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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화 〉지하도시의 안내인, 말발굽녀 (42/100)



〈 42화 〉지하도시의 안내인, 말발굽녀

검술 아카데미에 찾아온 어느맑은 날.
수련장에서 한참 검술 수련을 하고 있던 일라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마법에 의해서 수련장의 천장이 개폐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아름답게 내리쬐는 햇빛을 보며 쓰게 웃었다.

"슬슬 학년심사있는데. 날씨는 오질라게 좋구만."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제아무리 재능을 타고난 일라이라 해도, 검술 아카데미의 학년심사는 지옥에 가깝다.
왕국이 운영하는 검술 아카데미는 처음부터 끝까지 실증주의에 입각한다.
실력이 좋다면 올라갈 것이며, 그게 아니라면 남아 있거나 아래로 떨어지는 식이었다.
물론 이 와중에도 가문이나 혈통 믿고 위로 올라가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일라이,  혼자서 궁시렁대는 거냐?"


긴 갈색머리칼에 은빛 수습생복을 입은 여자가 나타났다.
비대칭 가르마를 지닌 채로 이마를 드러낸 이 여자의 정체는 '멜리아 크루폰네르' 였다.
검술과 항해로 이름이 높은 크루폰네르의 차녀이며, 항상 무미건조한 표정을 짓고 다녔다.
살짝 째진 눈은  자체로도 매력적이었으며, 또래에 비하면작지만 윤곽이 예쁜 B컵 가슴을 지니고 있었다.
멜리아가 유일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는 바로 라이벌인 일라이를 대할 때였다.

"…멜리아. 넌 이미 확정 아니냐? 이론수업에서 만점 받았다며."
"하지만 심사는 보려고."
"왜? 사서 고생하는 게 취미냐?"


수습용 검을 내려놓고 일라이가 땀을 닦았다.
아직 한여름도 아닌데 벌써부터 더웠다.
이런 기상이변은 흔히 세계멸망의 지표로 나타나지만, 관심을 가지는 이들은 없었다.
허리춤에 손을 얹으며 멜리아가 대답했다.

"딱히. 도전을 싫어하는 성격은 아니거든."
"잘난 귀족나리께서 지랄을 하시는군. 누구는 이론수업에서 1점차이로 라이벌한테 밀려서  짓거리 중인데."
"이론 자체는 몰라도, 이론을 배우고 응용하는 건 결국 실증주의적인 면에 입각하니까. 당연한 거야."
"닥쳐, 기분 더러우니까."

수습용 검을 들고 햇빛을 받아내는 일라이.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멜리아가 머리칼을 쥐었다.
그리고 조금씩 꼬며 물었다.

"이번에 올라가면 최고학년이야. 파티라도  거냐?"
"앙? 완전이수한 것도 아닌데 뭔 파티?"
"너도 알겠지만 이번 우리 기수가 역대급이라 평가받잖아? 솔직히 단기간에 이 정도로 올라온 학생이 우리 기수 말고 더 있냐?"
"너 말고 나머지 6명도 그렇게 생각할 지 모르겠다."
"걔넨 워낙 무미건조한 애들이니까."
"네가 그런 말하니까 웃겨. 아무튼 파티는 없어."

햇빛으로 검신을 빛내던 일라이가 바로 칼집으로 되돌렸다.
오늘 수련은 이만하면 된 것이다.
더운 날에 무리해서 좋을 건 없다.
대부분 좋은 시설로 이뤄진 곳이 검술 아카데미다.
하지만 이런 막무가내 날씨라면 차라리 기숙사 안에서 검을 휘두르는게 나으리라.

"아무튼 잘 해보자고. 누가 먼저 완전이수하는지 겨루는 거야."
"하아, 멜리아. 너 진짜   없구나? 누가 이수하든간에……."


칼집에 왼손을 올려둔 채로 걸어오는 일라이.
그가 걸어오자 멜리아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마주 쳐다봤다.
이번 일라이의 기수는 엄청난 수준이다.
가히 천재들의 집합이라 불릴 정도로.
하지만 역시 이 둘을 빼놓을 수 없었다.
검술 아카데미의 역사에서 역대급으로 찬사받는 라이벌 구도였으니까.

"나중에 여기 나가고 나서 잘 해보자고. 여기서 잘 해봤자 결국 시시한 몸풀기일 뿐이야."
"훗, 일라이. 너 다운 말이네."

멜리아가 가볍게 받자일라이는 혀를 차며 그녀를 지나쳐갔다.
적어도 검술 아카데미에서 지내던 날 중, 가장 감정교류가 풍부했던 순간 중 하나.
그렇기에 일라이에게는 유독 기억에 남은 순간이었다.
이제 다시는 돌아올  없는 순간이기도 했다.



