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그녀와 다시 만나다
훌륭한 조교를 마친 일라이는 아넬을 어깨 위에 올려두며 물었다.
"불만 없지?"
"물론 없어. 이걸로 확실해졌거든."
"푸흐흐, 내가 너보다 위라는 거?"
"아니. 결국 넌 나한테 유혹당했다는 거."
아무래도 아넬 스스로 인정한다는 건 더 먼 뒤의 일일 것 같았다.
일라이는 포기한다는 의미로 한숨을 쉬며 앞으로걸어갔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때지만 아직 시간여유가 있다고 여긴 것이다.
피 비린내가 진동하는 거리를 지나 대장간이었던 곳으로 향했다.
대장간을 의미하는 망치 간판이 크게 걸린 곳이 보였다.
"쓸만한 무기가 있으려나?"
사실 리비카가 지닌 완력은 생각보다 준수했다.
예전에 검을 들고 레피나를 지키려 했던 것처럼, 그녀에게 줄 무기가 필요하기도 했다.
일라이가 턱을 괼 때 아넬이 손을 들었다.
"잠깐, 저거 뭐야?"
"대장간이잖아."
"아니, 그거 말고. 저거, 무슨 마차 같은데?"
아넬이 재차한 곳을 가리켰다.
누군가가 쓰다가 망가진 마차라 여기던 일라이는 대충 훑어봤다.
그러다가 표정을 바꾸며 다시 살펴봤다.
그 마차는 놀랍게도 노예상이 몰던 마차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과 함께 일라이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우와악! 좀 조심히 달려!"
"존나 조심히 달리고 있거든!"
이상한 말로 우기며 일라이는 마차를 향해 뛰었다.
노예상이 끌던 마차는 처참하게 망가진 채로 나뒹굴고 있었다.
안에서 피가 나오는 걸 보면 갇혀 있다 죽은 사람들도 많은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아니, 없던 걸로 하자.'
간신히 마인드컨트롤을 하며 일라이가 마차 내부를 살펴봤다.
형체를 알아볼 수없게 뭉개진 시체들이 즐비했다.
정확하게 크기를 재기 어려운 무언가에짓밟힌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일라이는 마른 침을 삼키며 주저앉고 말았다.
"제, 제기랄……."
"어윽, 아무리 나라도 저건!"
아넬 역시 고개를 돌리며간신히 구역질을 참아냈다.
두 눈 뜨고 보지 못할 광경이었다.
아마 지옥 밑바닥까지 가야 나올 만한 광경일 것이다.
일라이는 시체들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죽은 것일까?
"으으, 크흐으……!"
근처에서 들리는 신음에 일라이는 고개를 들었다.
아넬이 뭐라 묻기도 전에 그는 일어나서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가 벽돌이 무너진 곳으로 향했다.
놀랍게도 그곳에 언젠가 본 적 있는 노예상의 얼굴이 보였다.
"이봐, 살아있나?"
일라이가 다가가며 물었다.
피투성이였으나 간신히 숨은 붙어 있는 노예상.
그는 벽돌이랑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상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모, 모험가이신가? 살려주……."
"노예들은 다 죽었나?"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일라이.
노예상은 말없이 입만 열다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
"으흐, 다 죽었나?"
"크으……."
"아, 아니야. 하나 남았어. 에, 엘프였는데……."
"엘프? 누군데?"
"으흐윽, 노예 이름 따위 알게…뭐야? 몸은 작아도, 허으, 섹시한 년이었는데……."
일라이의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라면 루밀다일까?
대체 그녀는 어디에있는 것일까?
주변에 누가 오는지 살펴보던 일라이가 물었다.
"그건 어디에 있지?"
"으흡…살려줘…배가 고파."
"어디 있냐고 묻잖아."
묵직한 음성으로 묻는 일라이.
지켜보던 아넬조차 가슴을 졸일 만큼 살벌한 모습이었다.
물론 긴 시간동안 허기와 탈수에 지친 노예상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잡혀…갔나? 끌려 갔지……."
"어디로?"
"어흐윽, 알 게 뭐야? 씨발, 좀 살려줘어……!"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내는 노예상.
길게 한숨을 쉬던 일라이가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끼는 노예 같군. 어디로 끌려갔는지 떠올려라. 그럼 너한테 닭고기와 맥주를 주지."
"뭐, 뭣? 하지만 기억이……."
"잘 생각해봐라. 노예 여럿 관리하는 너라면 머리가 돌 거다. 네 스스로 살 길을 모색해봐라. 힘 있는 자에게 기회는 있나니."
지금 일라이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노예상을 회유하고 있었다.
어차피 다 죽어가는인간이다.
굳이 세심하게 보살필게 아니라, 써먹을 때까지 써먹어야 했다.
그리고 잔혹하게도 그게 정답이었다.
아넬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왕족이 잔인해지면 이 정도구나. 캬하…….'
물론 감탄 역시 하고 있었다.
