로  자고 달려온 셈이라 일행이 느끼는 피로는 엄청났다.

"조금만 기다…엇, 저건 뭐지?"


근처에 물소리가 들렸다.
아마 강에 인접해서 물레방아를 설치한 것 같았다.
천천히 걸어가니 물소리가 나는 물레방아가 나타났다.
혼자서 덩그러니 있는 것 같아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
 먼 곳으로 시선을 옮긴 일라이가 뺨을 긁었다.
희미하게 나마 항구가 보였다.

"배가 있으면 좋을 텐데."
"글쎄, 그것도 도박 아닌가?"

아넬이 조심하라는 듯 일라이의 등을 긁었다.
그러나 일라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섬은 안전할지도 모르잖아."
"아무리 섬이라도 드래건을 막을 수는 없지."


지적하듯 레피나가 말했다.
일라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그는 배를 한 번 타보고싶었다.
이번 기회에 타볼 수만 있다면 좋을 것이다.


"없군."

물레방아를 지나 항구에 도착했지만 보이는 배는 없었다.
혹시 몰라 마을 곳곳을 살펴보기로 했다.
주변에 물이 많은 곳이라 안개가 더욱 자욱해지는 것 같았다.


"아, 망할 안개."
"전부 얼려버릴까?"

유리엣이 무서운 소리를 하자 일라이가 고개를 저었다.
섣불리 먼저 움직이면 당할 수 있다.
이럴 때는 있는 듯 없는  조용히 움직이는 게 나았다.
서서히 마을의 중심부에 들어설 때였다.
유독 커 보이는 건물을 지나려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엇!"

리비카가 놀라며 말고삐를 당겼다.
그러자 말이 우렁차게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이미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노인이었다.
그는 깊은 눈매로 이방인들을 훑어보며 물었다.

"누구시오? 혹여 이곳에또 난리를 치러  거라면 나도 죽여주시구려."
"혹시 이곳의 촌장인가?"
"그렇소만."

촌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일라이가 세지에서 내렸다.
그리고 최소한의 예를 갖추며 말했다.


"한때 왕국의 왕자였던 일라이 브류스터드다. 이곳에  묵어 갈까 하는데."
"오오, 왕자님? 설마 왕자님을 보게 될 줄이야!"


촌장이 급히 무릎을 꿇으려 하자 일라이가 막았다.
그는 익살스럽게 웃었다.


"무릎도 안 좋을 텐데,  하려고?"
"그게 예를……."
"이미 나라는 무너졌어. 예는 개뿔, 우리 좀 쉬어가게 해주쇼."


가볍게 말하는 일라이.
촌장은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급히 일라이 일행을 대접하려 했다.
집에 들어가던 그는 그나마 보존해놓은과일들을 내놨다.


"이거라도 드십시오! 그리고 저희 마을은 최근에 도적들에게 습격을 당해서 빈 집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죽었겠군."

과일을 받아들며 일라이가 말했다.
그러자 촌장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흔한 일이죠. 나라가 무너지고, 세상이 멸망한다는 얘기가 허다합니다. 결국 이렇게 됐군요."
"우리가 묵는 동안에는 이곳을 지켜주지."
"망극하옵니다."
"글쎄, 그런  갖추지 말라니까."
"먼저 쉴 곳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촌장은 지팡이를 짚고 나오며 안내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인원수에 놀라고, 켄타우르스인 세지를 보며 다시 놀랐다.
살면서 별 것을 다 본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세지가 싱긋 웃으며 악수를 건네니 촌장은 힘겹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의 집 만큼이나 큰 곳으로 안내했다.

"이곳은 제 아들내외가 살던 집입니다."
"음…명복을 빌지."
"죽지 않았습니다. 배를 타고 외부로 도움을 요청하러 갔습니다."
"프흐흡!"


멀쩡한 사람 고인으로 만든 셈이 된 일라이.
아넬이 손으로 입을 막으며 웃음을 막았다.
하지만 결국 터지고 말았다.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일라이가 사과했다.

