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싱싱한 던전을 찾아보즈아!
저택을 전초기지 삼아 던전을 찾기 시작하는 일라이 일행.
저택에는 유리엣과 레피나, 리비카, 루밀다가 지키도록 했다.
유리엣 하나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혹시나 싶은 변수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일라이는 아넬과 우린, 자하를 데리고 던전이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어으, 끔찍해. 뭔 시체밖에 안 보여?"
"그러게. 지하세계에 있다는 인간도축장도 이 정도는 아니겠네."
우린은 코를막았고, 자하는 먹은 게 올라온다는 표정을 지었다.
점점 시간이 지나 시체썩는 냄새가 역하게 났다.
도저히 맨 정신으로 지나갈 수 없는 곳이건만 일라이는 태연했다.
그 모습에 우린이 물었다.
"어이구, 왕자님. 그쪽은 괜찮아?"
"어제 실컷 봤거든. 무엇보다 우리가두려워할 건 이런 게 아니야."
"그럼?"
팔짱을 끼며 자하가 물었다.
일라이는 주변에 숨어 있는 몬스터가 없나 살펴보며 대답했다.
"루밀다를 구하면서 이상한 노파를 만났어. 마법을 쓰던데……."
"마녀인가?"
당장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아넬.
하지만 일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단순한 마녀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불길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전혀 상상치도 못할 존재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일라이는 침착하려 했다.
"생각보다 불길한 느낌이었어. 어머니를 위해 제물을 바치니 뭐니 하던데."
"그러고 보니 나도 도망갈 때 들었는데. 칠흑의 사도들이 어머니인가 뭔가 말하더라. 대체 그 어머니가 뭘까?"
우린이 내뱉은 의문에 모두가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상징적인 존재일지도 모르고, 말 그대로 모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대신앙에서는 신을 아버지나 어머니라고 하거든. 그거랑 관련된 걸까?"
자하가 침착하게 물었다.
아마 이쪽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여긴 것 같았다.
다시 어둠이 내리깔린 거리를 가로지르며 일라이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으로써는 확신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하지만 흥미로운 의견인 건 분명해."
"하여간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니. 재앙이다, 재앙이야."
마치 수능공부를 하는 것만큼이나 끔찍한 수준이었다.
우린은 고개를 저으며 이마를 문질렀다.
차라리 비라도 오면 이 냄새가 걷힐까?
아니, 더 심해질지도 모른다.
두 손을 깍지끼고 뒤통수에 대고 있던 우린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다른 사람은 몰라도 공주님을 놔두고 와도 돼?"
"그냥 던전 있는지 알아보러 가는 거야. 걔는 발이 느린 건 아닌데 급습에는 취약하니까."
모험가라면 알겠지만 파티에 힐러가 있다는 건 큰 것이다.
제때 포션이나 약을 구비하지 않는다면 자그마한 상처에도 죽을 수 있다.
그걸 미연에 방지하는 게 바로 힐러의 존재였다.
다만 힐러도 만능은 아닌 게, 기본적으로 신체능력이 뒤떨어진다.
우린처럼 마법사이면서 신체능력을 증폭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더더욱 급습에는 취약하다.
그러니 그저 정찰의 의미라면 이 멤버가 나은 것이다.
"후후, 일라이는 차도남이라니까."
"아넬, 헛소리하지 마."
한숨을 쉬며 일라이가 아넬의 말을 무시했다.
그때 우린이 아넬에게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아넬. 치느님이 있던 세상에 가본 적 있댔지?"
"응, 그게 어떤 세상이냐면……."
아넬이 우린과 함께 만담을 꽃피울 때였다.
자하가 자연스럽게 일라이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뭘 하든 너무 열심인 것 아니야?"
"나보다 다른 여자들이 열심이지. 나는 해야 할 일만 한다고."
"리더로서 모범이 되는 건 좋은데, 너는 인간이라고?"
인간이 아닌 자하나 레스레모나에겐 인간인 일라이가 매우 연약해 보였다.
물론 그는 강인한 인간이다.
그와 살을 맞대본 적이 있다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생각보다 스스로를 거칠게 굴리고 있었다.
루밀다를 구출할 때만 해도 그랬다.