***




"억, 어어……."

타닥타닥- 치익-


근처에 불을 내뿜으며 타들어가고 있는 모닥불이 보인다.
 잠에서 깨어난 일라이는 일어나려다가 뒤통수를 매만졌다.
다른 곳은 괜찮은데 유독 이곳이 아팠다.
아마 떨어지면서 어딘가에 부딪친 것 같았다.


'심하게 부딪치진 않았나? 피가 말라붙은 것도 없고. 제기랄, 근데 여기 어디야?'


지하도시는 사실 깊이를   없는 지역이다.
그래서 지하도시에 왔다고 생각해도, 그보다 더 밑으로 내려갈 수도 있었다.
그만큼 지하라는 곳은 끝이 없었다.

'모닥불? 누가 피워둔 건가? 그럼 적어도 내게 호의적? 아니야…여긴 지하도시야.'

방심하지 않기로 결심하며 일라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 그리메와 칼집이 없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표정을 찌푸린 일라이가 어금니를 깨물고 있을 때였다.
근처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마치 말이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소리 같았다.

'다행이다. 내 말은 무사하구나.'

그나마 말이 무사하다면 어떻게든 이곳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 되면 운이 따라줘야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모닥불의 영역에 들어서며 모습을 드러낸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오, 일어났나? 인간 주제에 제법이군."
"너는…누구지?"

하체는 말, 상체는 인간의 것을 지닌 켄타우르스였다.
머나먼 과거에 있었던 '12년 전쟁'의 주역 중 하나이며, 그때를 기점으로 쇠퇴하던 종족이기도 했다.
말의 몸을 지녔기에 체력과 지구력이 상당하며, 육체적으로 우월한 종족이라 강력함으로 따지면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문헌상에서만 보던 종족을 실제로 보게 되니 일라이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놀란 거야? 하긴,우리 종족이 모습을 감춘 것도 좀 된 얘기니까."
"…크흐."
"아, 미안. 나는 그냥 말발굽녀라고 불러. 진짜 이름은 따로 있지만, 우리 종족은 친한사람에게만 이름을 알려주거든."

외우기도 쉬운 단순한 별칭, 말발굽녀.
일라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일라이. 내 검은 어디에 있지?"
"이거말이구나?"

기다렸다는 듯 그리메가  칼집을 들어보이는 말발굽녀.
일라이의 표정에 변화가 생기자 그녀는 피식 웃었다.
웨이브진 진녹색 머리칼을 다듬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말발굽 소리가 깔끔하게 들려서 이질감은 상당했다.

"이곳에서 인간을 보는  어려운데. 적어도 이 층에서는 말이야."
"지하도시를 지나다가 땅바닥이 가라앉더군."
"그래서 떨어진 거구만?흐음……."

말발굽녀는 칼을 돌려줄 생각이 없는지 계속 질문을 하려 했다.
그러자 일라이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힘으로 뺏을까? 육탄전을 꺼리진 않지만 상대는 켄타우르스다.'
'내가 배운 게 맞다면, 저놈들은 어릴 때부터 나무를 뽑으며 다니는 괴물들이야. 정면대결은 무리야.'
'기습을 할까? 근데 저 년이 방심을   같지가 않아. 방심만 한다면 단숨에 목을 따서…….'

하지만 일라이의 고민은 끊어졌다.

"야, 그런 표정 짓고 있으면 무섭잖아? 내 목이라도 따고 싶은 거야?"
"크흐…칼을 돌려줬으면 하는데."
"네 무기니까 돌려주긴 해야지. 다만 궁금한 게 있어. 아, 이거만 묻고 줄 테니까 살벌한 표정  거둬."
"뭔데?"

뻔뻔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말발굽녀의 모습.
그녀는 능글맞게 웃으며 팔짱을 꼈다.
말의 하체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더욱 거대해 보였다.

"네가 잠들어 있을 때, 검을 살짝 보긴했어. 내가 다룰  없는 검이더군."
"당연하지. 그건 나만을 위한 검이니까."
"오, 그래? 그런데 너는 대체 누구이길래…피를 먹는 검을 가지고 있지?"

말발굽녀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짧은 변화에 일라이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리메가 피를 먹는 검?
지금까지 사용하면서 처음 알게  사실이었다.


"피를 먹어?"
"아주 흠뻑 먹었더군. 아마 본래 무게는 이거보다 더 가벼웠겠지."