"그, 미안."
"아뇨, 그런 말씀은…아무튼 이곳에서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마침내 쉴 곳을 배정받은 일라이 일행은 편히 쉴  있었다.
집 자체가 얼마나 크면 마굿간까지 달려 있었다.
여자들을  안으로 보내며 일라이가 촌장과 함께 나왔다.


"물어볼  있는데."
"그러시죠."
"여기  없나? 가능하면 나도 배를 탈까 하는데."

일라이가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촌장은 새하얗게  눈썹을 만지작거렸다.

"안타깝게도 여분이 없습니다. 기술자들 역시 도적들의 습격으로 죽어버려서……."
"그래? 제길, 생존자들이 적겠군?"
"자기 집에 숨어 쥐죽은 듯 지내는 이들이 30명쯤 됩니다. 아마 찾으려 해도 힘드실 겁니다."
"됐어, 그렇게 살게 내버려 둬야지. 그럼  아들 내외말인데. 언제 나간 거지?"
"아마 세상이 이렇게 됐을 때 나간 걸로 압니다. 그 뒤에 바로 도적들이 찾아왔죠."
"용케 살았군."
"이웃 마을 촌장을 보러 갔습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하려고요."

촌장이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마을에 대해서 누구보다 신경 쓰는 직책이니 어쩔  없었다.
그렇다고 목숨을 걸고 이웃마을로 간 셈이라 그의 헌신을 알아볼 수 있었다.
진심으로 그를 칭찬하며 일라이가 말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하하하, 그래도 도적들이 오고 나서 기쁜 일도 있답니다."
"그래? 뭔데?"
"저희 마을에는 특이하게도 귀족 내외가 사는 저택 하나가 있습니다. 항상 비어 있다가 이번에 귀족분이 한  돌아오셨죠. 조만간원조를 받아보려 합니다."

신기한 일이었다.
대개 유계처럼 규모가 작은 마을에는 귀족들이 살지 않는다.
산다 해도 유망한 귀족이 아니라면 영지로 격상조차 되지 않는다.
수도에서 죄를 짓고 좌천되거나, 도망나온 귀족이라면 충분히 살 만한 곳이긴 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뼛속까지 오만한 족속들이다.
그들이 고작 이런 작은 마을에서 만족하며  수는 없었다.

'귀족이 있다고? 이런 작은 곳에? 돌아온 건 명?'

여러모로 이상했다.
일라이는 촌장의 집으로 향하며 계속 질문했다.

"그 귀족의 이름은?"
"아하…아마 '블럿' 가문일 겁니다."
"블럿이라……처음 들어보는 가문인데."

아마 왕족인 자신이 알지 못한다면 중소규모의 귀족가문일 가능성이 크다.
 정도의 귀족이라면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역시 들어본 적이 전무하기에 괜히 걱정이 앞섰다.
부디 악덕 귀족만 아니기를 바라며 일라이는 촌장과 헤어졌다.


"하여간 안개가 조온나게 많다. 불을 피울 수도 없고."


불을 피운다면 도적이나 몬스터들이 올지도 모른다.
이 안개는 이를 테면 양날의 검이었다.
시야를 가리기도 하지만, 그건 외부에서 오는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촌장과의 문답에서 여러 가지를 알아낸 일라이는 아쉬음을 표했다.
특히 배를 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아,    타보고싶었는데. 이런 작은 항구마을이라도 큰  정도는 만들 수 있을 텐데. 도적 개새끼들……."


이제는 자리에 없는 도적들을 욕하며 일라이는 근처를 떠돌았다.
어쩌다 보니 안개 때문에 길을 잃었다.
스스로를 자책하며 일라이는 바쁘게 움직였다.
왕자나 되는 사람이 여기서 길을 잃는다면 그것도 우스울 것이다.

"그래도 가끔 들리는 물소리가 좋네."

부엉- 부어엉-

"부엉이 소리도 좋구만. 이 시간에 부엉이라니."


느긋하게 걷던 일라이가 걸음을 멈췄다.
잠깐이었지만 부엉이 소리가 어딘가 인위적으로 들렸다.
기분탓으로 돌리려던 그때, 자신을 향해 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스읍- 타타타탓-!

"쯧."

