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극한의 이득
"공허를…직시하라……!"
위협적으로 안광을 흩뿌리며 쇄도하는 칠흑의 사도.
중갑을 입은 것 같지 않게 몸놀림은 생각보다 민첩했다.
일라이는 뒤로 물러나며 행동을 지켜보다가 경악했다.
지켜볼 틈도 없이 사도가 코앞까지 온 것이다.
"삼켜져라……!"
바우웅- 파칵-!
사도가 휘두른 대검을 반사적으로 피하며 일라이는 옆으로 텀블링을 했다.
대검을 휘두른 반작용으로 잠시 주춤거리던 사도가 다시 쫓아왔다.
이런 걸 보면 그도 인간은 인간인 것 같았다.
만약 인간이 아니라면 대검 무게에 대한 리스크가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 일라이에게는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바웅- 바우웅- 푸컥- 쉬학-!
"제길, 썅……!"
일라이는 피하기에만 급급했다.
기본적으로 대검은 일라이의 그리메보다 더 길고 굵다.
그야말로 크로스가드에 바위를 매달고 휘두르는 것과 같다.
고수들의 싸움이다 그렇지만, 거리에서 우위를 지닌 쪽은 주도권을 쥘 수밖에 없었다.
'당황하지 말자. 저 새끼는 나보다 둔해. 민첩해보이지만 어쨌든 둔해!'
검술 아카데미에서 숱하게 배운 것 중 하나.
싸움이 불리할 때 상대방의 강점이 아닌 자신의강점을 먼저 떠올려라.
이건 비단 일대일의 싸움뿐 아니라, 전쟁에도 통용되는 지식이었다.
"흐음……!"
바우웅- 퍼컥-!
사도의 대검이 근처에 있던 마차를 일도양단하고 말았다.
얼마나힘이세면 마차가 제대로 버티지도 못하고 두 동강이 나겠는가?
일라이는 어금니를 깨물더니 앞으로 튀어나갔다.
스스로 감당조차 힘들 만큼 빠른 속도였다.
최대한 속도를 내서 달려드는 일라이를 보며 사도가 비웃듯 눈빛을 좌우로 뿌렸다.
"목도하라……!"
사도가 검을들고 그대로 풀스윙을 했다.
칼 끝에 닿기만 해도 무엇이든 갈라질 것이다.
그러나 일라이는 영리하게 옆으로 몸을 틀더니 사선으로 굴렀다.
푸웃-!
대검이 땅에 박히자마자 일라이는 일어섰다.
그리고 사도의 옆구리를 향해 그리메를 휘둘렀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 추수]
극한의 상태에서 뿜어지는 빠른 횡베기.
그리메가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사도의 옆구리를 갈랐다.
단단해 보이는 흑갑은 생각보다 잘 버텨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 일라이는 생각했다.
'단단하다면 단단하다. 베기는 했지만 두 팔이 아릿해. 그리메가 명검이 아니었다면 역으로 튕겨 나갔겠지.'
인정하기 싫지만지금 사도는 괴물이었다.
대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르고, 사람이 입고다닐 수 없을 만큼 중후한 갑옷을 입고 있다.
이것만 해도 사기라 할 수 있겠는데, 그는 반사신경조차 좋았다.
"크흐……!"
옆구리를 베이자마자 바로 대검을 뻗었다.
막기 보다 피해야 하는 각도로 오고 있었다.
"흡!"
일라이가 옆으로 구르자 사도는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바로 대검을 대각으로 휘둘렀다.
이제 막는 건 물론이고 피하기에도 힘든 각도였다.
일라이는 그리메를 두 손으로 쥐며 전력으로 휘둘렀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 호랑이 잡기]
호랑이를 정확히 이등분 할 수 있을 만큼의 종베기, 혹은 횡베기를 날리는 기술.
기술의 정교함보다 힘의 정밀함이 더 중요해서 익히기도 어려운 기술이기도 했다.
이것을 일라이는 최적의 상태에서 발휘하며 뒤로 밀려났다.
말이 좋아 밀려난거지, 거의 날아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신없이 밀려나다가 겨우 멈춰 선 일라이가 한숨을 쉬었다.
"좀 하는데? 개새끼."
"어머니께서 은혜를 내리시리라……."
자꾸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사도.
일라이는 주변을 둘러봤다.
상당수의 경비병 시체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러다가 자신 혼자서 포위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는 천천히 카드를 살펴봤다.
조세핀은 아직 멀쩡해 보였지만, 영주성이라도 언제까지 버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심판한다!"
사도는뜨거운 입김을 뿜어내며 다시 돌진했다.
이번만큼은 영리하게 싸워야 한다.
스스로에게 외치며 일라이는 그리메를 고쳐잡았다.
