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마침내 합류!
협곡 곳곳을 돌며 보물을 모으는 일라이 일행.
첫 던전치고는 제법 순조로웠다.
물론 단층 던전인지라 얻을 수 있는 건 한정적이었다.
만약 일라이가 던전왕이 되려고 했다면 정말 아쉬웠을 것이다.
"후우, 이것도 제법 벌이가 되는데?"
낡은 상자에서 금화들을 꺼내며 주머니에 담는 우린.
무미건조한 학업의 나날을 보내던 그녀에게 이런 삶은 자극 그 자체였다.
마치 판타지 소설처럼 모험을 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바로바로 받는 인생.
위험천만하지만 그렇기에 짜릿한 삶이었다.
우린의 흡족한 웃음을 보며 일라이가 협곡의 중앙부를 가리켰다.
"남은 건 협곡의 중앙부, 동상이 있는 곳이다."
"동상 참 크기도 하네."
가느다란 산 능선으로 가려진 곳에는 동상의 머리로 보이는 것이 우뚝 솟아 있었다.
투구벌레처럼 생긴 얼굴이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일라이 일행은 바로 중앙부로 향했다.
"얼른 레피나 보고 싶어!"
아넬이 일라이의 어깨에서 투정부리듯 말했다.
일라이가 불편한 표정을 짓자 레스레모나가 좀 더 빨리 나아가며 물었다.
"정찰이라도 하고 올까?"
"아니, 거의 막바지야. 잔챙이 몬스터들이 존나 나타났던 거 말고는 위협요소가 없네. 시시할 정도라니까."
거만해 보일 만큼 자신감을 표출하는 일라이.
휘파람을 불며 우린이 말했다.
"흐응, 그러다가 또 죽지."
"닥쳐."
가볍게 응수하며 일라이는몸을 풀었다.
이번 여정이 처음인지라, 일라이 일행은 시간 감각에 둔감해지는 것 같았다.
사실 던전마다 시간대가 정상적으로 흐르거나, 비정상적으로 흐르는 곳이 있었다.
이 특성을 모르기에 일라이는 하늘에 떠있는 태양을 노려봤다.
"꺼지지 않는 태양이구만."
"저게 진짜 해인지도 의심스럽군."
살짝 인상을 쓰며 레스레모나가 말했다.
정상적인 태양이라면 이렇게 길게 뜰 수가 없다.
지금 일라이 일행은 던전에 들어와서 몇 번 쉬고,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걸린 시간만 하더라도 8시간에 육박하는데, 아직 해는 쨍쨍하고, 하늘은 맑았다.
적어도 해가 기울거나, 노을이 지기라도 해야 하는데 전혀 아닌 것이다.
"정말 이상한 동네야……."
손을 눈 위에 받치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우린.
능선 하나를 거의 넘을 즈음, 저 멀리서 한 무리의 그림자들이 보였다.
분명 레피나 일행이었다.
"오, 저기 보인다!"
"좋아, 그럼 가볼까?"
일라이는 말에 올랐다.
이대로 전속력으로 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실현되지 않았다.
주변 수풀이 움직이더니 리자드리스들이 악을 지르며 나타났다.
"키헤에! 침입자들 발견했다아!"
"우리 형제들의 복수, 쿠히힛, 이뤄주마!"
"다 죽여라아! 끼히익, 암컷들은 사지만 잘라둬!"
사방에서 리자드리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지금까지 정예병들을 낭비한 건지 작살을 들지는 않았다.
그들은 동물의 뼈를 다듬어서 만든 단검을 양손에 쥐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바탕 할 기세였다.
"왜 안 나타나나 했다. 그래, 이게 너희들 마지막 발악이었으면 한다!"
호쾌하게 웃으며 말에서 내려오는 일라이.
그는 최대한 멋지게 그리메를 빼들며 입맛을 다셨다.
누구를 먼저 죽일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어쩔 거야?"
심드렁한 얼굴로 묻는 아넬.
일라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주변 엄폐물 많음, 놈들의 수효는 끽해봐야 15마리, 우린 개개인의 능력 출중. 여긴 개활지가 아니야, 다들 저 새끼들한테 달려들어서 작살 내!"
"그러지!"
"야하핫, 마법소녀 나가신다앙!"
"유후!"
일라이의 지시에 여자들이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동시에 일라이 역시 기세를 다해 달려가며 가까이에 있는 리자드리스에게 검을 뻗었다.
"꾸히, 우습게 보지마!"
리자드리스 하나가 혀를 낼름거리며 마주 달려왔다.
그때 일라이가 차갑게 웃는 게 보였다.
그는 일부러 느리게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막 가속을 할 참이었다.
"뒈져, 파충류."
후우웅- 쉬하악-!
순식간에 리자드리스의 목을 날리며 지나치는 일라이.
