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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화 〉이제 믿을 건 지하도시 뿐이야 (41/100)



〈 41화 〉이제 믿을 건 지하도시 뿐이야

펠로르드 영지를 벗어나며 일라이 일행은 의기를 다졌다.
현재 인원에 비해 말들이 적으므로 일라이는 어제 레스레모나에 이어 우린을 카드로 돌려보냈다.
이렇게 해도 빠듯하게 말을 탈 수 있지만, 이것으로도괜찮았다.
햇빛이 찬란하게 비추는 오전.
일라이는 적당히 말을 달리며 말했다.

"이제 존나게 달려야 해. 한 이틀 달리면 '비경도'라는 마을에 갈  있어!"


비록 연고 없는 동방의 마을이다.
하지만 동방에 관련된 자하도 있고, 우린도 따지고 보면 이쪽과 문화가 비슷하니 나쁜 선택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현재 일라이 일행에게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
유리엣이 루밀다를 안은 채로 말을 달리더니 옆으로 왔다.


"그나저나 기후가 좀 바뀐  같은데?"
"어차피 세상 이렇게 되고 공통적인 거잖아? 아, 그거 감안해도  덥네."


덥다면 덥고, 심심하다면 심심한 영상 25도.
이쯤 되면 애매하게 덥다고 해도  정도다.
그래도 말을 달리기에 나쁜 수준은 아니었다.
적어도 동부전선의 낮에 비하면  정도는 혹한에 가까운 수준이다.
동부전선이 얼마나 열악한곳인지 알기에 일라이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나저나 언니는 잘 있으려나?"
"누나? 글쎄…그러고 보면 누나도 모험단하나 가지고 있지 않으려나?"


일라이보다 왕위계승순위가  높았던 그녀, '소르 브류스터드'.
그녀가 언급되자 모르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히 아넬은 일라이의 귓바퀴를 만져대며 물었다.


"누나가 있다고?"
"아, 응. 어렸을 때 모험하고 싶다며 왕성을 박차고 나갔지."
"크흐…우린이 있었다면 걸크러쉬라고 했겠다."
"걸크러쉬는 개뿔…덕분에 나만 평민들한테 어그로 끌렸잖아."


소르가 그렇게 떠나고 나서 일라이는 더욱 궁중 유명인사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방탕한 왕자였던 그의 이미지는 더욱 부각되었다.
그리고 그를 몰아내고 레피나에게 힘을 더하려는 움직임마저 있었다.
하지만 브류스터드 왕가에 왕자라고는 일라이 뿐이었다.
남자가 왕위를 받는 것과 여자가 왕위를 받는 건 사뭇 다른 얘기였다.
그 탓에 왕성  파벌구도가 조금 미묘하게 돌아가기도 했다.

"흥, 언니라면  하고있겠지! 누구하고는 다르게 머리도 좋잖아?"
"그거 꼭 내가 머리 나쁘다는 것 같다?"

일라이가 째려보자 레피나는 볼을 부풀리며 시선을 돌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르만큼은 레피나조차 인정할 만큼 강하고 현명한 여성이었다.
오죽하면 인간인 소르에게 하프엘프인 레피나가 반했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을까?
일라이 역시 그녀의 근황이 궁금하기는 했다.


'최근에 들은 얘기로는 북부전선 쪽에서 용병일을 하고 있다던데. 음, 모험단은 잘 운영하고 있으려나?'


용병단의 개념처럼 유능한 모험가들을 모아서 만든 집단을 소유한 소르.
그녀의 모험단이라고 하면 '블레스 모험단'이 가장 유명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왕성에서는 오직 일라이만을 우선시했다.

"하아, 지루한 왕성보다는 역시 이런 게 나아. 피곤하더라도."
"왕자님, 왕성이 그렇게 지루하셨나요?"

일라이의 말에 리비카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일라이가 헛웃음을 지었다.

"당연하지. 가끔 여자 데려오거나, 나가서 몰래 따먹고 오는 거 말고 뭐가 재미있어? 솔직히 검술 아카데미에 있을 때가 나았지, 왕성은 존나 지루했어."
"그, 그러시구나……."
"근데 너 왜 부끄러워 하냐?"
"네, 네? 아뇨, 아닌데요."
"아니면 말고."


갑자기 빨개진 리비카의 얼굴을 보고 일라이는 의문을 표했다.
그녀가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관점으로는 리비카는 일라이를 모시는 시녀.
그러므로 자신의 책임이라 느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건 완전히 다른 얘기였다.

