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6화 〉죽은 자들의 도시 (36/100)



〈 36화 〉죽은 자들의 도시

일라이 일행이 우여곡절 끝에 펠로르드 영지에 들어선 건 정오의 일이었다.
말 위에서 초췌한 얼굴로 있던 일라이가 주변을 둘러봤다.
루토리아 양식으로 이뤄진 거리와 주변 조형물이 우중충하게 보였다.
주변에는 시체나 새까만 피가 덕지덕지 튀어 있었다.
도시라고 하기에는 심히 난감한 곳이었다.


"제기랄…영주성 쪽은 어떨지 걱정되는데."
"우선 이 근처에는 인기척이 없다."

주변으로 귀를 기울이던 레스레모나가 말했다.
일라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걷게 했다.
적어도 편히  데가 필요했다.
하지만 영지가 이 모양이니 그런  바라기는 힘들 것 같았다.

"여기에 익숙한 사람이 있다고?"

레피나가 무심한 척 물었다.
괜히 그녀에게 짓궂은 미소를 날리며 일라이가 대답했다.

"응, 정확히는 노예상이지만."
"이젠 노예상하고 그렇고 그런 관계야? 쓰레기!"
"매도하지  마라."


레피나의 매도에 지쳐가는 것 같다.
일라이는 고개를 저으며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람이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미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건지 펠로르드의 모습은 괴악하기그지 없었다.


"저건 뭐지?"

유리엣이 한곳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을 보니 거대한 형체의 무언가가 무릎을 꿇은 채로 죽어 있었다.
 몸에 화살이나 십자창이 꽂혀있는  특징이었다.
새까만 피를 뒤집어 쓴 것을 보면 몬스터 같았다.
다만 크기 자체가 5m에 육박하는 거인이라는 게 문제였다.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군. 이 정도의 괴물을 잡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흐엣, 추악해!"

일라이의 말을 듣고 아넬은 그의 허리를 꽉 잡으며 몸서리쳤다.
죽어 있는 모습만보더라도 상당한 살기가 느껴졌다.
그런데 살아 있을 때는 어땠을까?
필시 상대하던 입장에서도  떨리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잠깐만요, 이 십자창……."
"어디서 본 거야?"

리비카가 유심히 몬스터의 시체를 내려다봤다.
새까만 염소의 얼굴을  몬스터는 고요하게 죽어 있었다.
 몸에 꽂힌 십자창이 제법 익숙했다.

"왕자님, 기억 안 나시나요? 예전에 '종교 세미나'에 갔을 때."
"음, 그때 가서 대충 얘기만 듣다가 잤는데."

일라이의 한심한 대답에도 리비카는 진지했다.

"그때 본 종단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분명 새하얀 복면과 수의를 입고, 십자가 형태의 창을 들고 있던 자들이었어요!"
"쯧, 성기사라도 된다는 거야? 하지만 그건 10년 전에 사라졌잖아?"
"성기사는 아닐 거예요. 그보다는 세계 종말을 거부하는 광신도에 가까웠죠. 이름이 아마……가리는 자였던  같아요."
"가리는 자?"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같기도 한 이름.
일라이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무리 광신도 집단이라지만 지금은 몬스터를 상대하는 입장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종말을 믿지않는 자들.
필시 몬스터를 향한 맹렬한 투쟁이 있었을 것이다.
일라이 일행이 좀 더 나아가니 가리는 자의 단원으로 보이는 시체들이 즐비했다.
어떤 시체는 허리 위로 남아나지 않기까지 했다.

"처참하군."
"해 떠있을 때 보니까 극혐이다."

레피나가 토할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맨 정신으로 보기 힘든 것들이 주변에 널려 있었다.
크게 한숨을 쉬며 일라이가 말했다.

"이 고약한 곳을 벗어나자고. 노예상이 살아 있으면 좋을 텐데."
"일라이, 노예상에 집착하는 이유가 뭐지?"

레스레모나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일라이는 그저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거창하게 말하기에는 애매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진심으로 루밀다가 살아있기를 바랐다.


'그 난리에서 어떻게 살아난 건지 모르겠네. 아무튼 제발 살아 있어라.'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일라이는 계속 나아갔다.
대충 펠로르드를 둘러 보니 멀쩡한 곳을 찾기 힘들었다.
처참하게 망가진 영주성은 물론이고, 대형 건물이나 민가들도 처참하게 박살나 있었다.
인간들의 시체만큼이나 몬스터들의 시체도 제법 보였다.
이곳에서 얼마나 치열한 싸움이 있었는지  수 있었다.
턱을 쓸며 리비카가 말했다.

