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습격, 칠흑의 사도들!
"흐어험, 으어아아아……!"
정오가 될 즈음에 일어난 일라이는 기지개를 켰다.
오랜만에 느긋하게 잔 것 같았다.
비록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일어났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슬슬 샤워를 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야! 너 죽을래?"
"하아…레피나. 뭔데?"
문이 부숴지지 않았을까 걱정하며 일라이가 물었다.
그녀가 얼마나 막무가내 로리인지는 이미 왕궁에서부터 유명한 사실이었다.
"이제 일어났냐? 또 집창촌 갔지?"
"이 년은 내가 뭐만 하면 섹스랑 결부지어. 아니거든?"
"그럼 뭐?"
"어제 어떤 이상한 놈을 만나서. 그래서……."
"어머, 왕자님! 설마 BL?"
갑자기 뒤에서 우린이 나타났다.
난데없는 소리에 일라이는 당황했다.
BL이라니?
"뭐, 뭐?"
"당황하는 거 보니 빼박이네! 엄허나핫……!"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쥐며 몸을 비트는 우린.
그녀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일라이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남자랑 연결짓다니.
이건 이것대로 무서운 사상이었다.
"어이, 잠깐만. 미쳤어?"
"어머멋, 알겠어요, 알겠어. 소문은 안 낼 테니 더 떠들어주세요. 공? 수?"
"뭔 개소리야? 어제 나한테 개겨서 죽여버렸는데!"
"완전히 죽여놓으셨어요? 어쩜…처음 만난 파트너를 그렇게 대하면 곤란해요! 이거 완전 짐승공이네!"
아무래도 그녀를 이해시키는 건 어려운 일인 것 같았다.
슬슬 같이 다니는 여자들의 정신상태를 고민해봐야 할 때라고 여겼다.
그때 레스레모나가 두 여자를 제치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조금 피곤해보이는 일라이를 보며 물었다.
"어제 새벽에도 나가는 것 같던데."
"가슴이 답답해서. 아무리 찾아봐도 내 능력이 뭔지 모르겠는 거야."
"답답할 만도 하군. 결국 답을 찾지 못한 건가……."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 하는 레스.
마음씀씀이로 치면 그녀를 따를 여자는 없을 것이다.
그 생각에 일라이는 간신히 웃는 얼굴을 감췄다.
'젠장, 나도 모르게 현모양처 같다고 생각했잖아!'
급히 표정을 바꾸며 일라이는 목 뒤를 주물렀다.
오늘도 날씨는 좋았다.
이럴 때 몬스터라도 나타나면 분위기가 싸해질 거라 여겨질 정도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여자들은 물러갔다.
우린의 이상한 오해를 어떻게 풀지 고민하며 일라이는 샤워를 시작했다.
"그나저나 어디까지 알아봤더라? 책은 거의 다 본 것 같은데……."
깔끔한 욕실 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며 묻는 일라이.
그는 어제 자신을 덮친 남자에 대해 떠올렸다.
발도술의 수재, 발지.
그가 사용하는무기도, 검술도 동방의 것이었다.
그럼동방에서 여기까지 온 것일까?
동방과 서역이 뒤섞인 에레스트 대륙 특성상, 그가 멀리서 왔다 해서 이상할 건 없다.
다만 그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하나가 된다니…동족은 뭐야?"
답은 알려주지도 않고 문제만 나타나는 형국이었다.
무언가 속 시원히 풀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샤워를 거의 마쳐갈 무렵,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던전을 찾아보는 건 보류할까? 이거…내가모르는일이 너무 많이 벌어지고 있어. 내 생각보다 변수가 더 많다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던전을 찾아보러 다니다가 죽을지도 모른다.
이미 어제 그 비슷한 일이 있었잖은가?
무엇보다 죽음에서 돌아오는 힘이 있다 하더라도 안전하진 않다.
그 능력이 뭐고,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모르는 이상, 일라이에게 희망은 없었다.
그래서 그토록 능력을 알아보기 위해 혈안이었던 것이다.
"생각 좀 해보자. 왕성에 있을 때 수석학자나 교수들이 뭐라고 했더라? 뭐든지 아는 현인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희미한 기억을 더듬던 일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왕성에서 있을 때는아무리 좋은 정보라도 여자에 관련된 게 아니면 흘려 들었다.
하물며 그런 정보를 이제 와서 떠올린다고 떠오를 리 없었다.
새삼 과거의 자신을욕하고 싶었다.
"제길, 이렇게 될 줄 몰랐다지만. 정말 너무하네."
한숨을 쉬며 일라이는 옷을 입었다.
과거에 대한 반성도 잠시, 그는 능력을 알아보기 위해 정보를 뒤졌다.
적어도 오늘 내로 답이 나오기를 바랐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여자들이 장난치는 줄 알고 일라이는 무시했다.
똑똑- 똑똑-!
노크는 집요할 정도였다.
일라이는 정보를 살펴보다 말고 짜증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자신만의 시간도 없어져 가는 것 같았다.
한 소리 해야겠다는 생각에 거칠게 문을 열었다.
"누군지 몰라도 왜……음?"