켄타우르스인 그녀조차 무게를 느낄 만큼 그리메는 무거워져 있었다.
일라이가 놀라자 말발굽녀는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그가 거짓말을하는  같지는 않은 것이다.
말발굽녀는 꼬리를 장난스럽게 흔들며 말을 이었다.


"대개 이런 검은 다루기 어렵지. 왜냐하면 피를 마시면서 무게가 무거워지고, 따로 내재된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면그저 무겁기만한 검이 되니까."
"나도 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어. 하지만 어떤 능력이 있는지는 몰라."
"그래?"
"응. 신의 나뭇가지를 축성했다는 사실밖에."


솔직한 일라이의 대답에 말발굽녀는 간을 보듯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없이 일라이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일라이에게 칼집을 던져주며 말했다.

"생각보다 솔직한 인간이네. 여기 계속 있을 건가?"
"음? 아…그건 아니야. 아마 위에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동료들이라. 그럼 타. 시간은 걸리겠지만 위로 데려다주도록 하지."

말발굽녀가 친절을 보이자 일라이는 당황했다.
이곳은 지하도시.
 어떤 싸이코나 범죄자를 만나도 이상할 게 없는 곳이었다.
인간은 물론이고 다른 종족조차 믿을 수 없었다.
혹여 이런 곳에서 성인군자를 만나더라도 절대로믿음을 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말발굽녀가 친절을 보이다니?

"잠깐,내가 누군 줄 알고 돕는 거야?"
"음? 딱히 근거는 없지만 좋은  같아서."
"내가?"
"원래 좋은 인간은 표정에 다 드러나. 너처럼 광대쇼를 하듯 표정이 계속해서 변하는 녀석은 호감까지 가고."

말발굽녀는 일라이를 좋게 보는 것 같았다.
호감까지 있다고 한다면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녀는 일라이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모닥불을 피운 것일까?

"야, 굽녀."
"굽녀?"
"이름  줄이자. 아무튼 너…내가 진짜 나쁜 새끼였으면 어쩔  했어? 네 친절을 받는 척 하면서 뒤에 칼을 박았다면?"


어두운 얼굴로 일라이가 물었다.
세상이 멸망하고, 인간들 사이에서는 불신이 퍼졌다.
하루에도 몇백 명이 죽는 참사가 흔하게 벌어졌다.
그리고 인간은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 대가없이 친절을 보이는 건 명백히 손해보는 짓이었다.

"흐음…어차피 내가 더 세니까 상관없지 않아? 나 이래 보여도 감은 좋아."
"좋아, 네 호의를 받아들이지."


일라이는 단숨에 말발굽녀에올라탔다.
기본적으로 말인지라 안정적인 느낌이 들었다.
말발굽녀가 적당히 달리며 물었다.

"그나저나 모험가야? 요즘 시대에도 모험가가 있구만."
"문명이 발전하고 있지만, 언제나 모험가는 있지. 요즘에는 바다로 나가는 이들도 많고."
"세상 좋아졌구만."
"아니, 그 반대야."
"반대……?"


일라이의 목소리가 가라앉자 말발굽녀가 돌아봤다.
그녀는 입고 있던 레더 아머를 헐렁하게 하고서는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얘기하자면 길지."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빠짐없이 설명하는 일라이.
처음에는 이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던 말발굽녀.
하지만 얘기가 갈수록 심각해지자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강대한 존재에 의해 세상이 멸망하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감이 들었다.


"요즘 지진이 흔하게 일어나더니…그 때문이었어?"
"아마도."
"칫, 그것 때문에 지반이 약해졌다고. 여기도 재수없으면 바로 무너지는 곳이 있단 말이지."
"제길, 위험한  아니야?"

이대로 달리면 또 빠질 수 있었다.
하지만 말발굽녀는 여유있게 웃었다.

"말했잖아? 감은 좋다고."

그녀가 한 말대로 쾌속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건 정말 신기할 수준이었다.
그 어떤 명마라도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 제대로 달리지 않는다.
하지만 말발굽녀는 존재 자체가 말이나 다름없기에 유연하게 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긴장하던 일라이도 갈수록 마음을 놨다.


"정말 신기한 여자로군, 굽녀."
"나를 여자로 봐주니 고마운데? 아무튼 이대로 위로 간다!"
"좋아, 달려 봐!"

일라이가 외치자 말발굽녀는 더욱 속력을 올렸다.
이대로 순식간에 위로 올라갈 기세였다.
일라이를 태운 채로 쾌속질주하던 말발굽녀는 살며시 다른 데로 시선을 옮겼다.
무언가 변화가 생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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