"펠로르드의 전력은 바리언 이상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버티다가 끝난 걸까요?"
"아마 그렇겠지. 여기에 드래건이 왔었는지, 칠흑의 사도들이왔었는진 모르겠어.몬스터들만방문한 걸지도 모르지. 어쨌든 제법  싸웠을 거야."


지금은 죽어버린 투사들을 향해 애도를 보내는 일라이.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든, 이곳을 지키기 위해 싸운 점 하나만은 칭찬받아 마땅했다.
한참 더 둘러보다가 영주성에 들어왔다.
교각을 지나 한참 더 가니 처참하게 변해버린 공터와 정원들이 보였다.
영주 내외와 하인들, 그리고 외부 귀족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 저택들도 망가져 있었다.

"그나마 저기가 낫겠네. 저기로 가자."

레피나가 시야에 보이는 저택을 가리켰다.
그나마 다른 저택에 비해서 멀쩡해보였다.
2층형 저택이 세로로 반파되어 있었으나, 무너진 돌무더기가 엄폐물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럼 저곳으로 가보자."

아슬아슬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마굿간에 말들을 놓고 일라이 일행은 저택으로 들어갔다.
철문이 삐그덕거리더니 무겁게 열렸다.
앞장  일라이가 주변을 둘러봤다.
불을 켜려고 하니 전원이 들어오는지 켜졌다.


"흠, 다행이군."
"영주성 근처에만 시체들이 있는 것 같던데. 여긴 어떨까?"


아넬이 물었다.
그 질문에 유리엣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정도까지 왔으면 성에서 버티기보다 다른 지역으로의 도주를 선택했을 거야. 그러다 다 죽었을지도 모르지."
"정말 처참한 세계네."


새삼 현실의 암울함에 혀를 내두르는 아넬.
일라이는 지하까지 샅샅이 뒤지다가 고개를 저었다.
위험요소는 없는 것 같았다.
나머지 절반은 무너진 탓에 2층으로 올라가는 넓은 계단은 돌무더기에 막혀 있었다.

"강제로 부수려 하면 답이 없겠군."


생명체를 찾기가 힘든 곳, 펠로르드.
그야말로 죽은 자들의 도시였다.
일라이 일행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 쉬기 시작했다.
그나마 공통욕실이 있다는 점에서 위안거리가 되었다.

"하아, 여관 침대에, 다 무너져가는 건물 옥상에, 이제는 쓰러진 서재 위에서 자야 하네."
"어쩔 수 없죠, 공주님. 자, 판자에 식탁보까지 두를 테니 염려마세요."
"말세다, 말세."


세상 다 산 것처럼 말하는 레피나.
그녀의 비위를 맞추며 리비카는 능숙하게 판자를 구해서 위에 깔았다.
그 모습을 보며 일라이는 유리엣에게 말했다.


"나는  나갔다 올게. 여기 불이 언제 꺼질지 모르니 장작 좀 구해와야지."
"히힛, 나랑 같이 가!"

아넬이 폴짝 뒤며 일라이의 어깨에 올랐다.
고개를 끄덕이며 일라이는 그녀와 함께 저택을 나섰다.
다시 보니 정말 살벌하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하늘에 해가 떠있지 않았다면 악몽에나  법한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빌어먹을…정말 다 죽은 거야?"


일라이가 짜증을 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희망을 볼 텐데.
지금은 전혀 그럴 수 없었다.

"아까 섀도우 엘프가 말해줬잖아. 인기척은 없다고."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겠어. 만약  노예상이 살아있다면, 어딘가에도 생존자가 있을 거야."
"헤엥~ 그러셔?"


일이야 어찌됐든 아넬은 제3자나 다름없다.
원한다면 그녀는  세계를 떠나면 그만이다.
다만 일라이라는 남자에게 호기심이 생겼기에 그럴 수 없었다.
어깨에  채로아넬이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묘하게 음산해서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았다.

"노래 좀 바꿔."
"왜? 사랑노래인데."
"사랑노래는 지랄…멜로디부터가 개좆같구만."
"하여간 너는음율을 모르는구나?"
"미친소리 할래? 이런 시대에 음율찾는 미친년이 어디 있어? 아, 있네.  어깨 위에."
"체엣!"

토라진 얼굴로 일라이의 귀를 잡아당기는 아넬.
일라이는 표정을 찌푸리다가노예상이 있을 법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말을 타고 다니면되겠지만, 아직 남아 있을 몬스터의 주의를 돌리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런 곳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몬스터가 하나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일라이, 솔직히 살아남을 자신 있어?"
"당연하지. 이제 와서 쫄릴 리가 없잖아?"