그는 양쪽에서 리자드리스들이 달려드는 것을 포착했다.
리자드리스들은 지금까지 죽어간 형제나 동료의 복수를 하려고 혈안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복수가 꼭 승리를 장담해주진 않았다.
일라이는 한 바퀴 돌며 그리메를 묘한 각도로 휘둘렀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 달 아래에서 그대와]
본래 브류스터드 파검류의 회전격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믹스시킨 기술.
일라이는 한 발로 몸의 중심을 잡은 채로 빠르게 회전했다.
그와 동시에 그리메로 난무를 펼치며 다가오던 리자드리스들을 조각내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꾸레엑!"
"쿠학!"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나가는 리자드리스들.
일라이는 자신을 향해 힘겹게 다가오는 리자드리스들을 봤다.
'역시 하는 짓과는 다르게 산지나 좁은 곳에서의 싸움은 서투르군. 그럴 수밖에.'
가볍게 리자드리스들을 비웃어주며 달려가는 일라이.
다른 곳을 슬쩍 보니 여자들이 거의 학살수준으로 리자드리스들을 죽이고 있었다.
심지어 아넬은 평소의 그녀가 맞나 싶을 만큼 온 몸에 피칠갑을 해가며 날카로운 손톱을 휘젓고 있었다.
저주 때문에 리자드리스들은 뻣뻣하게 굳어 있다가 가슴을 관통당하고는 했다.
"시시해, 시시하다고!"
푸욱- 쉬학- 써걱-!
정신없이 리자드리스들을 베어넘길 때였다.
갑자기 지면이 울리는 느낌에 일라이가 멈춰 섰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하, 아무 대책없이 덤빈 건 아니다 이거지?"
일라이의 눈에 키가 3m 는 훌쩍 넘을 리자드리스가 나타났다.
가끔 리자드리스 중에 특이개체가 태어나기 마련이다.
이들은 부동의 대장, 리더가 되어 무리를 이끌고는 했다.
게다가 나타난 거대 리자드리스는 자신이 왕이라는 듯 나뭇가지로 엮은 왕관까지 쓰고 있었다.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구흐으, 우리 동포를 죽인 죄, 달게 받아라."
"내가 왜?"
"왕 앞에 무례할진저……!"
"우리 말투를 따라하는 것 같아 귀엽네. 그런데 어쩌나? 이 구역에서 진정한 왕은…바로 나인데."
말을 마치며 도발하듯 윙크하는 일라이.
그러자 거대 리자드리스가 포효를 했다.
능선 전체가 떠나갈 것 같았다.
포효를 끝내며 리자드리스는 거대한 무기를 꺼내들었다.
흔히 오우거들이 사용할 만한 '코페시'였다.
칼인지 몽둥이인지 모를 것을 들고 지면을내리치는 리자드리스 왕.
퍼억- 쿠웅-!
주변 지면이 크게 울렸다.
모르긴 몰라도 완력만큼은 대단한 것 같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겁을 먹었을 것이다.
물론 일라이는 달랐다.
"그래, 이제 좀 두근거리네!"
"왕이 벌을 내린다아!"
허공으로 크게 뛰는 리자드리스 왕.
그는 지면으로 내려오며 일라이를 향해 코페시를 휘둘렀다.
일라이는 정면으로 계속 구르며 피하더니 일어났다.
순간 코페시가 거짓말처럼 다가왔다.
리자드리스 왕이 착지하는 순간에 몸을 크게 돌린 것이다.
"흣차!"
가볍게 측면으로 미끄러지며 회피하는 일라이.
리자드리스 왕이 놓치지 않겠다는 듯 코페시를 미친 듯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부우웅- 바웅- 파악-!
코페시에 맞는 건 바위든 나무든 전부 박살나고 있었다.
힘 자체만으로 보면 오우거 이상인 것 같았다.
과연 한 무리를 이끄는왕이라 할만 했다.
그러나 일라이에겐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왕이란 건 말이지……."
"쿠하아악, 죽어라!"
분노가 넘치는지 리자드리스 왕은 일라이를 덮칠 듯달려오며 코페시를 들었다.
그리메를 쥔 손에 힘을 모으며 일라이 역시 반격할 준비를 했다.
압도적인 힘이 기술을 누를 수는 있어도, 기술이 압도적인 힘을 누를 수는 없다.
적어도 정점이 아닌 지금은 그랬다.
그렇다면 남은 건 기술을 연속해서 사용해서 상대의 공격을 흘려야 했다.
"힘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끄는 거야!"
[브류스터드 파검류 일라이식 - 로맨틱 메들리]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브류스터드 파검류의 기술을 연속해서 시전하는 일라이.
뒤로 빠르게물러서며, 리자드리스 왕의 코페시와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유지한 채로, 일라이는 최선을 다해 기술을 날렸다.
