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치명적인 그놈
"어으, 씨발. 도저히 못 하겠다. 하아……."
새벽 2시에 가까울 무렵.
혼자서 정보를 뒤지고 있던 일라이는 결국 침대에 드러누웠다.
기나긴 인간의 역사만큼, 선택받았다고 일컬어지는 자들이 사용한 힘은 천차만별이었다.
여러 가지의 종류와 도저히 종 잡을 수 없는 응용능력들까지.
하지만 도저히 비슷한 걸 발견하진 못했다.
"어디 보자…사제의 신성력은 당연히 아니고. 나는 신력을 받은 적 없으니까. 그렇다고 사령술은 더더욱 아니야. 잠깐이었지만 리비카를 만졌을 때 포근했으니까."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라이가 다시 말했다.
"그 다음이…아, 꼭두각시술? 이것도 아니야. 나한테 실이 달렸어, 뭐가 달렸어? 아니면 최면술? 제기랄, 모르겠다. 도저히 비슷한 게 없어. 다들 아리송한 것들 뿐이라고!"
괜히짜증만 났다.
밤을 샐 기세로 정보를 뒤적였지만 이렇다 할 게 나오지는 않았다.
옆방 여자들은 이미 자는지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다지 정보를 뒤적거리기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나름대로 피곤하기도 하니 이대로 자고 싶었다.
하지만 일라이는 일어났다.
"하아…일단 나갔다 오자."
가슴이 답답해서 잠깐 나가기로 결심한 일라이.
그는 정보를 하나하나 간추려서 모아놓은 다음, 얇은 외투를 걸치고 방을 나섰다.
새벽녘의 여관은 매우 조용했다.
가끔 근처에서 술마시는 모험가들의 말소리가 들리기는 했다.
"평화롭군."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는 시대.
그럼에도 평화를 모방할 수는 있다는 게 신기했다.
여관 로비에 내려오자 모험가 몇 명이 어두운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끄억, 어으…취한다. 더 취하고 싶다."
"미친놈, 그러다 바닥에 오바이트라도 해봐라. 개쪽이야."
"취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잖냐. 그 얘기 들었어? 서남쪽에 있다는 공허의 땅."
"거기가 왜?"
"거기서 나와버렸대…'검은 존재'들이."
"뭐라고?"
무슨 얘기인지 몰라 그냥 지나친 일라이.
하지만 좀 더 들어두는 게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기는 했다.
공허의 땅이라면 일라이도 알고 있었다.
본래 사람이 살던 땅이었으나, 멸망의 전초가 되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땅이었다.
그런 곳에서 대체 뭐가 나타날 수 있다는 걸까?
"하긴, 뭐든 나타날 수 있지. 빌어먹을 세계니까."
어차피 멸망일로를 걷고 있는 세계다.
이제 뭐가 나오더라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고 일라이는 차가운 칼집을 느꼈다.
밤이 되면 이곳은 묘하게 추워진다.
"이럴 때 여자 2명을 따악 끼고서 걸으면 좋을 텐데. 크히힛."
왕자였을 때 놀던 추억을 회상하는 일라이.
이제 더는 그때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자신을 떠받드는 백성들은 더 이상 없고, 그럴 나라조차 없다.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일까?
그럼에도 여전히 왕자라 불릴 자격이 있을까?
"히휴…뭐라는 거냐."
지금은 그저 머리가 복잡했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날뛰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왕자로 생활할 때는 모든 걸 단순하게 생각한 셈이다.
그래야 살기편했으니까.
댕- 댕- 대애앵-!
바리언 영지에는 광장이 있다.
그 광장 정중앙에는 자랑스럽게 시계탑이 솟아 있었다.
관리하는 데에만 엄청난 예산이 들지만, 이곳이야말로 바리언의 자랑이었다.
지금 그 시계탑을 올려다보며 일라이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잘 만든 시계탑이었다.
"흐트러짐이 없구만."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자니 조금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시계탑 위에서 몸을 던지고 싶었다.
그럼 죽을까?
아니면 거짓말처럼 다시 살아날까?
"므우움, 우얼우어얼……."
아무도 없는 광장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라이는 고개만 살짝 틀어서 목소리의 주인공을 노려봤다.
"아까부터 기척이 있었지. 뭣 때문에 숨어 있던 거냐?"
"찾…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호리호리한 체형의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키는 190cm 정도의 남자가 얇은 옷을 입은 채로 다가왔다.
그 모습은 심히 이질적이며 한기가 서린 것 같았다.
"허수아비 같은 놈이네. 나한테 용무라도 있나?"
