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마님과 함께!
"읏차, 그럼 모두 쉬고 있어!"
"어디 가게?"
아넬이 입가에 묻은 케이크 크림을 닦으며 다가왔다.
일라이가 세지에 오르며대답했다.
"지하도를 살펴보고 올게. 너흰 쉬고 있어."
"같이가!"
"그냥 뭐 있는지 보고 오는 거야. 걱정 말고."
이번에는 세지도 있으니 도주는 자신 있었다.
일반적인 말에 비해 세지는 더욱 훌륭한 근지구력과 완력을 지니고 있다.
이건 도주는 물론이고 전투 시에도 엄청난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일라이는 세지를 믿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날씨 좋고."
햇빛이 만연하게 비추는 아침.
언제 온 건지 근처에 안개가 껴있었다.
그래서 햇빛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목을 가다듬으며 일라이가 목소리를 냈다.
"조세핀."
조세핀을 소환하는 일라이.
일라이 뒤에 조세핀이 요염하게 걸터앉은 채로 나타났다.
그녀는 일라이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안더니 물었다.
"후훗, 저를 잊으신 줄 알았는데."
"안 잊었거든? 싸움에 도움이 안 되니 나도 모르게 방치해둔 거라고."
"흐응흣……! 방치 플레이를 하셨단 건가요? 어머나앗, 아랫도리가 젖을 것 같아요."
"미친……."
괜히 조세핀을 소환했나 자문하는 일라이.
그러나 그녀를 카드에만 두는 것도 예의는 아니라고 여겼다.
엘브루트 세 여자와는 다르게 조세핀은 있던 곳까지 파괴된 처지다.
따지고 보면 일가를 전부 잃은 상태였으므로 다른 누구보다 비참했다.
그럼에도 그녀 특유의 멘탈 때문에 돋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저나 어디 가실 건가요?"
"지하도지, 어디야."
"체플린의 지하도는 마경으로 유명하죠. 온갖 사창가가 다 붙어 있는 곳이니까."
"그래?"
조금 의외의 설명.
일라이는 슬쩍조세핀을 돌아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자, 그것도 영주 마님인 그녀가 왜 이렇게 잘 아는 걸까?
"그걸 어떻게 알아?"
"그이에게서 자주 들었어요. 영지에 줄곧 오는 노예상들이 있는데, 뇌물을 바치면서 행선지나 사업방식을 작게나마 얘기해준다더군요."
"흥, 쓰레기들."
"체플린의 지하도 역시 자주 언급되는 곳 중 하나죠. 그런데…지금도 무사할지는 모르겠네요."
아예 일라이의 등에 기댄 채로 말하는 조세핀.
그런 조세핀을 돌아보며 세지가 인사했다.
"여, 반가워요."
"어멋, 켄타우르스! 반가워요, 후훗."
의외로 무난한 첫 만남.
두 여자가 인사를 나누자 일라이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사창가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마굴.
그런 곳이 지금도 무사할까?
물론 평소 이런 데는 관리가 엄격하게 되어 있다.
진상 손님이 난리를 부리기도 하고, 성노예들이 함부로 탈출하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규격 내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규격 외의 일을 고작 사창가 기도들이 처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후후, 우리 왕자님. 또 고민있는 얼굴이시네?"
조세핀이 일부러 가슴을 일라이의 등에 들이밀며 물었다.
압도적으로 풍만한 조세핀의 가슴을 느끼며 일라이는 목을 가다듬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하도는 조사하고 싶었다.
"조사할 필요가 있으니 하는 것 뿐이야. 거기 생존자가 있든 없든 상관없어."
"어머, 정말인가요? 후후, 그래도 당신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이들인데?"
노예들도 굳이 따지면 백성이라 칭할 수 있었다.
다만 이들은 항상 사람이기보다 도구로 칭해지곤 했다.
그래서 일라이는 조세핀의 말에서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성노예들을 인간이라 여긴 적이 있던가?
왕성의 하인들은 사람이겠지만, 그보다 더 나락에 처박혀 있을 노예들은 어떨까?
'내 백성이라…….'
깊게 생각하기 싫었다.
급속도로 발전하던 세계다.
대륙은 물론이고 바다로도 뻗어나가던 대개척의 시대가 도래했었다.
종말을 맞이하지만 않았어도 이 번영기는 더욱 길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자신만의 것이 될 수 있던 나라와 백성을 잃은 왕자는 고개를 저었다.
"도착했어."