"그나저나 대로가 반듯하게 남아 있네. 이건 신기하다."


루밀다가 말 위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말했다.
그나마 말문이 트이는 걸 봐서는 서서히 적응을 하는 것 같았다.
유리엣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자, 루밀다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다가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지금 이 순간만 놓고 보면 세상이 멸망한다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몬스터들이 일일이 이런  망치며 다닐 이유는 없으니까."
"응, 게다가 걔넨 사람들이 만든 길로 안 다니잖아?"


일라이의 말에 아넬이 받았다.
따지고 보면 몬스터들은 인간과는 사고방식이 다르다.
 닦인 길보다,  친숙하고 의외의 길을 가기 마련이다.
어차피 그들 눈에 잡아먹기 좋은 인간들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런 이유로 몬스터들에게 있어 영지나 마을은 좋은 식량창고나 다름없었다.
한참 달리다가 일라이가 먼저 멈췄다.

"잠깐, 이정표가 있는데?"


쓸쓸하게 홀로 남아 있는 이정표가 보였다.
총 4방향으로 설정되었는데, 그  한 곳이 아까 나온 펠로르드 영지였다.
나머지 3곳은 거리와 방향이 각자 다른 마을이나 영지였다.

"음? '고스 유적지'가 뭐지?"

이정표  하나를 가리키며 묻는 일라이.
일라이보다  공부를 많이 한 레피나가 혀를 차며 대답했다.

"아, 이 꼴통! 고스 유적지는 최근에 발굴된 지하도시가 있는 곳이잖아."
"앙? 그래? 나는 그런 문서는 본 적이 없는데?"
"바보냐? 너 문서 확인도 안 하고 인장  찍지?"
"오해할 소리마. 나도 나름…본다고!"
"안 보네."

둘이 티격태격하자 여자들이 웃기 시작했다.
특히 이 둘의 사이를 잘 아는 리비카는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소리내어 웃었다.
그것과 함께 일라이와 레피나의 시선을 동시에 받아버렸다.
리비카가 급히 정색을 하자 루밀다가 한숨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로 갈 지 결정하자고. 여기 계속 있다가는 지치겠어."
"온도에 민감하구나? 그렇다면……."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일라이는 히죽 웃으며 고스 유적지를 가리켰다.
조금 위험하긴 해도 이곳이 던전을 찾거나, 다른 눈을 피해서 길을 지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럼 고스 유적지로 간드아!"
"언제는 마을로 가겠다며?"


레피나가 따졌지만 일라이는 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런 상황에서 망설일 여유조차 없었다.
결국 여자들은 일라이의 결정을 따르며 급히 달렸다.
도중에 자하가 물었다.

"그런데 유적지라 해도 안전할  모르겠어. 지하도시라면 온갖 몬스터들이 들끓잖아?"
"이미 다른 몬스터들이 유입될지도 모르고."

자하의 말을 보충하듯 유리엣이 이었다.
충분히   있는 걱정이기에 일라이는 웃어넘겼다.
그보다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였다.
높게 주먹을 들며 일라이가 외쳤다.

"가장 첫 번째로 던전이 있기에 알맞은 곳이다. 물론 지하도시는 위험하지. 온갖 몬스터와 범죄자, 함정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곳이니까. 하지만 도전할 가치는 있어."
"도전할 가치라…역시 무모한 남자야."


아넬이 느긋하게 햇빛을 쬐며 말했다.
일라이는 잠시 아넬의 엉덩이를 만지며 놀라게 해주고는 말했다.


"게다가  위를 계속 달린다 해도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다고. 더 밑, 그보다  밑으로 간다 해도이 선택이 적절하다고 생각해!"
"하아, 단세포……."


결국 일라이를 설득하는 것은 포기하는 레피나.
리비카가 다시 웃었지만 이번에는 바라보는 사람이 없었다.
목적지가 결정되자 일라이는 더욱 신나게 달렸다.
말 달리는 게 서툰 사람도 없기에 여자들이 무난하게 따라오는  보였다.
입맛을 다시며 일라이가 아넬에게 물었다.

"별 일 없겠지?"
"그걸 나한테 묻니? 그리고 그런 곳에 가서 별 일 없길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야."
"뭐, 그야 그렇겠지. 별 없도록 해야지."

아무리 최악의장소라지만 지하도시는 기본적으로 도시였다.
운이 좋다면 멀쩡한 휴식처를 찾을 수 있었다.
게다가 유적지로 선정할 곳이면 '전이유리'가 설치되었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일라이가 레피나에게 물었다.

