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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화 〉생존자 발견! 그런데 외계인 히로인? (54/100)



〈 54화 〉생존자 발견! 그런데 외계인 히로인?

다시 여관에 돌아와서 초저녁을 맞은 일라이.
그는 한숨을 쉬며 잠에서 깨었다.
그다지 짧게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몸이 피곤했다.


"제기랄, 지하도가 자꾸 신경 쓰이네."


그럭저럭 씻으며 정신을 차리던 일라이는 창문을 열었다.
생각보다 매끄럽게 열려서 놀라웠다.
창문을 열자마다 싸늘한 기운이 들어왔다.
이 시간에도 주변에 안개가 끼어 있었다.

"사시사철 안개냐?"

혀를 차며 방을 나서는 일라이.
정찰 다녀오고 나서 묘하게 몸이 피곤했다.
쓸데없이 신경을 써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느긋하게 내려가며 모두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
"잠꾸러기 왕자님, 이제 일어나셨어?"

레피나가 리비카와 함께 식사를 준비하며 피식 웃었다.
한때 공주였던 그녀가 지금은 시녀와 함께 식사를 준비한다니.
재미있으면서도 놀라운 상황이었다.

"아무 일 없었지?"
"그럼. 세지도 잘 자고 있고."


벽에 기댄 채로 자고 있는 세지가 보였다.
대답을 마친 아넬은 자연스럽게 날아다니다가 일라이의 어깨에 앉았다.
그리고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조금 피곤한 얼굴이네?"
"어으, 몰라. 지하도가 자꾸 신경 쓰여서 그런가? 자도 피곤해."
"거기 기사 말고는 없었다며?"
"사실  둘러보지 못했어. 이상하게 계속 있으면 안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


잠겨가는 목을 겨우 푸는 일라이.
그의 대답에 아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개 그런 기분이 들면 안 좋은 일이 있던데. 아무튼 생존자는 없는 거지?"
"후우,  번 더 가봐야겠어. 다 같이."
"다 같이?"


굳이 또 갈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아넬은 일라이의 말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 했다.
곰곰히 생각하던 그녀는 익살스럽게 웃었다.
일라이가 불안한 얼굴로쳐다보자 아넬이 말했다.

"일라이, 사실 어두운 곳 무서운 거지? 키힛."
"엥? 아니거든. 그리고 나 혼자 간 것도 아닌데 뭐가 무서워."
"마님이랑 간  입구까지 아니야?"
"이 나이 먹고 그런 곳 무서워하면 어떻게 용사질 해먹냐?"


어깨에서 아넬을 밀어내며 일라이는 식사를 시작했다.
둘의 얘기를 들은 리비카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지금쯤 기사분들도 모두 쉬셨을 테니 또 지하도에가실수는 있겠죠. 하지만 정말 생존자가 있을까요?"
"흠……."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이제 와서 생존자가 남아 있을까 하는 것이다.
체플린은 펠로르드와는 다르게 피나 시체가 넘쳐나지 않았음에도 생존자가 있을 기미가 안 보이는 곳이었다.
그런 신기한 속성을 지녔음에도 생존자를 찾으러 다니는 일라이가 이해  가기도 했다.
하지만 일라이는 생각이 달랐다.

"사람의 인연은 대부분 우연이지만, 필연인 경우도 있어. 이번 세지의 경우처럼 도움이 되는 여자라도 나타나면 좋잖아?"
"그야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니  할 말이 없어진 리비카.
일라이는 식사를 마치며 카드에 있는 여자들을 소환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전하며 물었다.


"여기 남아도 좋아. 어쨌든 여기가 현재 우리 거점이니까."
"갈 사람, 남을 사람 알아서 정하게 하자!"


자하가 주먹을 들며 외쳤다.
좋은 의견이라 여기며 일라이는 그대로 따랐다.
결국 예상대로 두 패로 나뉘었다.
일라이와 함께 지하도로 갈 인원은 유리엣과 자하, 레피나, 리비카였다.
나머지는 거점을 지키며 사수할 생각이었다.


"모두 후회 안 할 거지? 이대로 간다!"
"응!"


여자들이 전부 대답하자 일라이는 바로 여관을 나섰다.
뒤에서 여자들이 따라오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만큼은 지하도를 다 돌고 돌아오리라.
생존자가 없다 하더라도 실망하지 않으리라!

'유리엣이 있으니 든든한데?'

다른 여자들도 유능하지만, 드래건인 그녀가 있자 체감상 온도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유리엣은 묵묵히 따라오다가 일라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일라이. 너는 이번 멸망의 주역이 몬스터라고 생각해?"
"음? 글쎄…처음에 운석이 떨어지고, 거기서 몬스터들이 나왔으니. 아마도?"

