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9화 〉봉인된 왕, 벨레르 (49/100)



〈 49화 〉봉인된 왕, 벨레르

동상이 있던 곳에 누군가가 착지했다.
쓰고 있던 동상과 똑같은 투구에 금이 갔다.
동시에 입고 있던 잿빛의 갑주 역시 금이 가며 깨지기 시작했다.
불량품이라도 입고 있는 듯한 모습.
투구와 갑주가 깨지며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게 누구야?"

레피나가 놀라며 물었다.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타난 사람은 칠흑처럼 까만 긴 머리를 가졌고, 온 몸이 잔근육으로 자리잡은 체형의 남자였다.
깊어 보이는 검푸른 눈은 우수에 차 있었고, '복합무기'인 160cm 정도의 대검은 묘한 울음을 퍼트리는 것만 같았다.
남자의 등장에 일라이가 일어서며 천천히 걸어갔다.
유리엣이경고하듯 외쳤다.


"잠깐, 조심해!"
"유리엣, 저놈한테 간단하게 마법 좀 쏴라."
"음? 응."

일라이는 간단하게 지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동상 속에 있다가 나온 남자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몸을훑어봤다.
이곳에 있는 게 신기한 눈치였다.

"막 출소한 놈 같잖아? 반갑다, 나는 망국의 왕자일라이라고 한다. 너는 누구지?"

일라이가 그리메를 빼들며 물었다.
질문을 받은 남자는 흠칫 놀라며 일라이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너는 나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이름을 묻는 거잖아."
"어리석군, 동토인이여. 감히 그 더러운 주둥이로 내 이름을 묻다니."
"동토인? 그건 주로 제국놈들이 우리 개무시할 때 쓰는 멸칭인데."


브류스터드 왕가의 뿌리는 북서쪽의 동토에 기인한다.
그래서 주로 제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브류스터드 왕국 사람들을 부르는 멸칭이 동토인이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조금 이상했다.
어긋난 듯한 어감, 가볍게 씹어 뱉는 듯한 말투가이질적이었다.
숨을 고르게 쉬며 남자가 대답했다.


"나는 '헐트부르크' 왕가의 11대 왕인 '벨레르 헐트부르크'다."
"뭐, 뭐? 헐트부르크?"


여유를 유지하던 일라이의 평정심이 깨졌다.
헐트부르크라고 한다면 제국이나 왕국이 있기 전, 훨씬 오래 전에 존재하던 고대국가의 이름이었다.
즉, 지금 나타난 이 벨레르라는 남자는 고대국가의 왕이라는 말이 된다.
믿을  없는 일이었지만 여긴 던전.
충분히 있을 만한 일이기도 했다.
잠시 고민하던 일라이가 고개를 저었다.

'간단하게 생각하자. 저 새끼 생긴 것만 봐도 고대인 느낌 나잖아? 그럼 대체 몇 세기 전 인물이지?'
'가지고 있는 대검은 복합무기다. 최소 두 가지의 무기를 하나의 무기로 엮어 만든 것. 변칙공격에 뛰어날 수도 있다.'


일라이가 고민을 마치며 물었다.


"헐트부르크라…반가워, 고대인. 지금은 당신이 살던때보다 1000년은 지나 있거든."
"뭐? 내가 살던 때보다 1000년?"
"그래. 놀랍냐?"
"개소리하지 마라. 그때쯤이면 이미 세상은 멸망당해 있을 것이다. 그 더러운 입으로 나를 속이려 하지 마라!"


벨레르가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제  세상에서 깨어난 고대인이  수 있는 거라고는, 자신이 아는 것을 바탕으로 생각하는 것뿐.
지극히 당연한 사고였다.


"뭐, 실제로 세상은 망하고 있어. 지금도 현재진행형이지."
"뭐라고? 그럼 나의 나라는?  신민들은?"
"지랄을 하네. 무려 천년이야, 천년. 남아 있겠냐?"

기껏해야 역사서로 남아 있는 헐트부르크 고대국가.
이곳의 마지막 왕이었던 벨레르는 고개를 숙이며몸을 떨기 시작했다.
자신의 전부이며, 자신의 정체성이었던 것들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정말로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다.
그렇다면 정상적인 사고는 불가능했다.


"크흐읏…크흐아아아아악!"
"아오, 깜짝이야. 갑자기 소리를 질러?"

표정을 찌푸리며 일라이가 물었다.
벨레르는 거칠게 대검을 빼들더니 일라이를 노려봤다.
도저히 이 분노를 식힐 수가 없었다.


"그것들은 나의 모든 것이었다! 세계가 멸망해? 그럼 그 멸망을 바로잡고 다시 나의 시대를 열겠다!"
"참 단순무식한 새끼네.뭐, 쿨하고 좋구만. 그런데…내가 좆밥으로 보이냐?"