지하도에 도착한 일라이 일행.
그는 세지에게서 내리며 말했다.
"둘이 여기서 있어. 금방 돌아보고 올게."
"응!"
"얼른 돌아오세요, 나만의 왕자님."
윙크를 하며 닭살 돋는 말을 하는 조세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젓던 일라이가 급히 지하도로 내려갔다.
생각보다 지하도의 상태는 깔끔했다.
관리가 잘 된 랜턴들이 양옆에서 빛을 비추고 있었다.
텅텅텅- 퉁퉁-
발소리가 그대로 공허하게 울려퍼졌다.
지하도 자체를 견고하면서도 가볍게 만든 탓이다.
길게 느껴지던 지하도를지나자 갑자기 개활지가 나타났다.
흡사 지하도시처럼 느껴질 만큼 또 하나의 거리가 나타난 것이다.
거리 양옆에는 제각각의 건물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여기가 매음굴…아니, 마굴인가?"
쓰게 웃으며 그리메를 빼드는 일라이.
건물은 대부분 석조 건물이었으나,출입문이 여러 개의 유리를 덧댄 채로 만들어져 있었다.
투명하지만 제법 튼튼한 유리.
조금씩 때가 묻기 시작한 유리들을 쓸며 일라이는 앞으로 나아갔다.
이곳 역시 멀쩡했다.
혈흔이나 시체 같은 건 보일 기미가 없었다.
"이상하네."
문득 매음굴의 중간지점까지 온 일라이는 멈춰 섰다.
아까부터 묘한 시선을 느꼈다.
분명 이곳에는 자신 혼자 있다.
아무리 건물을 조사해봐도 인기척은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뒤통수를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지는 걸까?
쉬익- 철컥- 쉬익- 철컥-!
철제로 된 무언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몸이 경직되는 것 같았다.
마른 침을 삼키며 일라이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빼곡히 들어선 건물들.
그 건물 중에서 유리창이 깨진 틈으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험가인가? 아니면 부랑자?"
"…복색을 보아하니 제국의 기사로군."
일라이는 혀를 찼다.
하필이면 여기서 마주치기 싫은 자들을 보게 된 것이다.
제국 기사로 보이는 자가 흐뭇하게 웃으며 일라이와 대치했다.
잘만들어진 양질의 하얀 중갑, 목에서부터 발 끝까지 두터운 중갑이 기사의 명예와 보호를 드러냈다.
그리고 이 중갑을 입고 무난하게 움직일 만한 체력을 지닌 자가 금발을 뒤로쓸며 물었다.
"흩어진 동료들을 찾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더군."
"다른 도시와 이어지나?"
"물론이지. 이런 사창가는 원래 그래. 물론 창녀들이 없는 사창가라서 웃기긴 하지만."
제 나름대로 유머를 내뱉은 것 같지만 전혀 웃기지 않았다.
마른 입술을 적시며 일라이가 물었다.
"그렇군. 그럼 이제 뭘 할 거지?"
"복색은 모르겠지만 억양은 왕국놈이로군. 세상이 이렇게 됐다지만, 왕국놈이랑 한 자리에 있을 수는 없지."
처억- 스르응-!
칼집에서 롱 소드를 뽑는 기사.
제국의기사들이 사용하는 제식 검이며, 동시에 가장 다루기 힘든 검.
예상한 일이었기에 일라이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 그렇게 나오셔야지."
"그런 허약한 검으로 되겠는가?"
"걱정마, 네 목은 확실하게 뚫어주마."
일라이가 도발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이 자가 아니다.
아까부터 느껴진 시선의 주인공은 다른 것이었다.
그때 기사가 빠르게 돌진했다.
후우우우우욱- 캉-!
일라이가 이를 악물며 간신히 막아냈다.
기사는 표정 하나 안 변하고 힘으로 밀어붙였다.
그그그그극-!
바닥을 긁으며 뒤로 밀리는 일라이.
제국의 기사가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느낀 일라이는 혀를 찼다.
역시 쉬운 상대가 아니다.
"하앗!"
후욱- 탱-!
뒤로 물러나며 그리메를 휘두르는 일라이.
기사는 그것을 중갑으로 버텨내며 돌진하려 했다.
그때 돌진하던 모습 그대로 멈춰 선 기사.
그는 자기 중갑에 나버린 검흔을 보고 얼굴이 굳었다.
'양질의 중갑이다. 설령 발리스타가 날아와도 버티는데…왜 베였지?'