칠흑의 사도나 이런 것들은 제쳐두고서라도, 몬스터들의 행보가 심히 기이했다.
갑자기 늘어난 개체수와 변질된 듯한 검은 피.
이것만 해도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유리엣은 생각이 다른지 고개를 저었다.

"우리 드래건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전설이 있지."
"그것도 멸망전설이냐?"
"비슷해. 다만 그 멸망의 시작이 다른 세계, 혹은 다른 문명에서 비롯된다는 거지."


여자들과 함께 지하도로 향하던 일라이가 얼굴에 의문을 떠올렸다.
다른 세계나 문명에 의해서 멸망이 비롯된다니.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다른 세계?"
"예를 들면 저기."


손을 들어 어둠이 찾아온 밤하늘을 가리키는 유리엣.
그녀의 손짓이 오늘따라 더욱 특별해 보였다.
새하얀 손이 가리킨검은 하늘을 보며 일라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레스트 대륙에서 우주에 대해 알아낸 건 제법 많다.
저곳 역시 다른 세계라는 것, 시간에 따라서 색이 달라진다는 것.
하지만 저기서 뭐가 있다는 것일까?

"그냥 별들만 가득한 곳 아니야?"
"조금 달라.  별들 하나하나마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라면 어떻겠어?"
"저 작은 별들이…세계라고?"
"헤엥, 신기해!"


자하가 히죽 웃었다.
하지만 일라이는 웃을 수 없었다.
저렇게 작은 별이 거대한 세상이라는 말이 실감나지 않았다.
믿을 수 없다는 일라이의 얼굴에 유리엣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구나. 인간은 아직 그 경지까지 이르지 못했구나."
"너네 드래건이 너무 뛰어난 거야."
"멸망에서 이겨내면, 인류도 우주의 비밀에 대해 알  있을 거야. 세상은 무수히 많아."
"저 별들이 세상이라면그렇겠지."
"내가 말한 건 다른 거야. 우리와 완벽하게 비슷하면서도 다른 세계가 무수히 존재할  있다는 거지."

유리엣은 과연 드래건이다.
 하나도 이해하기 힘든 말만 하고있으니 말이다.
내색하지 않으며 일라이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역시 공부를 게을리 했다는 것에서 자괴감이 들었다.
지하도에도착하자 일라이는 바로 앞서 나갔다.

"어제 여기서 기사랑 싸웠…는데?"

기사와 싸운 곳까지 갔으나 보이는 건 없었다.
분명 기사를 죽이고 나서 시체를 치운 기억은 없는데?
일라이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레피나가 물었다.

"몬스터가 가져간 거 아니야? 먹으려고."
"하지만 몬스터가 먹을 거면 그 자리에서 먹겠지. 갑주나 이런 것까지 먹어치울 리도 없고."
"이상하긴 하네요. 시체가 있었는데 사라졌다니……."


리비카는 턱을 괴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까부터 시선이 느껴졌다.
그저 기분탓이라 여기고 싶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 인원들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시선이 느껴져……."
"나도 어제 느꼈다고. 기분 더러웠어."
"누가 있긴 있는 건가?"


정면을 주시하던 일라이가 유리엣을 돌아봤다.


"혹시 혼령이나 귀신 같은 거 볼 수 있어?"
"지금 내 상태라면 느낄 수는 있어. 그런데 그런 건 없어."
"그래? 제길."
"오히려 다른 무언가인데…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의미심장한 유리엣의 말에 일라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에 누가 있긴 있다.
다만 그게  세상의 것이 아니라니?
그녀의 이론대로라면 외부세계에서 온 몬스터라는 것일까?


"몬스터일지도 모르겠군."

일라이의 말에 유리엣을 제외한 모두가 경계하기 시작했다.
특히 자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헤헹, 드디어 놀아보는 건가?"
"조심해. 자하 너는 특히 근접해서싸우는지라 더 다칠 수 있어."

레피나가 조언하듯 말했다.
하지만 포유족은 기본적으로 완력도 좋지만 재생능력도뛰어나다.
게다가 자하는 반사신경이 좋은 편이었다.

"위치를 알 수 있겠어?"

일라이의 질문에 유리엣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안내하듯 천천히 어딘가로 향했다.
바로 뒤를 따르는 인원들.
그리메를 빼들며 일라이는 싸울 준비를 했다.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유리엣은 마음을 놓는 것 같았다.


"굳이 그럴 것 없어. 상대는 싸울 생각이 없는 것 같거든."
"음?"

