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2화 〉무너진 도시, 체플린 (52/100)



〈 52화 〉무너진 도시, 체플린

쾌속으로 지하도시에서 탈출한 일라이 일행.
본래 유적의 입구가 아니라, 전혀 다른 반대편 출입구로 나오고 말았다.
전혀 낯선 모습에 잠시 당황하기도 했지만 일라이는 우선 인원을 점검했다.
자신이 데리고 왔던 여자들에 더해 세지와 그의 동료들이 5명이나 살아 남아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일라이가 말했다.


"제길, 여긴 어느 지역이지? 그 유적 입구에서 얼마나 벗어난 건지 모르겠어."
"여긴 '바들렌' 지방이잖아!"


레피나의 대답이 들렸다.
하지만 일라이는 계속해서 같은 것을 물었다.
일부러 그녀를 화나게 하기 위해서 짓궂은 짓을 하는 것이다.


"아마 20km 정도일 거다."

감이 좋은 레스레모나가 의견을 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일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엘프.  말을 믿지."
"야, 나도 엘프거든!"
"응, 하프엘프."
"하프엘프는 엘프 아니냐! 카악!"


마치 뱀이라도 된 듯 일라이를 물어버리려는 레피나.
말에 오른 공주가 할 행동으로 적합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같았다.
귀밥 파는 시늉을 하며 일라이는 정면으로 고개를 들었다.
유적의 입구로부터 20km나 왔다면 여긴 바들렌 지방이 맞을 것이다.
그때 루밀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라이, 이 근처에 '체플린'이라는 도시가 있을 거야."
"체플린? 잠깐, 체플린이라면 원래 '체플린 교국'이 있던 곳이잖아?"

50년 전까지존재했다가 무너진 교국, 체플린.
종교의 힘을 전파하려 했으나, 본래 그 힘은 미비했다.
 탓에 신도들도 적었고, 결국 믿음이 꺾이며 무너지고 만 것이다.
 뒤로 체플린은 상업도시로 변하고 말았다.


"응, 노예상이 그러더라고. 더 서쪽으로 가면 체플린이 나오는데, 거기에 자기가 아는 매음굴이 있다고."
"매음굴이라면 지하에 있겠지. 역겨운 것들."

세지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녀 역시 지하도시라는 역겨운 곳에서 살았으니, 매음굴에 대한 참상을 모를  없었다.
그리메가 든 칼집을 만지작대며 일라이가 한 곳을 가리켰다.


"그럼 저기로만 가면 체플린이 나온다이거지?"
"응."


낮은 음성으로 대답하는 루밀다.
결국 행선지는 정해진 셈이었다.
체플린의 지금 모습이 어떤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쉴 곳이 필요했다.


'체플린 근처에는 던전이 없을 텐데.'


아쉬운  고개를 저으며 일라이는 세지에 올랐다.
그리고 느긋하게 걷기 시작했다.
지하도시에 와서 고생만 한  같았다.
물론 던전을 털며 훈제고기나 건량을 얻은 건  수확이었다.
여기에 금은보화까지 더해지니 반드시 손해만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던전을 다시 만나지못한다는 게 매우 아쉬웠다.

"이햐, 아저씨들 총이나 활 잘 쏘던데. 뭐하던 분들이셨어요?"

우린이 요란하게 물었다.
일라이는 슬쩍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슬슬 카드로 돌아가라."
"으윽, 싫어! 거기 가면 편하긴 한데 지루하다구!"
"글쎄, 곧 카드로 가고 싶어질 걸."

바로 고개를 돌리는 일라이.
고집스런 표정을 짓던 우린이 다시 세지의 동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익살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범죄자였지."
"나는 강간을 밥먹듯 했어."
"나는 유부녀 강간 후 살인."
"오, 나는 연쇄살인!"
"흐흐흐, 역시 다들 화려한데?"

범죄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 이들.
조금씩 몸을 떨며 우린이 일라이에게 말했다.

"응, 다시 돌아가야겠다."
"레스, 우린, 자하, 루밀다. 너희 피곤할 테니까 가서 쉬어."
"그래."

4여자를 카드로 돌려보내며 일라이는 팔짱을 꼈다.
이 모습에 세지와 동료들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와, 그거 마법이야?"
"캬아, 대단하우. 형씨!"
"아까 세지가왕자라고 했잖아. 왕족들은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데?"
"엄청나구만."