어찌됐든 그녀에게 있어 일라이는 완벽에 가까운 인간이었다.
노예상이 우물대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아으, 하아, 알겠다. 북쪽, 북쪽이었어……."
"북쪽이면 영주성인데?"
"엥? 아니야. 내가 바라보던 방향이었는데."
"서쪽이군. 서쪽에 뭐가 있지?"
"내가 알기로는…흐으, 주요 행사나 세미나 같은 게 열리는 아카데미일 걸?"
노예상의 대답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루밀다가 잡혀간 위치까지 알게 된 이상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일라이는 그리메를 빼들고 노예상의 목에 댔다.
그러자 노예상이 표정을 찌푸렸다.
"으이, 씨발…장난해?"
"하나 묻자. 너는 그녀를 어떻게 대했지?"
"뭔 개소리야? 허흐, 얼른 도와줘!"
"그녀가 잡혀갔을 때 어땠나?"
"이 새끼가…흐히, 돌았나? 가랑이 벌리는 게 의무인 노예 따위, 어찌 되든 알 게 뭐냐고!"
노예상이 역정을 내자 일라이의 표정이 한층 싸늘해졌다.
그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그리메를 쥔 손에 힘을 줬다.
"그래, 잘 자라."
쓰컹- 푸지직-!
노예상의 목이 잘리며 피가 끈적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일라이는 바로 서쪽으로 향하며 숨을골랐다.
최악의상황을 염두해야 했다.
'루밀다가 잡혀 갔다. 분명 몬스터들에 의한 거겠지.'
'혼자서 해낼 수 있을까? 아넬의 서포트가 있다지만 몬스터가 얼마나 있을지 알 수 없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강하더라도 한 놈만 있는 것. 그리고 루밀다가 멀쩡히 살아있는 것!'
루밀다가 납치되고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노예상이 아슬아슬하게 살아 있던 것을 떠올리면 생각보다 얼마 안 됐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지금이 골든 타임이었다.
지금 그녀를 구출하지 않으면 영영 못 볼 것이다.
"일라이, 그 여자…너한테 큰 의미를 가진 여자야?"
"몰라."
"그런데 왜 그렇게 반응해?"
"몰라."
무성의한 대답만 늘어놓는 일라이.
빠르게 걷다 보니 어느새 건물이 보였다.
물불 가리지 않으려는 일라이를 보며 아넬이 혀를 찼다.
"하여간 남자들이란……."
"몰라."
역시 무성의한 대답을 하며 일라이는 그리메에 여전히 붙어 있는 노예상의 피를 털어냈다.
이러고 보니 그리메가 한층 무거워진 것 같았다.
전과는 다른 무게에 일라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왜 무겁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만큼 피로가 쌓인 걸까?
'상관없어. 공주님을 구하는 기사라 비웃음당해도 좋아. 끝까지 간다.'
건물의 정원으로 들어서자 근처에서 새까만 그림자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팔 다리가 가늘게 변한 인간 같았다.
그런데 얼굴은 까마귀와 흡사했다.
기괴하게 울어대는 그림자들.
그 그림자들을 훑어보며 일라이가 차갑게 웃었다.
"덤벼, 전부 조져 줄게."
"읏, 으악…일라이, 잠깐만!"
"서포트 부탁한다!"
그리고 왕자는 몽마를 어깨에 걸친 채로 돌파를 시작했다.
***
"허어, 하아, 흐우……."
"이이익, 일라이! 하마터면 당할 뻔했잖아!"
"어쨌든 다 족쳤잖아. 이기면 된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중에 괴조가 나타났을 때는 끝나는 줄 알았다고!"
잔뜩 화를 내는 아넬.
일라이는 몬스터들의 피를 뒤집어 쓴 채로 히죽 웃었다.
마치 싸움에 미친 광인 같았다.
"네가 아니었으면 진짜 위험했겠는데?"
건물에 들어와연회장에 들어선 일라이와 아넬.
여기까지 오면서 50마리에 가까운 다양한 몬스터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여독이 쌓인 채로 이렇게 싸울 수 있는 인간은 손에 꼽을 정도다.
정말 힘든 일이지만 일라이는 집념 하나로 해낸 것이다.
태평한 일라이의 모습에 아넬이 자기 이마를 때렸다.
"하여간 이해를 못 하겠어, 아주 그냥."
"됐어, 이제 내려와."
"뭐? 여기 내 자리거든!"
"이제부터 일대일 할라니까 내려와."
일라이의 말을 듣고 아넬은 놀랐다.
아직 한 놈이 더 남아 있다는 건가?
아넬이 급히 물러나자 일라이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리고 그리메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거대한 십자가에 묶여 있는 루밀다가 보였다.
루밀다 밑에는 양초 6개로 불을 피운 누군가가 있었다.
"으흐흐, 안 되는데…아직 의식이 끝나려면 멀었는데!"
길고 두꺼운 로브를 뒤집어 쓴 노파였다.