아군일지도 모르기에 일라이는 그리메를 빼들며 옆으로 피했다.
그 순간 온 몸을 새까만 옷에 감싸고 있던 자가 나타나며 스쳐 지나갔다.
일라이는 급히 그를 뒤쫓으며 그리메를 휘둘렀다.


후욱- 화악-!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렇다는  부엉이 소리를 내던 자가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갑작스런 적의 등장이라 일라이는 긴장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안개가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부엉- 부엉-!

"아주 지랄을 하네.부엉이 소리내는 암살자라니!"


욕이라도 한바탕 해주고 싶었다.
그때 일라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다시 달려드는 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구르던 일라이가 감각적으로 자신이 있던 곳으로 다시 뛰었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 송곳]


"끼익, 키헤에!"

직감을 믿고 내지른 검격.
거기에 적중당한 무언가가 처절하게 신음을 흘렸다.
자세히 보니 예전에 야신주에서 봤던 사마귀를 닮은 암살자와 비슷해 보였다.
다만 지금 이 암살자는 사마귀가 아닌 부엉이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어으, 극혐!"

일라이가 프론트 킥으로 걷어차며 거리를 뒀다.
그러자 서서히 확보되는 시야 속에서 부엉이 암살자가 본격적으로 무기를 들었다.
해적들이 쓸 법한 커틀라스와 휴대용으로 개조된 권총 형태의 머스켓이었다.


"부우!"


부엉이 암살자가 앞으로 다가서며 커틀라스를 내질렀다.
일라이가피하며 측면을 노리려  때, 부엉이가 갑자기 총을 들었다.

철컥- 타앙-!

정적을 깨는 총소리가 그대로 울려퍼졌다.
일라이는 상체를 비틀며 피하고는 한 바퀴돌았다.
그리고 있는힘껏 그리메를 휘둘렀다.
부엉이 암살자는 커틀라스를 들어 막아내려다가 뒤로 물러났다.
자세가 무너진 암살자를 향해 일라이가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추수]

물 흐르듯 검을 내지르는 일라이.
그때 암살자가 커틀라스를 교묘하게 비틀며 일라이의 그리메를 튕겨냈다.
그리고 다시 사격.

타앙-!

"그럼 안 돼!"


일라이가 때맞춰 권총을  암살자의 손목을 쳐냈다.
총알이 간발의 차로 비껴가자 암살자는 재차 커틀라스를 휘둘렀다.
날렵하게 자리에서 벗어난 일라이가 빠르게 움직였다.
암살자 역시 춤 추듯 움직이며 합을 맞췄다.

'해적처럼 싸우네. 하지만 공격후 사격 솜씨를 보면 경험을 제법 지닌 놈이야.'


근접 공격과 함께 타이밍을 빼앗는 사격.
이것만 하더라도 통상적으로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중요한 건 스펙의 차이였다.


"하앗!"

일라이가 빠르게 달려오다가 상체를 내밀었다.
기다렸다는 듯 커틀라스를 사선으로 휘두르는 암살자.
그러나 일라이는 마저 다가가지 않고 암살자를 지켜보더니 그리메를 들었다.
공격 타이밍을 빼앗기 위해 암살자가 다시 머스켓의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타아앙-!

처절한 소리와 함께 일라이는 사라졌다.
총에 당한 것이 아니라, 재빨리 정면으로 구른 것이었다.
재빨리 일어나며 암살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 피바라기]

마저 있던 안개가 전부 사라질 만큼 엄청난 연속 찌르기!
암살자는 당황하며 커틀라스를 들어 막으려다가 벌집이 되고 말았다.
일라이의 압도적인연속 찌르기에 제대로 대처를 못하고 당해버린 것이다.
커틀라스를 제외한 암살자의 상체가 전부 뜯어지거나, 찢겨나가며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 처참한 몰골은 맨 정신으로 못 볼 것이었다.

쿠화악- 털썩-


일라이에게 당하며 쓰러지는 암살자.
그가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일라이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제야 길이 제대로 보였다.
그리메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일라이가 말했다.

"다음 생에는 애완부엉이로 태어나거라."

여유있게 말을 남기며 일라이는 숙소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준비운동하는 건 이제 질린다.
이제 마음  놓고 잠을 청할 때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