놀랍게도 중갑의 가슴 부분이 크게 찢어져 있었다.
악마가 갈고리로 할퀴고 지나간 것 같았다.
가슴 부분을 쓸며 기사가 비웃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지."
"고양이도 아닌 주제에…그 행세에 익숙한 건 아니고?"
"이제 내가 가지."
지면을 박차며 단숨에 롱소드를 휘두르는 기사.
일라이는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며 기사의 공격을 피했다.
제국 기사들의 무서운 점은 검술과 육탄전을 동시에 한다는 점.
검을 이용해서 힘싸움과 레슬링을 노리며, 동시에 자세가 무너지게 유도해서 순식간에 승기를 잡는다.
기본적인 스펙도 괴물인 자들이 비열하게 싸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방식에는 일라이도 익숙했다.
[겔보이드 제식검 - 파쇄]
롱소드를 세운 채로 있는 힘껏 휘두르는 기사.
일라이는 그리메를 들어 막으려다가 두 팔이 저릿한 느낌에 뒤로 물러났다.
흔히'강격'이라 불리는 것을 제국의 기사들은 익힌다.
수습 때부터 정식 기사가 될 때까지 익히고, 그걸 자신만의 방식으로 믹스한다.
"과연 괴물이로군."
"칭찬 고맙네, 왕국의 개새끼여."
존중 따위 전혀 없는 기사의 언행.
그는 느끼하게 웃더니 다시 공세에 나섰다.
일라이는 계속해서 뒤로 밀리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이렇게싸우면서 밀리는 건 사실 그의 패턴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걸 모르는 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웃지?"
"너를 죽일 방법이 떠올라서."
"흥, 운 좋게 갑주를 벤 주제에!"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제국의 기사.
그는 일라이와 검을 맞대며 단숨에 발을 앞으로 밀었다.
일라이는 먼저 무릎을 굽히며 기사가 다가오는 걸 막았다.
동시에 힘싸움에서 지지 않으며 상위 포지션을 잡아그대로 내리눌렀다.
"크읏, 왕국의 개 주제에……."
"유감이지만 힘이라면 나도 딱히밀리진 않거든."
지금까지 봐준 게 사실인 듯 일라이가 단숨에 주도권을 위협했다.
기사는 롱소드로 떨쳐내며 뒤로 물러났다.
일라이의 공격이 무섭게 다가왔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 추수]
궤적을 그리며 다가오는 그리메.
기사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상체를 움직여 피했다.
그리고 앞으로 빠르게 다가가며 롱소드를 내질렀다.
[겔보이드 제식검 - 용가시]
드래건의 꼬리 끝이나 갑각 끝에는 가끔 가시가 달려 있다.
무엇이든 뚫는다고 알려진 용가시의 이름을 빈 기술.
기사가 그대로 롱소드를 내지르더니 회수하며 횡베기까지 시도했다.
무척 유연한 기술에 일라이는 감탄하면서도 비웃었다.
이미 한 번 본 것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제 내 차례."
"아니, 그건 아니지!"
일라이가 측면으로 다가서자 기사는 바로 팔꿈치를 들어 휘둘렀다.
어깨로 먼저 들이받은 일라이 때문에 기사는 롱소드를 놓치며 뒤로 밀려났다.
그 좋은 기회를 일라이가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사도 빨랐다.
[겔보이드 제식검 - 심판의 철퇴]
롱소드의 날을잡은 채로 그대로 휘두르는 기사.
겔보이드 제식검에 반드시 숙지를 요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크로스가드와 힐트가 둔기처럼 무겁게 다가왔다.
일라이는 바로 상체를 크게 숙였다.
머리 위로 웅장한 소리가 들렸다.
"흣차!"
일라이는 바로 기사의 가슴을 부여 잡더니 들어올렸다.
기사가 버둥거리며 저항하려 할 때, 일라이는 그를 바로 땅바닥에 메쳤다.
후웅- 퍼어억- 털컹-!
갑주를 입은 채로 쓰러진 기사.
일라이는 빠르게 기사를 앞질러 가며 그리메를휘둘렀다.
순식간에 기사의 목을 긋고 지나간 것이다.
푸카하아아악-!
찢어진 기사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여유있게 그리메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일라이가 말했다.
"좋은 승부였어, 기사 씨."
기사의 시체를 지나치며 일라이는 계속 걸었다.
이 시선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누구냐고 소리질러 묻기도 했지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가만히 있을수록 주변 대기가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일라이는 돌아가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