그리메를 들며 차갑게 웃는 일라이.
서로 검을 겨눈 채로 대치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유리엣이 때맞춰 마법을 날렸다.
고드름의 형태로 빙결된 화살이었다.


피히잉- 파삭-!


초급의 마법일 테지만 드래건이 사용한 거라 마나밀집도는 대단했다.
그것이 벨레르의 이마에 날아가 산산조각났다.
무려 마법인데도 벨레르에겐 통하지 않았다.


"우스운 장난을 하는군. 너를 죽이고, 저 뒤에 있는 떨거지들도 죽여주지!"
"마법이 쉽게 먹히지 않는군. 그래, 검으로 대화하자고."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원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달려들기에는 이 대치국면이 너무 긴장감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먼저 균형을 깨야 했다.
벨레르가 먼저 균형을 깨기를 바라던 일라이가 한숨을 쉬었다.


'고대인 주제에 너무 침착해. 먼저 덤벼들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아.'
'충분히 탐색전을 마치고 싸울 건가? 유감이지만 네가 어느 수준인지 나도 모르는데?'
'할 수밖에 없다. 여자들의 지원을 받는 건 나중에하자. 지금은 이 새끼를 맛보고 싶어!'


호전적인 미소와 함께 일라이가 먼저 달려들었다.
그는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며 쇄도했다.
그러자 벨레르가 대검을 들고 그대로 종베기를 했다.

"흣차!"


단순한 종베기를 피하며 측면으로 다가서는 일라이.
그때 종베기인 줄 알았던 대검이 거짓말처럼 횡베기로 다가왔다.
그 모습에 일라이는 마른 침을 삼켰다.
지금 당장 이걸 피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씨발!"

후우욱- 태앵-!


"으윽!"


간신히 그리메를 들어 막았으나 뒤로 날아가는 일라이.
벨레르는 근엄한 얼굴로 일라이를 노려보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그 웅장함은 누구와도 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마치 검이 꺾이는 것 같았어. 그럼 절경인가?'


검술 아카데미에서 곁다리로 배우고, 스스로 정보를 찾아서 진득하게 파고든 검의 경지.
최악의 대마법사라는 강진모가 편찬하고, 세계 5대 성인이 마지막 집필을 마쳤다는 이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검술의 경지  두 번째인 절경을 보며 일라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 역시  경지에 있지만, 무려 벨레르가  훌륭한 솜씨인 것 같았다.

'집중하자, 상대는 지금까지와는 달라.'


길게 숨을 내쉬며 벨레르를 노려보는 일라이.
역사상 벨레르는 봉인된 왕이라 불렸다.
왜 봉인  건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국민에게 자애로웠고, 타국민에게 포학하기 이를  없었다.
지금 그 폭군이 자신과 맞서고 있었다.

"쥐새끼처럼 피하지 마라, 동토인!"

이번에는 벨레르의 공격 차례.
지면을 박차며 무섭게 다가오던 벨레르가 가볍게대검을 휘둘렀다.
일라이가 옆으로 빠지며 피하려 했다.
그때 검이 뱀처럼 허공에서 휘며 일라이에게 다가왔다.
일라이는 미리 예상하고 바로 정면으로 구르며 피했다.
그리고 벨레르의 뒤로 돌아가서 그리메를 세웠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 피바라기]

완벽하게 비어버린 벨레르의 후방을 노리는 연속 찌르기!
일라이는 지금까지  것보다 더 완벽하고 민첩한 피바라기를 선보였다.
대검을 완벽하게 다루고 있던 벨레르는 얼른 뒤로 돌며  눈에 이채를 띄었다.
설마 동토인이라 무시하던 자가 이런 기술까지 쓰다니.
놀라면서도 그의 손놀림은 침착했다.

푸부북- 태태태탱- 카카캉- 까앙-!

대검의 넓은 면을 이용해서 전부 막아내는 벨레르.
일라이는 동요하지 않고 바로 그리메로 대검을 올려쳤다.
가드를 풀고 이어서 때리려 했다.
그러나 타이밍은 이미 벨레르에게 넘어가 있었다.


쑤후욱- 뻐억-!


"억……!"


어느새 다가온 벨레르의 하이 킥에 목을 가격당한 일라이.
흡사 둔기에 얻어 맞은 것처럼 목이 꺾일 것만 같았다.
고통을 삼키며 일라이가 옆으로 물러나자 벨레르가 살벌하게 대검을 휘저었다.


부웅- 후우웅- 파앙-!