때아닌 관심과 칭찬에 일라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건 아무 것도 아니다.
다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리비카가 조금씩 다가오는 걸 보며 일라이가 물었다.

"리비카, 벨레르의 실력을 어떻게 보고 있지?"
"정말 놀랍더군요. 왕성에서도  정도의 검사를 보지 못했어요."
"그래? 그럼 놓친 게 무척 아쉬워지는데. 적어도 팔 하나는 잘라야 했는데."
"하지만 왕자님이 한 수 위라고 생각해요. 싸우면서 성장하셨잖아요?"


위로하듯 리비카가 말했다.
하지만 일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싸우면서 성장하는 건 사실 재능을 타고 나면 누구나할  있다.
문제는 벨레르라는 강적을 살려 보냈다는 것이다.
그 점에 책임감을 느끼는지 유리엣이 말했다.


"미안."
"네가 미안해할  없어. 확실하게 죽이는 방법은 그것 뿐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역시 아쉽다.
적어도 벨레르의  하나만 잘랐어도.
그랬으면 추후에 큰 위협은 안 됐을 텐데.
게다가 그는 과거의 유산이자 최근에 와서 복원된 복합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걸 빼앗았다면 더 큰 쾌거였을 것이다.
도로조차 없는 황량한 평야를 지나며 일라이 일행은 조금씩 지쳐 갔다.


"다들 힘들 테지만 무너지지 마. 도시에 가면 편히 쉴 수 있을 거야."
"지도에 따르면 체플린이 그리 멀리 있지 않은 것 같아요."


리비카가 지도까지 꺼내들며 말했다.
그 점에 희망을 얻은 건지 세지의 동료들이 웃었다.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를 바로 드러내는 건 좋은 점이다.
적어도 감정을 숨기며 살인을 하는 이들도 있으니까.

"뭐, 아무튼 오지게 걸어보자고."


한숨을 쉬며 일라이는 세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대로 느긋하게 계속 걷고 싶었다.
부디 아무 일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말이다.



***


체플린에 도착하니 날이 저물고 있었다.
일라이가 불평했다.

"왜 우리는 꼭 날이 어두워질 때 도착하는 걸까?"
"그냥 어두운 곳을 자주 돌아다닌 거겠지."


피식 웃으며 아넬이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야가 어두워지면 탐색할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든다.
마지못해 일라이는 세지의 동료들에게 지시했다.


"척후병을 조직해야겠는데?"
"내가 가지."
"나도! 발이 빠르니까."

2명이 자원했다.
일라이는 정면에서 양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각자 맡아서 알아봐 줘."
"좋아!"


척후병들이 다시 돌아오기까지 대략 10분.
그동안 일라이는 출입구에서 좀 더 나아갔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중충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시체나 무너진 건물은 없었지만, 인기척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본래 교국이었던 터라 빛바랜 십자가들이 틈틈히 걸려 있는 게 보였다.

"레피나, 인기척 없지?"
"응."

레피나 역시 심각한 얼굴로 주변을 보고 있었다.
적어도 여기서 처참하게 죽은 자는 없다.
무분별한 파괴행위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이 없다.
그 말은 여기 역시 유령도시라는 의미였다.
자세한 건 더 알아봐야겠지만, 이곳이 유령도시라면 도움을 줄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불길할 정도로 고요하네."
"이 도시에도 중앙광장이 있겠지?"
"교국이 무너지고 상업도시로 변했다 하니 있겠지."
"설마 거기 시체들이 쌓여 있는 거 아니야?"

레피나답지 않은 살벌한 말에 일라이는 혀를 찼다.
그런 변태 짓을 하는 몬스터가 있다면 당장 목을 베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었다.
정말 그렇다면 역시 척후병을 보낸  옳은 판단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척후병 둘이 동시에 돌아왔다.

"후우, 지하로 내려가는 큰 입구가 보이더군. 차마 지하도까지 가긴 뭐해서 근처를 둘러봤는데, 시체나 이런  없었어."
"좋아. 다음."

다음 척후병이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내가 간 쪽은 길이 좀 복잡하더군. 미로같은 곳 말고 최대한 넓게 뚫린 곳으로 가니, 중앙광장이 나오더라. 근데 아무 것도 없었어. 근처 집들을 살펴 보니 좀 어지럽혀 있긴 해도 사람은 없었어. 물론 시체나 무너진 건물도."