노파는 아쉬운 듯 눈을 부라리며 일라이를 노려봤다.
노파라기 보다 차라리 마녀라고 하는 게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걸리적거리는 의자를 걷어차며 일라이는 긴 탁자 위에 올라갔다.
"그 여자로 뭘 하려고?"
"흐히헥, 너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어머니께……그래, 어머니께 바칠 거니까!"
"어머니 타령은 개나 소나 하는군. 요즘 애새끼들 인성이 나빠진 이유가 이건가?"
"방해하지 마라, 여긴 어머니의 영역이다!"
"응, 좆 까."
도발과 함께 근처에 있던 촛대를 노파를 향해 걷어차는 일라이.
노파는 놀란 표정으로 있다가 히죽거리며 정면을 노려봤다.
노파 앞에 보랏빛 장벽이 생기더니 촛대를 튕겨냈다.
'마법사?'
생긴 것만 마녀가 아니라 하는 짓도 마녀와 비슷했다.
충분히 놀라운 일이지만 일라이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에 찬사를 보냈다.
벌써부터 승리를 확신한노파가 외쳤다.
"흐으헤헤헤헤! 어떠냐? 내겐 어머니의 은혜가 존재하노라."
"지랄하지 말고 덤벼. 아니면 그 여자 내놓고 꺼지든가."
"흐흐, 이 여자 말이냐? 그래, 너를 반병신으로 만든 다음, 이 년의 사지를 뜯어주마. 아직 숨은 붙어 있거든."
노파의 도발에 일라이는 문답무용으로 달려들었다.
그 모습이 무모해보여서 아넬이 외쳤다.
"일라이, 안 돼!"
탁자 위를 쏜살같이 달리는 일라이.
노파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다가 손을 바쁘게 휘저었다.
곧 노파 앞에 보랏빛의 인영이생기더니 일라이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암흑율법 마술 - 잔상 강타]
'명백한 마법. 그렇다면…….'
탁자를 박차며 위로 뛰어오른 일라이.
노파의 마법을 피하며 바닥에 착지했다.
약속이나 한 듯 노파의 마법이 날아왔다.
[암흑율법 마술 - 희망 끝 비명]
끼이아아아악-!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이 파동의 형태로 날아왔다.
일라이는 몸을 낮추며 간신히 피했다.
접근조차 어려운 상황.
생각대로 되어 간다는 듯 노파가 도발했다.
"어떻게 된 거지, 백마 탄 왕자씨?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자만하고 있군. 그건 좋지 않아."
"히히히, 너무 시시하잖나! 얼른 패기를 더 보이라고!"
한쪽 눈을 가늘게 뜨며 노파는 다시 마법을 준비했다.
그때 일라이가 모습을 드러내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노파는 예상이나 한 듯 마법을 날리려 했다.
그 순간, 일라이는 왼손에 숨기고 있던 것을 노파를 향해 집어 던졌다.
바로 빛바랜 청동잔이었다.
후우욱- 따앙-!
"컥……!"
마법을 사용하던 도중에 청동잔에 이마를 맞은 노파.
이마가 찢어지며 피가 튀었고, 일라이는 그 틈에 순식간에 가속을 하여 노파의 목을 향해 그리메를 내질렀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 송곳]
힘과 속도가 적절하게 배합된 찌르기가 노파의 숨통을 끊었다.
승리를 확신하던 노파는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싸움의 결과를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남긴 채로.
"후우……."
"일라이!"
노파의 시체를 다른 곳으로 걷어차며 일라이는 루밀다를 십자가에서 내렸다.
미약하지만 그녀는 아직 숨을쉬고 있었다.
일라이가 그녀의 머리를 쓸어주며 안도하고 있을 때였다.
아넬이 일라이의 어깨에 안착하며 물었다.
"살아 있어?"
"응."
대답을 마치며 일라이는 루밀다의 얼굴을 쓸었다.
그때 루밀다의 두 눈이 파르르 떨리더니 곧 제대로 열렸다.
마치 몇년 만에 일어난 것처럼 그녀의 눈은 미약한 불빛마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우으……."
"루밀다, 나야."
"너는 그…왕자?"
"응."
"양아치 왕자."
"…그래."
둘은 단숨에 서로를 알아보고 피식 웃었다.
루밀다가 손을 들어 일라이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때 봤던 것보다 더 지쳐 보였다.
루밀다를 내려다보며 일라이가 물었다.
"그때 미처 묻지 못한 것 좀 묻자. 나랑 계약할래?"
"무슨 계약인지 몰라도 상관없어. 적어도…이상한 사람에게 린치당하는 것보단 낫겠지."
[계약이 이뤄졌습니다!]
[루밀다를 '꽃벼림 기사단'에 추가합니다!]
마침내 이어진 두 사람.
일라이는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며 루밀다의 입에 짧게 키스를 했다.
아직 졸린기운이 가시지 않은 루밀다는 희미하게 윙크를 하며 다시 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