"레피나, 그럼 거기 전이유리 있겠네?"
"있지, 멍청아."
"전이유리라니?"


유리엣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에는 리비카가 나서서 대답했다.

"전이유리는 마법도구의 일종이죠. 쌍의 전이유리를 준비해서 하나는 지상에, 다른 하나는 지하에 놓고 서로를 비추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어두운 지하도시라 해도 밤낮의 구별을 어느 정도는   있어요. 지하도시의 천장에 전이유리를 붙일 만큼 고도의 노동력이 필요하지만요."
"호오…인간은 갈수록 신기한 걸 만드네."

새삼 인간의 기술력에 감탄하는 유리엣.
일라이도 몰랐던 거라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교육을 배울  더 귀를 기울일 걸.
하지만 그에게 일반적인 교육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실전이 아닌 이론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공식만 외우게 하는 것.존나 지루하지!'

일라이가 검술 아카데미에서  나갔던 이유도 결국 실증주의적인 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검술이란 게 이론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완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노력에 배신당하는 기사들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일라이처럼  나가는 이들이 몇몇 있을  있었다.
새삼 예전 그때를 추억하며 일라이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라이벌, 조력자, 그리고 출중한 실력에 외모까지 받쳐주던 여학우들이 떠올랐다.

'걔네 잘 있으려나? 각자 모험단 꾸리거나, 자기 가문을 위해 검을 쥐고 있을 텐데.'

검술 아카데미는 기수가 나뉘긴 해도 딱히 학년제도가 있지는 않았다.
비슷한 게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실력이 최우선인 곳이라 시간으로 학년을 재지는 않은 것이다.
그래서 다른 아카데미처럼 동창회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았다.

"오, 여기인가?"

드디어 유적지 근처까지 온 일라이 일행.
더워지는 바깥보다 적어도 서늘한 내부가  나을 것이다.
일라이 일행은 바로 유적지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있는 모습의 유적지 입구를 지났다.
아슬아슬하게 반짝이던 랜턴 불빛이 흐릿해지더니 결국 꺼졌다.
고래기름을 쓰는 랜턴들이 곳곳에 매달려 있는 내부로 왔다.

"호오…넓은데?"

입구를 지나 와보니 광활한 평야가 맞이해주고 있었다.
물론풀대신 새까맣고 가느다란 '죽은풀'이 있고, 나무대신 서늘한 곳에서만 자란다는 '용몸통나무'가 있다는게 차이점이었다.
더 멀리 바라볼수록 빛이 희미해지는 게 특징이었다.
아마 제국이나 왕국에서 보낸 조사단이 확장해놓은 영역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여기, 괜찮을까?"

여기까지 와서 갑자기 불안한 표정을 짓는 루밀다.
일라이가 텁텁한 공기를 털어내며 물었다.


"왜 그래? 걱정 말라니까."
"아니, 말을 통해서 느끼는 건데…여기 지면이  약한데?"
"지면이?"
"지진이라도 일어나면…아니, 지진이 아니라도 언제든지 무너질 것 같아."

말을 타고 움직이는 일라이 일행 특성상, 지반이 약한 곳을 가게 되면 무너질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사람이 움직여도 무너질지 어떨지 장담할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일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습격을 당한다면  위가 나아. 아무튼 이대로 빨리 지나가자고!"


평야를 지나면 바로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도시에 들어설 것이다.
거기서부터 사실상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일라이가 먼저 승마술을 뽐내듯 부리나케 달렸다.
그 뒤를 여자들이 뒤쫓으며 속도를 더했다.
질주하는 말 위에서 일라이가 크게 웃었다.

"유후우! 이렇게 달려야 제맛이지!"


다그닥다그닥- 콰직- 지지직-!


무언가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일라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유후우우우!"


다그닥다그닥- 지직- 우지끈- 콰직-!

그때 더 버티지 못한 지반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여자들과 거리를 벌리며 달리던 일라이가 말과 함께 아래로 추락했다.
난데없이 공백이라도 생긴  지면이 뻥 뚫려버린 것이다.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던 아넬이 곧장 속박 마법을 사용했다.

"일라이!"
히힝-!


그러나 속박마법은 일라이가 아닌 말을 잡아두는 것에 그쳤다.
하필 중요할 때 실수를 한 아넬이 울부짖었다.
그 소리가 허망하게 울려퍼지며 일라이는 사라지고 말았다.
영원히 어둠속으로 빨려들어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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