"카드 속에 있을 때도 네 감정이 느껴지더라. 아름다운 꽃밭이지만 아무도 없는 세계. 그 세계에서 오직 네 감정만이 느껴졌어."
"카드에 있으면 그런 환경인가 보군?"
"다른 사람은 다를지도 모르지. 나한테만 꽃밭일지도."
"신기하네. 나도 들어가보면 좋을 텐데."
우스꽝스런 말을 하며 일라이는 쓰게 웃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힘이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만약 던전을 발견한다면, 필시 도움이 되는 곳이기를 바랐다.
여러 얘기를 하며 영지의 외곽에 도착한 일라이 일행.
본래 고철처리장으로 쓰이던 곳이 지금은 미티어에 당했는지 싱크홀이 나있었다.
신기하게도 영지에서 조사를 하려고 한 건지 줄사다리가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제법 튼튼하군. 여기로 내려가자."
일라이가 먼저 내려갔고, 그 뒤를 이어 우린과 자하가 함께 했다.
아넬은 허공을 날아다니면서 주변을 살폈다.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공기가 텁텁하게 느껴졌다.
당연하겠지만 인위적인 작용을 거쳐 만들어진 곳이다.
공기가 나쁜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읏차, 조심히 내려와."
과거에 쓰였던 것인지 지하도에 다다른 일라이 일행.
빛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줄 알았으나, 형광석 덕분에 시야 확보에 어려움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위험한 게 있는지 조사했다.
싱크홀의 가장 아래에는 지하도로 가는 양쪽의 길이 나있었다.
"음, 여긴 뭐지?"
우선 영지로 흘러 들어가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일라이.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10m 정도 나있던 길이 바로 끊긴 것이다.
아쉬움을 뒤로 하며 반대편 길로 눈을 돌렸다.
던전이 있다면 저곳일지도 모른다.
"한 번 가볼까?"
"그래……."
아넬이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이랑 자하는 좀 더 살펴보다가 뒤늦게 따라오기 시작했다.
일라이는 형광석에 의존해서 주변을 둘러봤다.
특별한 건 없었다.
그저 성인 3명이 나란히 걸을 만큼 비좁은 통로만 이어질 뿐이었다.
던전이라고 한다면 벌써 나왔을 것이다.
"이번에도 헛다리인가……."
일라이가 아쉬워할 때였다.
아넬이 그의 어깨에 앉아 있다가 옆을 가리켰다.
"엇, 일라이! 뭔가 그림이 있어!"
"음?"
지하도에 뭔가 그림이 있다는 건 이상하다.
일라이가 바라보려 할 때 아넬이마나를 작용시켜 불빛을 만들어냈다.
벽에 그려진 그림이 더 잘 보였다.
"어멋, 이게 뭐야?"
"헤에……."
우린과 자하가 동시에 흥미를 보였다.
벽에 그려진 그림은 마치 고대부터 남겨진 그림과 같았다.
사람으로 보이는 것들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고, 신으로 보이는 것이 세상을 빛내는 구도였다.
그러다가 다음 그림으로 넘어가면 빛으로 가득했던 세상이 조금씩 어둡게 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 나라를 세우고, 세력을 이뤄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신을 닮은, 하지만 더없이어두운 존재가 세상에 강림한 것까지 보였다.
"이게 암흑의 존재인가?"
인상을 쓰며 일라이가 벽을 쓸었다.
그림은 딱 여기까지.
그 다음은 없었다.
통로도 적절한 곳에서 막혀 있었고,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어찌된 일인지 몰라도 지하도 같은 곳에 오래 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게 수상했다.
"뭔가 으스스한데?"
자하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던전을 발견하진 못했지만 상당히 의미심장한 것을 발견한 셈이다.
그때 일라이가 아쉬움을 표했다.
"제길, 역사학자라도 있다면 바로 알아봤을 텐데."
떠올려 보면 지금까지 만난 여자들 중에 역사학자는 없었다.
가볍게 한 두번 따먹은 여자들 중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계약조차 안 한 잔챙이들이었다.
예전부터 인맥에 신경을 썼다면 좋았을텐데.
스스로를 질책하며 일라이는 입술을 매만졌다.
지금 당장 이 그림으로 뭔가 알아내는 건 어려웠다.