두 척후병의 얘기를 종합하자면 시체나 무너진 건물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매우 어지럽혀 있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급하게 떠났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적어도 여긴 펠로르드처럼 시체와 죽음으로 점철된 도시는 아니었다.
 점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불길하리만치 깔끔한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너무 조용한데. 여기도 분명 몬스터들이 지나갔을 텐데…시체는 그렇다 쳐도 건물을 그냥 두고 지나갔다고? 하다못해 마차 같은 것도 말없이 멀쩡히 방치되어 있잖아?"

몬스터들은 파괴의 상징이다.
파멸이 불러온 몬스터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그들이 신사적으로 이곳을 지나쳐 갔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딱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기분 나쁘리만치 불길했다.
결국 세지가  마디했다.


"아무튼 이걸로 조금은 안심할 수 있잖아? 안전한 곳을 찾아서 쉬자고."
"여관이 낫겠어. 원래 민가보다 여관이 더 튼튼하게 지어지니까. 거기로 가자."
"그래."


일라이 일행은 여관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큰 도시에서 여관을 찾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둠이 찾아오고 달빛이 거리를 비춘다.
인기척 하나 없는 소름끼치는 곳을걷자니 저절로 숨이 가파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혼자서 걷는 건 아니기에 일라이는 바로 안심했다.

"우선 이곳에서 잠시 머물자고. 그 지하도가 아무래도 신경 쓰여."
"매음굴이 있다는?"

유리엣이 묻자 일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밀다가 들은 말이 사실이라면, 지하도에도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남녀 불문하고 몸을 파는 자들은 노예다.
노예중에서도 가장 하급의 노예.
똑같은 처지끼리 급이 나뉘는 게 웃기지만, 원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이런 법이다.
그 정도로 격이 낮은 노예들이라면 마음대로 도망갈 자유조차 없을 것이다.


'또 모르지. 잘 팔리는 성노예라면 미리대피하게 해놨을지도.'

지금으로써는 추측만  수 있었다.
일라이가 턱을 쓸며 더 고민하려 할  리비카가 오른편을 가리켰다.

"저기 여관 아닐까요?"
"바로 찾았군. 불이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엷게 웃으며 일라이는 그곳으로 향했다.
우선 여관에 들어가서 쉬어야 한다.
편의시설이 제대로 작동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건 여독을 풀어줄 목욕이기 때문이다.
말들을 여관 로비 구석에 데려다 놓고 일라이 일행은 위로 향했다.
그나마 방들이 많아서 각자 들어가서 쉴 곳으로 적절했다.

"각자 방에 들어가도록. 이렇게 보니 막사 같군."
"크흐, 쉬고 싶었어!"
"나도! 맥주가 있다면 좋을 텐데."

세지의 동료들이 먼저 들어갔다.
세지는 어깨를 으쓱이며 아래층을 가리켰다.


"나는 말들이랑 같이 있을게. 불침번도 설 겸 좋겠지."
"이런, 그럼 너무 피곤하잖아."
"걱정마. 켄타우르스의 체력은 인간 이상이니까."


싱긋 웃으며 아래로 내려가는 세지.
마음에 걸리는지 일라이는 한숨을 쉬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카드를 통해 여자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엘브루트의  여자는 상태가양호했다.
참 기이할 정도로 잘 살아남는 영지였다.

'엘브루트가 그나마 변두리라고 하면 말이  되는 건 아니지.'

나머지 여자들 역시 양호했다.
안심하며 일라이는 욕실로 향했다.
물을 트니 다행히 나왔다.
불빛도 건재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라이는 옷을 벗었다.
우선 목욕을하며 피로를 풀어야겠다.
그 다음 이곳에서 뭘  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여관 식당 저장고에서 음식도 좀 충당해야겠군."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며 일라이는 욕실에 들어섰다.
그리고넓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욕조에 물을 받았다.
참 오랜만에 해보는 목욕 같았다.
제법 물이 차오르자 그곳에 들어가며길게 숨을 내쉬는 일라이.

"이런 걸 원했어. 후우……."


느긋하게 눈을 감으며따스한 물의 온도를 느끼는 일라이.
이런 호사를 언제까지 누려볼 수 있을까?
세계는 멸망해가고, 사람들은 우습게 죽어나가고 있다.
언제쯤이면 재앙을 막아내고, 나라를 다시 일으킬지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지금은 걱정보다 즐길 때였다.
따뜻한 물을 퍼서 세수를 하며 일라이는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욕조에 녹아들 듯 안락한 느낌이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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