"후훗, 왕자님. 안녕하시와요?"
우아하게 인사를 하며 조세핀이 등장했다.
영주 마님이나 되는 사람이 갑자기 여관에 나타나다니.
그나마 주변이 조용한 것으로 봐서 들키지는않은 것 같았다.
실제로 그녀는 조금 허름해보이는 녹색 드레스와 오페라 가면을 쓰고 있었다.
일라이가 놀라며 물었다.
"당신이 왜?"
"들어가도 될까요?"
"으, 응."
예상치 못한등장이었다.
일라이는 탁자 위를 정리하며 조세핀이 앉는 것을 봤다.
다시 봐도 음란하기 그지없는 몸매였다.
"서류라도 정리하고 계셨던 건가요? 후훗."
"그냥 좀 일이 있어서. 왜 온 거지? 그 이상한 가면은 뭐고?"
"오늘 영주관이 조금 시끄러웠답니다. 갑자기 광장에 시체가 나타났다고 해서요."
조세핀의 말에 일라이는 기적적으로 표정을 유지했다.
자신이 했다고 밝혀도 될 테지만, 왕자라는 사람이 광장에서 사람 죽이고 뻔뻔히 있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우선 일라이의 표정을 살피던 조세핀은 히죽 웃었다.
그녀는 신고 있던 구두를 벗고 맨발로 일라이의 무릎을 더듬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 시대에 시체가 나타나는 건 그리 이상하진 않죠. 하지만…저는 그게 제가 아는 야성적인 분이 한 게 아닐까 싶어서요."
"흠, 금시초문이로군."
"어머나앗, 왕자님. 제가 비록 왕자님의 육노예라지만, 그래도 비밀은없었으면 해요. 저도 모두 보여드릴게요. 후훗."
음란하게 웃으며 조세핀이 일라이를 그윽하게 쳐다봤다.
마주 보기만 해도 체내 온도가 상승하는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심리전이라 여기며 일라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모르겠군. 경비병들은 뭐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정말 안타깝기도 하지."
"사람 하나 죽어나가는 거 우습지도 않은 세상이야."
"그렇죠. 하지만 제 말은…그 사람은 몬스터처럼 검은 피를흘리고 있더라고요."
"뭣?"
검은 피라는말에 일라이는 놀랐다.
왕성에서 몬스터들을 벨 때도 그것들은 검은 피를 흘렸다.
그런데 인간인 발지가 검은 피를?
확실히 발지를 벨 때만 해도피의 색깔에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가 검은 피를 흘리든 뭘 하든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정말 신기한 일이죠? 이제 인간도 몬스터를 닮아가는 걸까요? 아니면 몬스터가 인간인 척 하는 걸까요? 정말 무서운 세상이예요…후훗."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조세핀.
그녀는 적당히 일라이의 하체를 건드리다가 다시 구두를 신고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가 겨우 이 말을 전하려고 온 것같지는 않았다.
"조세핀, 진짜 온 이유는 뭐지?"
"여자의 육감이라고 아시나요?"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는 조세핀.
일라이가 가장 싫어하는 짓이었으나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특유의 감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까지도 여러 의견이 나오지만, 그 중에서 가장 지배적인 건 미래예지에 가까운 직감이죠. 아무튼 저 역시 여자이기에 그런 비슷한 게 있답니다."
"아, 그러셔……?"
어차피 조세핀에 대해 알아봤으므로 일라이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암살자로 써먹을 수는 있어도 예언자로 써먹을 수는 없다.
이제 와서 여자의 육감이라니.
하지만 그녀는 진지했다.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나면…저를 데리러 와주세요. 아무리 육노예라도 저는 여자로서 있고 싶어요. 왕자님 곁에 영원히……."
지금까지의 조세핀과는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모습에 일라이는 당황했다.
그녀는 정말 무언가를 직감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것일까?
조세핀은 흐뭇하게 웃으며 방을 나갔다.
그녀가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며 일라이는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 있으면…그냥 바로 소환할게. 그러니까 걱정말라고."
미처 해주지 못한 대답을 하며 일라이는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게 짐을 정리하고는 칼집을 들었다.
새삼 칼집이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이상하네. 요즘 부쩍 칼을 자주 써서 그런가? 왜 무거워진것 같지?"
칼을 자주 썼다는 것만으로 무거워질 리 없다.
별난 현상이라 여기며 일라이는 창가로 다가갔다.
오늘도 사람들은 평화롭게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아무 걱정 없어 보이는데."
한숨을 쉬며 창틀에 걸터앉은 일라이.
그는 지금 자신이 음유시인 같다고 여겼다.
류트의현이라도 튕긴다면 영락없는 음유시인일 텐데.
조세핀이 단순히 자신의 처지를 어필하려고 온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다른 분위기이기도 했다.
"갑자기 이러면 더 혼란스럽잖아."
어차피 육노예일 뿐이다.
그러려고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는 엄연히 여자였다.
좋아하는 사람을위해 화장을 하고, 옷을 꾸미고, 원한다면 가랑이까지 벌리는.
비록 그게 불륜을 벌이는 영주 마님이라 해도 말이다.