유리엣은 멈춰 섰다.
그리고 옆에 있던 건물을 말없이 가리켰다.
그곳은 문이 낡아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아마 오래 되어서 그렇다기 보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부숴놓은 것 같았다.
일라이는 유리엣과 눈을마주치더니 그곳으로 향했다.
모두에게 기다리라고수신호를 하면서.

스윽- 저벅저벅-


어둠 속으로향하며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이런 어둠은 세상이 파멸을 맞이한 이래 계속 만나고 있다.
슬슬 질릴 정도였다.
사창가 특유의  냄새가 날 때, 뒤에서 유리엣의 목소리가 들렸다.

"멈춰. 바로 앞에 있어. 주저앉아 있는데?"
"뭐?"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어둠뿐이지만, 분명 암순응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코앞에 있다고?
일라이는 바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시간이 가니 조금씩 윤곽이 드러났다.
사방으로 뻗친 단발머리에 조금  옆머리, 그리고 동양식 하얀색상의 치파오를 입고 있었다.

"이제야 찾아냈네?"


유리엣과는 다른 의미로 차가운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명백하게 감정이 담겨 있었다.
바로 흥분이라는 감정이었다.


"너는 누구지?"

질문을 던지며 일라이는 쓰게 웃었다.
분명 형체는 보이지만 실재하지 않는  같았다.
허공에 대고 묻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는 대답을 기다렸다.

"나? 글쎄…이곳에 불시착한 가련한 존재라고 할까?"
"말장난은 취미없는데."
"하지만 사실인 걸? 읏차."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
그녀는 일라이의 가슴께에 오는 키였다.
일라이를 올려다보던 그녀가 싱긋 웃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눈이 빛났다.
한쪽은 벽안, 다른쪽은 적안.
명백히 다른 오드아이였다.


'오드아이……?'


에레스트 대륙에서 오드아이는 흔하지 않다.
12년 전쟁 전에 있던 '일방전쟁'에서 오드아이는 재앙을 부르는 존재라고 여겨져서 지독하게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드아이를 실제로 만나게 된 것이다.
일라이의 반응에 여자가 밝게 웃었다.

"우와…신기해하면서도 놀라는구나?"
"내 표정에 그렇게 드러나나?"
"그럼! 나는 감정이 풍부한 인간이 좋아. 배울 게 있거든!"
"너는 인간이 아니라는 듯이 말하네."
"글쎄, 굳이 따지면 나는…너희가 '이질'이라 말하는 것에 가까워. 이 세계의 정보를 백업해서 말한 건데, 어때?"


이질.
에레스트 대륙 역사상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나 존재가 있어왔다.
그것들을 학자들은 이질이라 불렀다.
 편으로 부르는 게 대충 기억하기에 좋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녀는 스스로를 이질이라 말하고 있었다.

"내 이름은 일라이, 사라진 왕국의 왕자였다."
"오, 이름 알려주는 거야? 엣헴, 그럼 나도  이름을 말해야겠지? 내 이름은……!"

삐이이이-!

그때 머릿속에서 신경을 긁는 강렬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일라이는 귀를 손으로 막더니 여자를 내려다봤다.
이름을 다 말한 것처럼 여자가 웃었다.

"어때? 자기소개로 괜찮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이름으로 해라. 망할 이질!"
"힝, 그렇게 말할  없는데. 좋아, 그럼  세계어로 말할게.  이름은 '락테아', 테아라고 불러!"
"테아……."

스스로 이름을 밝힌 여자를 내려다보며 일라이는 많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눈앞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소녀.
하지만 몸매는 전혀 소녀가 아닌 표현하기 어려운 그녀.
이질이 정체인 그녀와 통성명을 하게  것이다.
흐뭇하게 웃던 테아가 일라이를 지나치며 밖으로 나갔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그녀가 빙긋 웃었다.


"모두들 반가워! 설마 나한테 나쁜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후훗."


우린과는 다른 의미로 통통 튀는 매력이 있는 테아.
하지만 저런 가벼운 농담에도 흘려들을 수 없는 무게가 느껴졌다.
이질, 다른말로 외계인.
어쩌다 보니 에레스트에 불시착한 이질적인 존재가 사람들 앞에서 무방비하게 웃고 있었다.

"바, 반가워……."
"읏."
"외계인이라고?"

놀라거나 의혹의 눈길.
하지만 테아는 예상했기에 여자들과태연하게 통성명을 나눴다.
일라이는 뒤늦게 건물에서 나오며 유리엣과 시선을 마주쳤다.
알게 모르게 유리엣의 표정은 엷은 미소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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