"왕자님, 가볍게 생각하자고. 지금 현실이 이 그림대로 되어가고 있는 거 아녀?"
그림을 가리키며 묻는 우린.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소름 돋을 만큼 그림의 구도와 현재가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본래 신이 있었는지 알 방법은 없다.
그러나 세상에어둠이 도래하고, 암흑의 존재가 나타난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때 아넬이 입을 열었다.
"멸망이 찾아온 건 맞는데, 저 시커먼스는 좀 다르지 않아?"
암흑의 존재를 시커먼스로 부르는 아넬.
일라이는 두 눈을 빛내며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무슨 말이야?"
"아니, 그렇잖아? 솔직히 세상 이렇게 될 때 나도 개기일식은 봤거든? 그런데 저 시커먼스는 본 적이 없어. 혹시 보신분?"
아넬이 의문을 제기하며 사람들을 둘러봤다.
조금만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세계멸망이 시작된 건 맞다.
모든 국가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흔하게 죽어나가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암흑의 존재가 강림한 건 본 사람이 없었다.
"그게 일식 아니야?"
우린이 한쪽 뺨을 받치며 물었다.
하지만 아넬은 그림을 가리켰다.
"아니지. 저기 보면 일식된 태양이 아니라, 명백하게 시커먼스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음…우리가 미처 못 본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본 사람이 없다는 말도 일리는 있어."
자하가 벽에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존재는 할 테지만, 암흑의 존재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정말 실존하기는 하는 것일까?
갈수록 의문이 더해졌다.
"돌아가자. 의문은 돌아가서 풀어도 늦지 않아."
"하아, 정말 모르겠네……."
이번에도 낙담하는 일라이 일행.
차근차근 줄사다리를 밟아 올라가며 한숨을 쉬었다.
정답이 아닌 의문만 가득한 현실이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풀리는 게 없기에 아쉬웠다.
'목숨이라도 부지하는게 다행인가?'
쓰게 웃는 일라이.
적어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
언제 또 죽을지 모를 세상이다.
자기 힘이지만 다루는 법조차 몰라서, 다음에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심하고 싶었다.
동시에 과감함을 잃기 싫었다.
"그나저나 여긴 어두워지면 더 암울해 보여."
자하의 왼팔을 안은 채로 걷고 있던 우린이 말했다.
새하얀 달만이 떠오른 풍경은 암울하면서도 신비하기 그지없었다.
달빛 하나에 영지의 어둠이 물러나면서도 서서히 뒤섞이고 있었다.
"원래 여기도 멋진 영지였을 거야. 그렇지?"
아넬이 추측하며 말했다.
일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입지 자체가 좋아서 왕래하는 행상인이나 모험가들이 많았을 걸?"
"으아, 아쉽다. 하필 세상이 이 모양이라서……."
자기 일처럼 아쉬워하는 우린.
우린과 친근하게 걷던 자하가 근처 건물을 둘러봤다.
전부 처참하게 파괴당했거나, 시체로 뒤덮인 징그러운 모습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아무튼 던전은 없었어. 내일이면 여기서도 나가야겠군."
"말먹이풀은 어때? 충분해?"
아무래도 동물에 가까운 자하이니 만큼 말들을 신경 썼다.
일라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있던 곳에서 말먹이풀을 많이 가지고 와서 괜찮아. 그것도 슬슬 떨어지고 있지만."
"정말 멀쩡한 곳을 발견하지 않으면 곤란하겠네. 쟤네도 움직인 만큼 많이 먹어야 하는데."
말들을 걱정하는 자하.
일라이는 가볍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따스함이 자하는 싫지가 않았다.
"걱정마, 잘 될 거야."
"하여간 근거도 없이."
아넬이 질투하듯 말했다.
근거는 없지만 그렇게 되기를 기원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러기 때문이다.
"근거가없으면 어때? 스스로 만들어나가면 되는 거야. 그래야 하는 세상이라고."
"흐아,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좋아지기를!"
특이한 말을 하며 우린은 기지개를 켰다.
일행들이 저마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암울한 세상이지만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
희망을 잃는순간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이다.
오늘 저녁은 뭘 먹어야 할지 고민하며 일라이는 더욱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돌아가면 지하도의 그림에 대한 얘기를 빠짐없이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이곳도 내일이면 끝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