자기답지 않게 생각에 잠긴 것을 깨달은 일라이가 일어났다.
"아무래도 정보를 더……."
어차피 돈은많다.
이 참에 알아보고 싶은 건 다 알아보고 싶었다.
거리에는발지의 시체 때문인지 곳곳마다 경비병들이 보였다.
길드를 향해 가려던 일라이는 멈춰 섰다.
갑자기 밝았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진 것이다.
"뭐……?"
바웁바웁바웁- 히히히힝-!
그리고 난데없이 허공을 걷어차는 공허한 소리와 말들의 울음이 들렸다.
혹시 영주가 기병들이라도 데리고 온 게 아닐까 싶어 창밖을 바라봤다.
아니었다.
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정체불명의 기병들이었다.
심지어 하늘을 마치 대지처럼 질주하는 새까만 말들과, 그 말을 능숙하게 다루는 칠흑의 기수들이 보였다.
"뭐야…저게 뭐……?"
하늘을 가리키며 당황하던 병사 하나가 순식간에 창에 꿰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경비병들이 일제히 의문의 창에 관통당하며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혼란사태에 일라이는급히 짐을 챙겼다.
"이런 미친……!"
이를 악물며 일라이는 짐을 들었다.
비상사태다.
지금까지 숱하게 비상사태가 있었지만, 지금만큼 최악은 없었다.
우선 그는 짐을 들어올리며 방을 나섰다.
여자들 역시 위기를 느꼈는지 바로 나왔다.
"이, 이게?"
"얼른 튀어! 다 도망쳐야 해!"
일라이가 심각한 얼굴로 외쳤다.
그 누구라도 이길 자신이 있다던 왕자로 보이지 않았다.
레스레모나와 유리엣이 빠르게 인원을 점검하며 일라이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일라이 일행 말고도 다른 모험가들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 밖에 비명 들었어?"
"이게 뭔 꼴이야?"
"제길, 여긴 안전할 거라 생각했는데……."
일라이가 밖으로 나오며 문가에 있던 시동에게 물었다.
"애송아, 우리 말 좀 가지고 올래?"
"네? 하지만……."
"내가 엄호할 테니까 빨리! 다들 튀고 봐야지!"
다그치는 일라이를 보며 시동은 바로 마굿간으로 향했다.
그런 시동을 엄호하며 일라이는 그리메를 다잡았다.
어찌 됐든 도망가기 전에는 싸워야만 한다.
그런데 이 원초적인 공포는 무엇일까?
"크윽…진정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원초적 공포.
그것이 지금 일라이에게 도망가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하지만 일라이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죽음의 공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두려워 할만 하다.
그 죽음을 극복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일라이는 해내고 싶었다.
"모험가님, 여기요!"
시동이 능숙하게 말들을 끌고 오고 있었다.
일라이는 바로 지시했다.
"우선 우린과 자하는 카드로 돌아가 줘. 그리고 나머지는 빨리 말에 타. 빨리!"
다급한 지시에 여자들은 바로 움직였다.
우린은 자하와 함께 손을 잡고서 눈을 감았다.
새하얀 빛에 감싸이더니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안심한 일라이가 말을 향해 다가갔다.
푸슛- 파악-!
그러나 거대한 창이 날아와 일라이의 앞에 꽂히고 말았다.
창은 마치 석유에 물든 것처럼 새까맸다.
그 창을 던진 자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일라이!"
레스레모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일라이는 가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먼저 가."
"하지만……."
"괜찮으니까 먼저 가! 저 새끼 안 해치우면 계속 내 발목을 잡을 걸?"
"늦지 않게 따라와. 혼자서 또 멋대로 죽어버리면 죽여버릴 테니까!"
레피나가 앞으로 나서며 레스레모나 대신 외쳤다.
여자들이 일렬로 말을 달리며 영지를 벗어나자일라이는 숨을 골랏다.
그리고 남자를 향해 물었다.
"너 뭐하는 새끼냐?"
"우리는 칠흑의 사도. 어머니의 바람을 이루는 자식들이다."
허스키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새까만 갑주에 둘러싸인 남자가 대답했다.
풀헬름과 풀플레이트는 창처럼 새까맣게 물들어있었다.
광택조차 나지 않는 어둠을 닮은 흑색.
그리고 헬름의 틈 사이로 보이는 눈빛은 철저한 보랏빛이었다.
"마침 잘 됐어. 내가지금 식사도 못하고 좀 빡친 상태거든?"
일라이는 싸울 준비를 하며 주변을 흘겨봤다.
모험가들이 도망다니느라바쁘거나, 경비병들이 죽어나가면서도 칠흑의 사도들과 싸우고 있었다.
말을 달리며 창을 날리거나, 아예 질주하며 경비병들을 박살내는 칠흑의 사도들이보였다.
그럼에도 경비병들은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니까 내 제물이나 되어주라, 시커먼스 새끼야."
"어머니를 위하여……!"
칠흑의 사도가 두 눈을 짙게 빛내며 대검을 꺼냈다.
흑요석으로 만든 듯한 거대한 검이었다.
그 검의 위용에 일라이는 표정이 굳었다.
사방에서 살기가 몸을 찌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