대검을 한 손으로 무난하게 휘두르는 벨레르.
그러면서 거리를 이용해서 지속적으로 일라이를 압박했다.
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인내하며일라이는 이를 악물었다.
보통 상대가 아니다.
 정도면 거의 특급 상대라고 봐도 좋았다.

'씨발,  깨어난 놈이 왜 이리 팔팔해? 몸속에 기름칠이라도 했냐?'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여겼다.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는 무려과거 고대국가의 봉인된 왕이었다.
그런 자를 상대하는 방법 따위 검술 아카데미에서 가르쳐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일라이는 평정심을 되찾으려 했다.

'저 새끼는 파워 타입이야. 그럼 기술로 유연하게 대응해야 해!'


침착하게 대검을 흘리거나 피하는 일라이.
벨레르가 엇박자로 검을 물결처럼 휘두르면 일라이는 목숨을 걸고 피했다.
그리고 대각선으로 구르다가 일어나는 순간 그리메를 치켜 올렸다.


후확-!

"흠!"


이미 벨레르는 뒤로 빠진 상태였다.
일라이가 막 자세를 잡으려 하자 벨레르가  걸음에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두 눈을 크게 뜨며 대검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검이 아니라 바위가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죽어라, 동토인."

후우우웅- 화악-!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일라이는 아예 바닥에 눕듯 엎드렸다.
이게 아니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넓은 일격이었다.
대검이 지나가며 일라이가 펄쩍 뛰어오르듯 일어났다.
그리고 벨레르의 가슴이 빈 것을 깨닫고 그리메를 두 손으로 쥐었다.


"이거나 처먹어!"


[브류스터드 파검류 멸검 - 개화]


확실하게 타이밍을 잡고 승부수를 거는 일라이.
벨레르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일라이를 쳐다봤다.
몸을 일으키며, 검을 들고, 그대로 내리긋는 일련의 행동이 군더더기 없었다.
교과서에 당장 실으라고 한다면 몇 번이나 추천할 수준이었다.
그러나승부는 넘어오지 않았다.

후우웅- 바웅- 푸콰하아악-!

"어……?"


분명 벨레르는 둘로 갈라져야 했다.
만개한 꽃처럼 피를 뿌리며 쓰러져야 했다.
그러나 공격당한 건 도리어 자신이었다.
일라이는 대검이 꺾여지듯 다가오며 자신의 전신을 난도질하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다.


'거짓말…….'

말 그대로 거짓말 같은 상황이었다.
아찔한 고통이 사방에서 다가오며일라이의 몸을 찢어발길  괴롭히기 시작했다.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일라이를 보며 여자들이 외쳤다.

"아, 안 돼!"
"일라이, 일라이!"
"쓰러지지 마, 아으, 어떡해!"


털썩- 쿵-!

땅바닥에쓰러진 일라이는 크게 피를 토해내며 몸을 떨었다.
벌써부터 몸이 경직되는 것 같았다.
승자가 되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벨레르가 보였다.
그는  치의 의심도 없다는 듯 말했다.


"너는 약해, 고작해야 동토인.  한계를 넘을 수 없다."
"크륵, 컥, 너, 너는……."
"검을 쥔다면 그 길에 대해서 제대로 고찰했어야지. 네 몸속에 흐르는 왕가의 피가 우스울 뿐이다."
"크르흑, 커헉……!"

마음껏 비웃음당하며 죽어가는 일라이.
그는 죽어가며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이대로 지면…너무 가오없잖아.죽기 싫어…씨발, 여자들이 위험…하다고.'

벨레르는 손쉽게 일라이의 심장을 대검으로 찍어 누르며 묵직한 표정을 고수했다.
타인을 죽이는 것에 있어 거리낌이 없다.
이미 숱하게 해온 일이다.
그러므로 망설임도, 나름의 고뇌도 없다.
그렇게 일라이를 죽여놓고 벨레르는 여자들을 노려봤다.

"흠……."

그러다가 이곳이 동 떨어진 세계라는 것을 직감한 벨레르.
그는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낱 계집년들에게 신경  뻔 했군. 이곳이라면 분명 출입구가 있을 터. 그곳을 찾아야지."

[공명감응]


벨레르는 정면으로 손을 뻗었다.
파동형의 기운이 골고루 퍼지며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그러다가 바로 공명이 이뤄졌다.
기운을 날려서 자신이 찾으려 하는 것을 찾는 기술이었다.

"저곳에 있나? 좋아, 그럼."

간만에 세상 구경을 하고 싶었다.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세계의 멸망을 바로잡고, 자신의 국가를 다시 세우려 했다.
죽은 일라이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벨레르는 그렇게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여자들이 급히 일라이에게 달려갈 때, 변화가 일어났다.
일라이의 몸이 서서히 죽기 전으로 복구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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