사선으로 베기도 하고, 빠르게 연속해서 찌르기도 하며, 온 힘을 모아 찌르거나, 묵직하게 두 번 베거나,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휘두르기도 했다.
온갖 기술이 다 날아오며 코페시의 진로를 마침내 바꿨다.
힘과 기술의 조합이 아니었다면 이뤄낼 수 없는 성과였다.
"그허아악! 내 무기가!"
리자드리스 왕의 두 눈이 커졌다.
분명 우습게 볼 상대는 아니다.
그러나 승부는 이미 일라이에게 넘어 가 있었다.
"너는 왕이 될 자격이 없어, 애송이."
리자드리스 왕과의 거리를 좁히며 그리메를 드는 일라이.
그 상태로 리자드리스 왕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종베기를 날렸다.
몸 속에 돌아다니고 있던 기를 검에 담은 채로.
[브류스터드 파검류 멸검 - 개화]
써걱- 쩌어억- 쿠화아악-!
온 힘을 다해 리자드리스 왕을 베고 두쪽으로 갈라버리는 일라이.
둘로 갈라진 리자드리스 왕은 허무한 얼굴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연한 푸른빛의 피가 사방으로 튀며 장관을 연출했다.
기술에 당한 상대가 개화한 꽃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
그 이름과 잘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후우……."
자신보다 거대한 상대를 쓰러트리며 희열에 젖은 일라이.
그는 주변이 정리되는 것을보며 웃었다.
그리고 주먹을 들며 외쳤다.
"끝났나? 모두 집하아아아아압!"
일라이의 외침에 여자들이 빠르게 주변에서 몰려들었다.
아넬도, 레스레모나도, 우린도 전부 상처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진짜 신기해! 도마뱀 애들이 여기서는 맥을 못 추네?"
너무 무난하게 이긴 탓인지 우린이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승리의 기쁨을 안은 채로 일라이 일행은 능선을 내려왔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레피나 일행이 보였다.
말에 오른 일라이는 느긋하게 말을 걷게 하며 말했다.
"이렇게 보니 또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네."
"후후, 그러게."
아넬이 일라이의 앞에 앉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어느새 자기 몸에 묻은 피를 말끔하게 흡수하고 있었다.
몽마다운 무서운 모습이었다.
"흥, 아주 편해 보이네!"
레피나가 입을 비죽이며 말했다.
일라이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레피나 역시 말에서 내리자 히죽웃었다.
그녀는 조금 피곤해 보인 것이다.
"너는 편해 보이네."
"누구처럼 무식하게 세지 않아서."
"그래도 다들 무사한 것 같아 다행이다."
"흐읏, 왕자님……."
일라이를 다시 보는 것만 해도 기쁜 리비카.
그녀는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숙였다.
협곡의 중앙부는 거대한 동상이 세워진 것 말고는 평범했다.
기껏해야 남과 북을 가르는 것처럼 얇은 강줄기가 흐른다는 것 정도가 특이했다.
동상을 올려다보며 일라이가 말했다.
"아무튼 대충 정복은 된 것 같아. 얻은 건 좀 있지만…이걸로는 부족해."
"게다가 여긴 지하도시에 있는 던전. 그저 그래."
레피나가 있는 그대로 말했다.
일라이 역시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다시 동상을 바라봤다.
"저 동상은 뭐지?"
"안에 금이라도 들어 있으면 좋겠다."
자하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모두가 귀를 쫑긋 세우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크기가 10m 는 족히 넘을 동상 안에 금이 있다니.
찾아내기만 한다면세계 최고의 부자가 될 것이다.
"설마 정말로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유리엣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대답 한 번 잘못하면 바보로 낙인찍힐지 모른다.
일라이는 침착했다.
"아하하, 당연하지! 에이, 동상에 금은 무슨…그럼 금상이겠지. 하하하!"
어색한 웃음이 공허하게 울렸다.
'저 동상이 알아서 깨졌으면 좋겠다.'
허황된 말이라 할지라도 힘을 가질 수 있는 법.
동상에 금이 있기를 바라며 알아서 깨지기를 바라는 일라이.
아쉬움을 뒤로 하고 던전을 떠나려 할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정말로 동상에 금이 가더니 깨지기 시작했다.
콰직- 쩌저저적- 지직-!
"어, 어……?"
"제길, 모두 피해!"
동상의 겉을 덮고 있던 석재가 무서운 기세로 떨어졌다.
일라이일행이 급히 자리에서 벗어나며 뒤를 돌아봤다.
거대한 동상이 산산조각나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정말 상상이 이뤄지기라도 한 걸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동상이 소멸하며 무언가 까만 것이 남아버렸다.
그 까만 것은 바로 웅크리고 있는 누군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