'놈은 파워 스타일. 민첩함이 떨어지진 않지만 A급은 아니야. 그럼 내 밥이지. 이길 수 있어!'
일라이는 자신의 패기와 재능을 믿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싸워왔기 때문이다.
검술 못지 않게 창술도 훌륭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검에 뜻을 두었다.
왕자는 왕족이기 이전에 기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검을 쥘 때, 기사는 비로소 기사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끝을 보자고, 떡대."
쓰게 웃으며 일라이도 마주 달려왔다.
사도는 건틀렛을 낀 왼손을 뻗었다.
일라이의 멱살을 잡으려는 것 같았다.
뒤로 피하며 일라이가 거리를 두자 순식간에 대검이 근접했다.
[암흑율법 무기술 - 죄어 죽이기]
본래 채찍과 검의 혼합인 '절편검'이나 삼지창으로 해야 하는 기술.
사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기술을내지른 셈이었다.
일라이 역시 기민하게 대처했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 치고 빠지기]
그리메를 전력으로 휘둘러 대검을 끊어쳐서 위로 흘리는 일라이.
그와 동시에 빠르게 몸을 회전하며 다시 그리메를 휘둘렀다.
그리메의 끝이 사도의 헬름을 얕게 가르고 지나갔다.
상대방의 공격을 상쇄하고, 동시에 빠르게 역공을 전개하는 기술.
그만큼 몸에 무리가 갔지만 일라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크흐으……!"
이게 대련이었다면 사도는 조금씩 실점을 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마음이 조급해진 건지 무턱대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일라이가 히죽 웃으며 윙크를 했다.
"그걸 기다렸지, 짐승같은 새끼야!"
타타탓- 파악-!
일라이는 달려가다가 말고 몸을 크게 숙였다.
그리고 정면으로 슬라이딩을 하며 사도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렸다.
중갑은 견고하지만, 동시에 착용자가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역으로 짐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기사들은 대개 중갑을 입을 때는 승마에 의지한다.
사도가 볼품없이 쓰러지자 일라이가 빠르게 일어났다.
그는 두 눈을 무섭게 빛내며 단숨에 사도의 등을 향해 그리메로 찍어눌렀다.
파칵- 푸우욱-!
불쾌한 소리와 함께 사도가 일어나려고발버둥을 쳤다.
그러다가 그리메가 깊숙히 파고들자 부르르 떨며 숨을 거두고 말았다.
힘겹게 사도 하나를 처리한 일라이는 고개를 들었다.
주변에서 칠흑의 사도들이 뒷정리를 하는 게 보였다.
머지 않아 이곳에도 시선이 닿으리라.
"제길, 서두르자고. 그 전에…읏차!"
사도가 쓰던 대검을 간신히 들며 안장 근처에 걸어버리는 일라이.
그 상태로 말 위에 오르며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가긴 가더라도 사도들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물건을 하나쯤은 가져가는 게 좋다고 여긴 것이다.
일라이는 먼저 영주성 쪽을 경유해서 달릴 생각이었다.
"어디보자…이런!"
카드를 통해 상태를 보니 조세핀은 겁에 질려 있었다.
일라이는 급히 조세핀을 떠올리며 외쳤다.
"조세핀, 이리 와!"
그의 외침이 끝나자 허공에서 조세핀이 나타났다.
갑자기 장소가 달라지자 조세핀은 놀라더니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조세핀을 안아들며 일라이가 물었다.
"어디 안 다쳤지?"
"왕자님? 어흑, 왕자님, 모두, 모두 죽어버려서……."
"그래, 괜찮아. 이제 나랑 같이 도망이나 가자고."
"단 둘이서 말인가요? 그나저나 저는 어떻게 여기에……."
"얘기가 길다. 읏차, 우선 내 뒤에 타. 허리 꽉 잡고."
"네, 왕자님."
조세핀을 뒤에 앉히며 더욱 속력을 내기 위해 말배를 차는 일라이.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해버린 바리언영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다음 갈 곳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로 펠로르드 영지가 있던 쪽이었다.
노예상이 아무 생각없이 향하던 방향이기도 했다.
"꽉 잡으라고, 존나 빨리 달릴 거니까!"
"아하아아아앙!"
신음을 내지르며 일라이에게 몸을 밀착시키는 조세핀.
일라이는 조만간 그녀를 카드로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정면을 노려봤다.
검붉게 물든 거리가 다른 때보다 더 잔혹해 보였다.
***
다행히 가는 도중에 여자들과 만난 일라이.
그는 한숨을 쉬며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조세핀을 안아 들며 내려준 다음 여자들에게 걸어갔다.
"모두 괜찮지?"
"일라이, 괜찮아? 혹시 우리 모르게 죽은 건 아니겠지?"
