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몬잘알이란 이런 것
던전의 밀림 지역은 생각보다 빼곡하지 않았다.
자잘하게 강물이나 쓰러져 있는 나무들이 보이기는 해도, 대개 밀림과 평지의 비율이 비슷했다.
만약 야영을 한다면 최적의 조건인 셈이었다.
몬스터로 우글대는 이런곳에 야영할 생각을 가진 바보가 있다면 말이다.
"후우, 제기랄."
옷 여기저기가 긁혀 있는 일라이가 욕을 내뱉었다.
산 능선으로 보이는 곳 하나를 넘어 왔을 뿐인데, 온갖 함정을 만날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만든 건지 고민하게 만들 정도였다.
함정이 어디에 있는지알 수가 없으니 별 수 없었다.
그때 레스레모나가 미안한 듯 말했다.
"미안하군. 지형이 익숙하지 않아서 함정을 알기가 힘들다."
"괜찮아. 그래도 지금까지…50%의 성공율이었나? 이 정도면 대단한 거지."
그래도 엘프는 엘프다.
레스레모나는 최대한함정이 있을 곳을 예측해서 사격을 하거나, 돌멩이를 던져 미리 발동하게 만든 것이다.
만약 레스레모나마저 없었다면 일라이 일행은 진짜 죽었을지도 몰랐다.
"이러면 공주님 조가 걱정되는데."
쓰게 웃으며 우린이 말했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다는 듯 아넬이 대답했다.
"거긴 드래건이 있다고. 던전에 대해서 드래건보다 잘 아는 존재는 별로 없을 걸?"
"그렇다면 다행이네."
성공적으로 능선을 내려오니 슬슬 협곡 지역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까 내려다봤던 대로, 협곡의 안과 밖에 원시적인 형태의 집들이 보였다.
아마 여기 살고 있던 원주민이나 몬스터들의 것 같았다.
천천히 두 팔을 풀며 일라이가 말했다.
"하룻밤 지내기에 적절한 크기로군."
"저런 오두막은 비바람에 그냥 쓸릴 텐데."
원시적인 형태라서 그런지 내구도는 단단해 보이지 않았다.
그 점에 아넬이 불평을 토로한 것이다.
어찌 되었든 안에 쓸만한 게 있을지 몰랐다.
일라이 일행은 서서히 집에 다가갔다.
레스레모나는 함정을 관측하면서 머스켓으로 주변을 경계하는 것을 게을 리 하지 않았다.
"스읍, 흡, 음."
일라이가 말이 아닌 짧은 입소리와 손짓으로 지시를 했다.
레스레모나와 우린은 바깥 경계를, 자신과 아넬은 집 안으로 들어가 조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여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니 일라이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져 주먹만한 돌을 그대로 던졌다.
후욱- 태앵- 데구르르-
함정은 없는 것 같았다.
유리엣의 말대로 초급 수준의 던전이니 만큼 고차원적인 함정은 없을 것이다.
그 점에 위안이 들었다.
집에 들어가서 최대한 뒤질 걸 뒤져보는 일라이.
마치 누군가가 세팅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집 안에는 상자나 수제 서랍들이 보였다.
드르륵- 탁- 드르륵- 타악-!
빠르게 서랍을 뒤지던 일라이는 약초로 보이는 것을 몇 개 발견했다.
바로 주머니에 쑤셔넣고는 상자로 향했다.
보물상자라 불려도될 만큼 거대한 상자가 있었다.
일라이는 마른 침을 삼키며 상자를 천천히 만져봤다.
'보물이 든 상자와 함정 상자를 구별하는 법. 상자 겉의 온도, 손으로 두드려서 들리는 공명음, 그리고 내 반사신경.'
사실 작정하고 상자에 함정을 설치하면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
그럼에도 일라이는 검술 아카데미에서 배운 대로 방법을 시행했다.
먼저 상자를 만지며 온도를 체크했다.
'미지근해. 적어도 폭발성 함정은 아니야.'
폭발성, 혹은 화염을 내뿜는 종류는아닌 것 같았다.
그럼 자연스레 금속으로 된 함정이나 뱀 같은 위험 동물이 들어있는 종류로 넘어가게 된다.
이번에는 겉을 두드려 봤다.
일정한 리듬으로 두드리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뱀이 쉭쉭대는 소리도 없어. 전갈들이 돌아다니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이제 마지막이로군.'
얼굴에 흐르는 땀을 무시하며 일라이는 상자를 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잠겨 있지는않았다.
상자를 열면서 옆으로 몸을 날렸다.
함정이 발동하는 순간에 피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상자에 함정은 없었다.
"후우…좋았어."
상자에는 금괴나 보석이 있었다.
많은 건 아니었지만 이정도면 멀쩡한 도시나 뒷골목에서 거래할 때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물건들을 챙기며 나오자 아넬이 빈손으로 나왔다.