"있지…당연히…크르릇."
사람이라기 보다 좀비에가까운 말투.
비틀거리며 다가오던 남자는 멈춰 섰다.
두 사람의 거리는 2m.
허튼 짓을 하기에 좋은 거리였다.
"넌 뭐하는 놈이냐?"
"나는…동검의 '발지'. 우리의 동족이 되어라."
아무래도 일라이에 대해 알고서 온 건 아닌 것 같았다.
남자를 살펴본 일라이는 소리없이 웃었다.
'칼집을 차고 있군. 제법 길어. 동양식 태도인가? 어떤 검술을 사용할지 기대되는군.'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겁부터 집어 먹었을 상황.
일라이는 오히려 흥미를 느꼈다.
그는 외투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물었다.
"동족? 나는 너희를 몰라. 그런 스카웃 제의는 효과가 없다고."
"우리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우리는 어디에도 없으나, 어디에나 존재하니까……."
목소리 자체가 듣기 매우 거북했다.
분명 1명이 내는 목소리인데, 여러 사람이 일부러 거북하게 목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일라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모르는 일이 또 일어나는 것 같았다.
"뭐, 망국의 왕자가 기꺼이 네 얘길 들어줬다. 하지만 여기까지인 것 같군."
"동족이…되어라."
"그렇게 못할 이유가 3개나 있다. 첫째, 너는 쭉빵 누님이 아니야. 둘째, 너희랑 동족이 되어도 쭉빵 누님과 이어지진 못할 것 같군. 셋째, 나한테는 해야 할 일이 있거든. 내 의견은 이걸로 끝인데, 불만 있나?"
살짝 고개를 까닥이는 일라이.
발지는 피리부는 것 같은 숨소리를 내더니 일라이를 마주봤다.
무언가에 조종당하는 것처럼 새하얀 동공을 지닌 발지가 입을 열었다.
"그럼…끌고 가주마……."
"그렇게 나오길 빌었지. 걱정하지 마라. 너 조지고 나면 시체는 그냥 버리고 가줄 테니."
"키에헤!"
반투명한 타액을 머금으며 달려드는 발지.
비틀거리며 다가오던 모습과는 다르게 절도 있고 힘이 들어간 모습이었다.
일라이는 발지의 움직임에 맞춰 뒤로 물러났다.
상대가 뭘 할 지 알 수 없다.
검을 들고 있지만, 그건 페이크고 마법을 쓸 지도 모를 일이었다.
"키에에!"
발지는 침을 튀기며 칼집에 있는 칼을 뽑았다.
그와 동시에 빠르게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해령검류 발도술 - 신월]
방심하다가는 인식조차 못할 것 같은 속도로 다가온 태도.
일라이는 마주 그리메를 뽑아들며 발도술을 상쇄시켰다.
상쇄하는 그 순간 철의 울림이 주변으로 퍼졌다.
태탱- 까아아앙-!
일라이와 발지는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호흡을 맞추듯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칼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일라이가 옆으로 비켜섰다.
발지는 칼을 칼집에 넣은 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동방에서 전해지는 발도술을 전문적으로 쓰는 것 같았다.
"흐앗차!"
일라이가 지그재그로 다가오며 그리메를 휘두르자 발지가 상체를 뒤로 눕히며 피했다.
동시에 일라이의 측면을 점하며 다시 발도를 했다.
[해령검류 발도술 - 반월]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힘이 들어가고 피하기 까다로운 각도였다.
그러나 일라이는 두 손으로 잡고 있던 그리메로 있는 힘껏 내지르며 다시 상쇄시켰다.
이번에는 일라이가 좀 더 뒤로 물러났다.
"제법인데? 원래 발도술에 속도말고 힘까지 담아내기는 힘든데. 맛이 간 놈치고 제법이야."
"죽인…다."
발지가 신속하게 칼을 회수하며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일라이는 히죽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곤란한데. 공격을 상쇄할 때마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고.'
무명의 검사라고 해도 발지는 상당한 수준의 발도술을 보이고 있었다.
일라이와의 힘 대결에서 밀리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일라이는 이미 발도술에 익숙했다.
검술 아카데미에는 비단 서역인들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발지처럼 동방에서 건너온 난다 긴다 하는 검사들도 즐비했다.
그럼에도 일라이가 최연소 이수자가 됐던 이유는 그가 그만큼 특출났기 때문이다.
'그래, 운명아. 나를 시험하고 있구나!'
일라이는 두 눈을 빛냈다.
지금까지 너무 안일하게 싸웠던 것 같다.
그러니 고작 이 정도의 검사가 죽인다고 달려드는 것이다.