레피나가 쏘아붙이듯 물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 어떤 응징이 가해질지 모른다.
일라이는 대답대신 사도가 쓰던 대검을 두 손으로 들어올렸다.
"그럴리가 있냐? 자, 이거 그놈이 쓰던거야."
"으아…저게 대검?"
아넬이 두눈을 크게 뜨며 지켜봤다.
유리엣 역시 대검을 유심히 지켜보며 턱을 괴고 있었다.
'검의 재질이 특이해.'
그렇게 생각한 유리엣은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동시에 레피나는 대검을 흘겨보더니 뒤로 물러났다.
척 봐도 불길한 물건이라서 그런 것이다.
"뭐, 뭐야? 들이대지마!"
"뭘 그래? 아무튼 이거 뭐로 만든 걸까? 이렇게 들기만 해도 힘 빠지는데."
"정말 신기하군. 이 정도의 검은 본 적도 없어……."
조심스럽게 대검을쓰다듬는 레스레모나.
그녀는 두 눈을 가늘게 뜨더니 대검을 말없이 쳐다봤다.
그리고 가려진 것을 살펴보듯 다시 검신을 쓸었다.
그런 행위를 반복하던 레스레모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에 뭐가 적혀 있는데?"
"어머, 정말요? 안 보이는데."
리비카가 검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보통 시력으로는 볼 수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레스레모나가 뭐라고 말하려 할 때 레피나가 조세핀을 가리켰다.
"그런데 저 아줌마는 뭔데?"
"조세핀. 바리언 영지의 영주 마님이지."
"뭐? 일라이, 그 틈에 또 좆을 놀린 거야?"
"시, 시끄러!"
당연한 일이겠지만 레피나는 헛바람부터 삼켰다.
도대체 그의 욕정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영지까지 무너진 마당에 같이 놀아난 여자를 데려오다니.
그 모습을 재미있게 지켜보던 아넬이 레피나의 팔을 안으며 말했다.
"혹시 모르지? 이참에 종족번식을 꾀하려는 걸지도? 우헤헹."
"시끄럿!"
아넬에게 쏘아붙이며 레피나는 일라이와 조세핀을 번갈아 노려봤다.
대체 이 둘을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세핀은태평했다.
"후훗, 이제부터 함께 하게 될 조세핀입니다. 잘 부타……."
"자, 거기까지. 이제 쉬어."
일라이는 바로 조세핀을 카드로 돌려보내며 한숨을 쉬었다.
이걸로 그녀는 조금 안심할 것이다.
적어도 어떤 것도 침범할 수 없는 이질적인 세계로 가버린 셈이니.
하지만 여자들은 일라이에게 물어볼 게 많았다.
"그래서 이제 어쩔거야?"
당돌한 레피나의 질문.
그때 리비카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이럴 때 던전을 찾는 건 위험할지 몰라요. 적어도 전초기지에 가까운 걸 확보해놓고 찾으시는 게 어떨까요?"
"아, 그건 걱정마. 우리는 펠로르드 영지로 갈 테니까."
일라이의 태평한 대답에여자들은 전부 놀랐다.
펠로르드 영지는 여기서 제법 먼 거리에 있는 곳이다.
하루 정도는 야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야생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기에 더더욱 위험하다.
영지가 멀쩡할지 아닐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일라이의 대답은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왜 하필 거긴데?"
"신경 쓰이는 게 있어. 그리고 신빙성이 낮지만 정보 중에 거기 근처에 던전이 있기도 하고."
"신경 쓰이는 거라면?"
레스레모나가 물었다.
살짝 뺨을 긁으며 일라이가 대답했다.
"그냥아는 사람을 슬쩍 본 것 뿐이야. 거기에 있을 것 같은데 어떨지 모르겠어."
"또 여자겠지, 어휴……."
이제 포기한 듯 레피나는 두 손을 들었다.
일라이가 으르렁거리며 노려보자 레피나는 마주 노려보며 연녹색 눈을 빛냈다.
그렇게 두 왕족이 싸우고 있자 유리엣이 적당히 나섰다.
"우선 그곳으로 가보자. 그리고 이 대검, 어딘가 불길해. 사수…아니, 레스레모나. 뭐가 적혀 있던 거지?"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문자야."
"혹시 몰라 나도 슬쩍 봤는데 모르겠거든. 아무래도 그걸 해석할 사람을 찾는 것도 중요할 것 같아. 어쩌면 저들에 대한 단서일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서두르자."
여자들을 독려하며 일라이가 먼저 말에 올랐다.
거대한 대검이 장식품처럼 안장에 걸려 있었다.
저마다 말에 오르며 여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시선을 맞추던 일라이가 먼저 달려나갔다.
바래가는 빛으로 물든 대로가 오늘따라 더욱 씁쓸하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