"으우, 없었어!"
"그래, 다음……."
일라이가 막 다음 행선지로 항하려 할 때였다.
사방을 뒤덮는 수풀을 헤치며 몬스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로 직립한 파충류인 리자드리스들이었다.
저마다 사람 잡는 작살을 쥔 채로 히죽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히히, 암컷들이 많아!"
"그히힉, 풍년이다아!"
"헤헥, 따먹자, 수컷은 죽여!"
리자드리스들이나타나자 우린이 당황했다.
레스레모나는 우린을 반쯤 안으며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하필이면 포위를 당한 것이다.
"윽, 수가 많잖아! 10마리라니……."
사색이 된 아넬이 당황하며 말했다.
하지만 일라이는 예상하고 있었다.
"당황하지 마! 전부 흩어지지 말고 위치 사수해. 그리고 함부로 앞으로 달려들지마."
"리자드리스가 포위망을 형성하기 전에 깰 수도 있지 않아?"
우린이 빠르게 물었다.
어떻게든 리자드리스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야말로 오판이었다.
"아니, 뻥 뚫린 개활지 아니면 그런 짓 하면 안 돼. 개활지라도 그런 짓은 자살행위야. 저놈들은 움직임이 민첩하고, 작살 다루는 솜씨가수준급이지. 멍청하게 달려들었다간 고슴도치가 될 거다."
진지하게 대답하며 그리메를 빼드는 일라이.
그리고 우린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마법소녀가 필요할 때라고."
"훗, 그럼 용기를 내볼까? 세계평화와 용기를 걸고 마법소녀 변신! 내 마음속 잠금을 해~제!"
오늘도 오글거리는 대사를 날리며 마법소녀로 변신하는 우린.
그때 리자드리스들이 이변을 느끼고 작살을 던지려 했다.
일라이는 근처에 있던 기둥 조형물을 쓰러트리며 레스레모나에게 외쳤다.
"레스, 무리하진 말고 사격을!"
"알았다."
기둥 조형물에 숨은 채로 머스켓을 발포하는 레스레모나.
그와 동시에 마법소녀로 변신이 끝난 우린이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규격외의 반격이 날아오자 리자드리스들이 당황했다.
뒤에 있다가 추가된 리자드리스들까지 무려 25마리의 리자드리스들이 포위망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레스레모나와 우린의 협공은 환상 그 자체였다.
철컥- 탕탕탕- 타앙-!
"이야압, 모두 각오해! 그레이트 러블리 빔! 블링블링 하트 레이저!"
온갖 유치한 이름의 기술이름을 외치며 마법을 난사하는 우린.
리자드리스들은 레스레모나보다 우린을 노리며 작살을 던졌다.
그때 아넬이 칼 같은 타이밍에 나서며 저주를 걸었다.
[Curse - Drunken]
작살의 명수라 불리는 리자드리스들이 갑자기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바로 아넬의 저주에 완벽하게 걸려든 것이다.
저주에 관한 저항력이 없는 리자드리스로서는 당연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작살을 던져도 우린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레스레모나와 우린의 협공에 리자드리스들은 힘없이 쓰러져나가고 있었다.
분명 먼저 포위망을 형성했는데, 역공으로 피해를 많이 입은지라 리자드리스들은 당황했다.
"컥, 케엑!"
"이럴 리가 없어, 그히힉! 계속 돌진!"
"무모하다, 흐킥, 무모해애!"
리자드리스들 사이에서 의견까지 갈리고 있었다.
대장 노릇을 하는 개체가 없으니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어정쩡하게 공격을 지속하다가 리자드리스들이 전멸하고 말았다.
치열한 화력전에서 일라이 일행이 이긴 것이다.
"이, 이겼다! 와아, 이겼어어!"
우린이 가장 크게 환호했다.
레스레모나도 표현을 안 한다 뿐이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아넬은 일라이의 어깨를 밟은 채로 팔짱을 꼈다.
"훗, 내 공이 크지? 후훗."
"모두 잘 했어! 리자드리스나 놀 같은 놈들은 이렇게 상대하면 돼."
모두를 칭찬하며 손뼉을 치는 일라이.
여자들은 모두 일라이에게 모여들며 그에게 호기심 많은 시선을 던졌다.
특히 그가 혼자서만 잘 싸우는 줄 알았던 아넬이 가장 말이 많았다.
"이거 정말 진짜배기잖아? 싸움만 잘 하는 건방진 왕자인 줄 알았는데. 흥, 인정해주마."
"인정은 개뿔…다 검술 아카데미에서 배우고, 내가 추가적으로 연구해서 이뤄낸 것들이야. 왕자라면이 정도는 기본이지."
"그래도 정말 멋졌다. 먼저 포위를 당하는 쪽이 무조건 지는 걸로 알았는데. 오늘로 생각이바뀌겠군."
일라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레스레모나가 말했다.