그것에 자존심에 흠집이 나고 있었다.
"크하아!"
입술을 부르르 떨며 달려드는 발지.
그에 맞춰 일라이가 뒤로크게 물러났다.
발지의 발도술을 한 템포 늦추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발지는 한 술 더 떴다.
일라이가 뒤로 크게 물러나자, 발지는 순식간에 지면을 박차며 거리를 좁혔다.
[축지]
동방의 3대 보법 중 하나인 축지였다.
검술은 물론이고 무에도 어느 정도 성장을 이룬 검사였던 것이다.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비웃는 일라이.
"전력으로 덤비는 게 좋을 거야. 왜냐하면……."
"흐으하!"
[해령검류 발도술 - 변형 반월]
정면에서 달려들던 발지가 어느새 사라졌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뒤에서 나타나며 칼을 휘둘렀다.
발도술과 동시에 축지를 사용한 것이다.
찰나와도 같은 순간에 발지의 태도가 일라이의 뒤통수를 노리며 다가왔다.
바우웅- 샤학-!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리며 허공에 날렸다.
하마터면 머리 전체가 잘릴 뻔한 일라이.
그러나 그는 섬뜩한 느낌보다 오히려싸우고 싶다는 투지를 느꼈다.
지금까지 시시하거나, 초월적인 존재만 만난 것이다.
그나마 상대할 가치가 있는 자였기에 일라이는 머리카락 몇 가닥 잘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발도술 따위…이미 아카데미에서 다 족쳤어, 새끼야!"
일라이가 휘두른 그리메에 가슴이 크게 베인 발지.
그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다가 다시 검을 회수했다.
그리고 상체를 살짝 숙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지막…이다……."
"그래? 와라, 나 역시 진지하게 대해주지."
어쩌면 죽을지도 모를 싸움.
발지는 상체를 숙인 채로 가만히 있다가 빠르게 지면을 박찼다.
이번에는 절대로 인지조차 못할 속도로 일라이에게 달려들었다.
그 속도는 가히 찰나와도 다를 바가 없었다.
[해령검류 발도술 - 미완성 만월]
해령검류 발도술의 정점이라불리는 기술 중 하나인 만월.
칼집을 있는 대로 뒤로 뺀 채로 휘두르는 발도술은, 다른 발도술과는차원을 달리하는 속도와 힘을 싣는다.
그것을 원천으로 상대가 미리 대비하고 있다 하더라도 단숨에 신체를 갈라버릴 수 있었다.
비록 미완성이라 할 지라도 발지의 발도술은 훌륭했다.
적어도 이 영지에 한해서라면 말이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멸검 - 종식]
유리엣이 맨몸으로 받아냈던 기술을 다시 사용하는 일라이.
그는 웃음기를 띤 채로 순식간에 그리메를 내질렀다.
몸 속에 흐르던 기를 두른 채로 다가오는 그리메는 일개 명검이 아니라, 성문을 박살내는 공성병기와도 같은 기세였다.
그렇게 결과가 나버리고 말았다.
푸후우욱- 파칵- 쩌적-!
정면으로 발지의 발도술을 기술로 상쇄하는 일라이.
그는 그리메로 발지의 태도가 더는 못 오도록 막았다.
그리고 힘싸움을 할 사이도 없이 그리메로 발지의 태도를 산산조각내고 말았다.
파하아앙- 촤르르륵-!
박살나는 투지.
조각나며 떨어지는 태도.
그리고 그런 태도와 운명을 함께 하는 발지의 육체.
그리메가 압도적인 기운을 담은 채로 발지의 목을 꿰뚫어버렸다.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이미 발지는 숨을 거둔 뒤였다.
"힘도,기술도 형편없어. 검술 아카데미에서 만났다면 좋은 상대였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지금 나는…누구에게도 질 수 없거든."
마치 벌레를 보듯 발지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일라이는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머리칼이 살짝 잘린 부분을 손으로 쓸었다.
그때의 서늘함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Rest in peace다, 이 새끼야."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3번 치던 일라이가 여관으로 향했다.
승부는 이미 끝났다.
더는 관심조차 안 가는 상대에게 말을 걸어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마 이렇게 싸우고 나서 답답했던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답답할 때면 역시 싸움으로 푸는 게 정답인 것이다.
"다 덤비라고…죽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조져줄 테니까."
그리메를 칼집으로 되돌리며 일라이는 웃었다.
확신과 자신감으로 넘쳐나는 미소였다.
비록 과거이지만, 왕자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그는 차가운 밤바람을 뒤로 하고 여관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