자신있게 대답하는 일라이.
아넬이 기대하는 시선을 보냈다.


"뭐, 그래야 너 답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너무 암울하잖아? 계획대로면 너만의 기사단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아?"
"차근차근 인재들을 모으고 있어. 나쁠 것 없지. 이름만 정하면 그만이야."
"이, 이름이라니……."
"그래, 하나 생각났다. '꽃벼림 기사단'이라 해야지."

['임의의 그룹'의 이름을 '꽃벼림 기사단'으로 변경합니다.]


꽃을 벼리는 의미의 꽃벼림 기사단.
절세미녀들로 가득한 기사단에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물론 이런 괴악한 네이밍 센스는 아넬로부터 비웃음을 샀다.
그야말로 하렘왕다운 짓이었다.


"하여간……."
"뭐? 몽마인 너한테 비웃음당할 이유는 없다고."


바람새는 소리를 하며 아넬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일라이.
그는 막 코너를 돌며 다른 블록으로 향하다가멈춰 섰다.


첩첩- 우적우적- 쩝쩝-!


근처에서 게걸스럽게 식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일라이가 표정을 찌푸리자 아넬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들릴  말듯한 목소리였다.

"야, 어떡해?"
"제길, 소리가 너무 가까이서 들려. 저길 지나고 싶은데."
"돌아가야 할까?"
"그럼 시간이 아까워. 우선  보자."

일라이는 조심스럽게 걷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에서 자신을 지우는 것처럼, 기척을 지우며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그리고 서서히 숨을 죽이며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본래 잡화점이었을 곳 앞에서 어떤 검은 형체가 웅크리고 있었다.
푸른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사지를 차근차근 뜯어먹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악랄한 행위에도 검은형체는 아무 감흥이 없는지 식욕을 드러내고만 있었다.

으적으적- 쩌걱쩍- 쿠득쿠득쿠득-!


막 다리 한쪽을 으스러트려 씹어 먹은 검은 형체.
자세히 보니 직립한 늑대처럼 보였다.
다만 라이칸스로프와는 다르게 꼬리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짧았다.
그리고 상태가 제법 비대했다.
상황을 보던 일라이가 조심스럽게 그리메를 빼들었다.

"헉, 어쩌려고?"


아넬이 조심스럽게 묻자 일라이가 고개를 저었다.


"죽인다."
"위험해!"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왔다면 저 여자는 살았을 수도 있었겠지. 내 앞에서 인간을 능멸하는 짓은 도저히 용서 못해."


결국 죽어도 왕자다.
그렇기에 일라이는 백성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해도, 제법 친숙한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왕족이면서 백성들과 어울리고, 평민들과 같은 상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남자.
누구보다 왕족으로서 사람을 좋아하는 남자였다.
어깨에서 아넬이 벗어나자 일라이는 검은 형체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기척 자체를 지우는 것에 능통하지는 않았으나, 최선을 다해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다가갔다.


으적으적- 꾸그극- 으적으적-!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거리가 충실히 좁혀지고 있었다.
10m, 7m, 5m, 3m, 1m, 그리고…코앞.


쩌억쩌억- 쩝쩝쩝- 으적으저억-


게걸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일라이는 극도로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메를 뒤로 당기고 있다가 순식간에 검은 형체의 목을 향해 내질렀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 송곳]

 힘을 다해 내지른 찌르기였다.
난데없이 칼이 들어오자 만찬을 즐기고 있던 검은 형체가 움찔거리며 숨 막히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후우욱- 후켁- 케렉-!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라이는 그리메를 두 손으로 쥐었다.
 상태로 전력을 다해 그리메를 위로 당겼다.
목을 꿰뚫은 상태에서 검은 형체의 머리를 순식간에 분해해버린 것이었다.
통쾌한 소리와 함께 검은 형체의 머리가 그대로 갈라지고 말았다.


푸화아악- 쩌르륵쩍쩍-!


제대로 반항도 못해보고 죽어버린 검은 형체.
일라이는다리와 팔을 하나씩 잃은 여성의 시체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녀를 잡화점 깊숙한 곳에 데려다 놓고는 다시 나왔다.
무덤을 만들어 줄  없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해, 해치웠어?"
"강한 놈은 아니었어.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휴우, 다행이다. 그냥 나한테 도움을 요청하지. 그럼 광대처럼 다가가지 않아도 됐잖아?"
"그러게. 너 은근히 존재감이 없다."
"뭐엇!"


자연스럽게 아넬을 디스하며 다음 블록으로 향하는 일라이.
아넬은 허공에뜬 채로 볼을 부풀리다가 바로 일라이를 따라잡았다.
둘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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