실제 전쟁에서, 그것도 수에서까지 밀리는 상황에서 포위까지 당하면 거의 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만 일라이 일행은 화력에서 앞섰고, 지형에서 앞섰기에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주변에 리자드리스들이 더 없는지 살펴보고 일라이 일행은 길을 떠났다.
"작살들은?"
"쓸모가 없어. 그래도 하나는 가지고 가볼까?"
일라이는 리자드리스들의 시체를 뒤지다가 가장 멀쩡한 작살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말 안장에 매달며 한숨을 쉬었다.
검은 대검에 이어 작살이라니.
언제부턴가 말 안장이 컬렉션이 된것 같았다.
그래도 실전에 도움이 되는 것이므로 넘어갔다.
"기히힉!"
"인간이다, 먹자!"
협곡의 바깥을 끼고 가고 있을 때 다시 리자드리스들이 나타났다.
총 3마리.
레스레모나가 바로 포착하며 사격을 실시했다.
우린 역시 마법소녀 상태를 유지하며두 팔을 화려하게 펼쳤다.
"하아아앗, 핑크 프리즘!"
우린을 감싸고 있던 핑크빛 오라가 주변으로 발산되었다.
그 오라에 닿은 리자드리스들의 전신이 실시간으로 불타기 시작했다.
이름이나 형태는 이래도 화염계 마법 같았다.
"크하악, 키히힉!"
"살려줘어, 뜨거워억!"
"끄하하학!"
리자드리스들이 단숨에 격퇴되자 일라이는 여유있게 웃었다.
레스레모나와 우린을 합류시킨 이유가 아까부터 빛을 발하고 있었다.
혹시 있을 함정까지 조사하고 있을 때,먼 곳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워낙 커서 여기까지 들릴 정도였다.
"읏, 뭐지?"
일라이의 머리칼을 쥐며 아넬이 물었다.
심드렁한 얼굴로 일라이가 대답했다.
"레피나 조도 우리처럼 무언가 만난 거겠지. 걱정하지 말자고. 저쪽도 엄청난 전력이니까."
그 전력의 대부분이 유리엣이지만, 그것을 보조하는 여자들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 집중할 건자신이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였다.
일라이는 다시 걸었다.
말을 타고 걷는 건 편할지라도 상대 저격수의 좋은 표적이 된다.
그래서 짐마차처럼 끌고 다니는 게 제법 불편했다.
"그나저나 일라이. 너 정말 레피나에 대해서 모른다."
"아까부터 자꾸 개소리네. 뭐라는 거야?"
일라이가 아넬을 흘겨보며 한숨을 쉬었다.
레피나에 대해 뭘 모른다는 것일까?
사실 여자들은 쉴 때도 서로 같은 공간을 공유하니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많았다.
그 깊이는 일라이 이상이라 할 수 있었다.
"레피나는 너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 해. 그래서 다루기 힘든 빛의 힘을 치유말고도 다른 방식으로 쓰려 한다고."
"엥? 레, 레피나가?"
최근에 섹스까지 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항상 까칠하게 있는 레피나가 그런 노력을 하고 있었다니.
입술을 적시며 일라이가 물었다.
"무슨 방법인데?"
"네가 아까 부족하다고 한 거 있지? 레피나는 보호마법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어."
"그거 힘들 텐데…그래서 레피나 녀석도 초장에 보호마법은 버리고치유에만 올인한 거고."
"호호, 역시 그렇구나. 그 정도로 노력한 거면 얼마나 진심인지 알 텐데에?"
일부러 놀리듯 묻는 아넬.
일라이는 가볍게 그녀의 가랑이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헤집었다.
그러자 아넬이 경악하며 밑으로떨어질 뻔하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그녀가 뭐라고 따지기도 전에 일라이는 생각에 잠겼다.
'그 어려운 걸 하려고 하다니. 기특하네. 나를 위해서인 것도 있지만, 자기 힘을 키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음을 깨달은 거겠지. 다행이다.'
이 자리에 없는 레피나를 떠올리며 훈훈하게 웃는 일라이.
만약 레피나가 보호마법 적응에 성공하면 정말 큰 전력이 될 것이다.
보호마법 자체를 유리엣에게만 의지해야 하는데, 거기에 레피나라는 옵션이 추가되는 셈이다.
그리고 본래 보호마법의 오리지날은 빛의 힘이다.
그 빛의 힘을 다루는 레피나라면 분명 훌륭한 보호마법을 보여줄 것이다.
"자, 모두 그만 떠들고. 집중하자, 오늘 내로 아까 내가 말한 명심할 것들을 다 이뤄야 하니까!"
"헤엥, 하여간 악덕왕자님이라니까."
농담하듯 가볍게 말을 내던지며 우린이 웃었다.
나머지 여자들 역시 동의한다는 듯 웃어버렸다.
일라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그리메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이미 그리메에 묻어 있던 피는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