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나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
"그래서 나 자신을 찾아서 여행을 떠나려고."
"그냥 길드에 네 힘이 뭔지 알아보러 가는 거잖아? 아주 지랄은……."
"크흠!"
여자들 방에 온 일라이가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쓸었다.
초저녁이 막 지날 무렵.
일라이 일행은 늦은 저녁을 먹고 한참 쉬는 중이었다.
도중에 바리언 영주로부터 전갈이 오기도 했지만 일라이가 무시했다.
저택에 초대한다느니, 좋은 담론을 나눠 보자느니 하는 시시콜콜한 얘기들 뿐이었으니까.
"아무튼 갔다 올게."
"갈거면 리비카랑 같이 가."
"아니, 딱히 필요는……."
"같이 갈게요!"
조금은 당돌해 보이는 얼굴로 나서는 리비카.
굳이 누군가랑 같이 다닐 필요는 없지만, 일라이는 그러기로 했다.
그는 떠나면서 특히 우린과 자하에게 당부했다.
"카드에 넣어두기 보다 자유롭게 지내게 하려고 이러는 거야. 문제 일으키지마."
"와, 너무해. 레스 언니한테는 아무 소리도 안 하면서!"
우린이 항의하듯 외쳤다.
그러자 갑자기 시선을 받은 레스레모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자연스럽게도 그녀는 계약을 맺었으면서 카드에 들어가지 않은것이다.
어차피 계약한다고 반드시 카드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건 아니다.
다만 일라이 일행은 여관방을 잡을 때 우린과 자하 없이 했으므로 그 점을 들키면 곤란했다.
"가자."
"네!"
일라이는 리비카와 함께 여관을 나섰다.
그는 서류도 되찾을 겸 길드로 향했다.
바람은 그나마 스산했고,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비록 세상은 멸망일로를 걷고 있지만, 바리언 영지 만큼은 평화롭게 느껴졌다.
"저…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왕자님이랑 이렇게 다시……."
"리비카."
"네?"
리비카의 말을 자르며 일라이는 턱을 쓸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그는 겨우 입을 떼었다.
"나나 너나 죽었다가 살아났어. 무슨 조화인지 몰라도, 마치 우리가 죽었다는 사실이 사라진 것 같단 말이지."
"그, 그렇죠?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본 적이 없어요. 신화에 나왔던 '구원자'가 아니고서는……."
고개를 젓는 리비카.
구원자라 하더라도 신의 분신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라이도, 리비카도 그저 인간일 뿐이었다.
특수한 피의 힘이 있다거나, 원래부터 선택받은 존재라거나 이런 사실은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너한테 받은 고백 있잖아. 바로 답은 못 하겠다."
화제가 전환되자 리비카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스스로가 살아있음을 느끼며 리비카는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왕자님……."
"지금은 워낙 그럴 때가 아니니까. 여흥을 위해서 섹스야 몇 번 할 수 있다지만, 그건 진지한 관계잖아. 안 그래?"
"맞아요."
"시간을 좀 줘. 내가 비로소 세상의 정점으로 우뚝 설 수 있을 때까지."
죽고 나서 일라이는 깨달았다.
자신은 강자다.
허나 자신보다 더한 강자는 얼마든지 많다.
스스로의 실력만으로 어떻게 해보지 못할 상황 역시 많다.
그러므로 자만하지 않는다.
만족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에 비하면 자신은 한낱 인간이기 때문이다.
"네, 기다릴게요."
희망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리비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것만으로도 좋았다.
지금까지 먼 발치에서 바라만 봐왔다.
그러니 기다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이렇게 살아서 왕자님과 같이 다니는 거…너무 좋아.'
살짝 고개를 숙여 미소짓는 리비카.
일라이는 길드에 도착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 본 여직원이 일라이를 알아보며 따분한 표정을 지었다.
"나 참, 바로 돌아오시는 거 아니었어요?"
"아, 미안."
일라이는 그녀가 건넨 서류더미를 안고 피식 웃었다.
둘이 생각보다 친근해 보인다는 생각에 리비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여직원이 한 발 앞섰다.
"저 분도 동료?"
"응, 내 시녀였던 사람이야."
"하긴, 왕족이 시녀 하나 없으면 이상하긴 하겠죠."
"어차피 망국의 왕자인걸. 아무튼 정보 좀 찾으려고 들렀어."
"이번에는 뭔데요? 아, 던전은 찾으셨어요?"
"그거 완전 개떡이던데?"
전부터 알아온 사이처럼 대화를 나누는 둘.
그로부터 소외감을 느낀 리비카는 시무룩한 얼굴로 근처 쇼파에 앉았다.
그나마 여긴 안전한 곳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놓을 뿐이었다.
일라이 근처에는 여자들이 많다.
가장 먼저 고백을 했어도 안심할 수 없었다.
'이러다가 빼앗기면…….'
리비카는 걱정했다.
일라이가 다른 누군가에게 가버린다면?
기껏 먼저 고백한 게 허사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일라이를 믿었다.
'기다려달라는 건 그만큼 진지하게 대해주고 계시다는 거야. 그래, 이제 더는 예전의 오만한 왕자님은 없어.'
사람은 한번쯤 죽어봐야 철이 드는 법.
그런 의미에서 리비카는 일라이와 묘한 공감대가 생겼다.
게다가 그에게 받은 선물을 여전히 가지고 있잖은가?
이것만으로도 우월감이 들었다.
"조금 이상하거든. 확실한 것 좀 줘."
"능력에 대한 거라면 퍼진 게 참 많죠. 우선 이것들로 가져가보세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능력의 총체? 제목 특이하네."
"예전에 어떤 괴짜 음유시인이 엮은 거예요. 지금은 판본이이것 하나만 남은 상태고요."
여직원에게 정보를 받아든 일라이는 바로 대금을 지불했다.
제목처럼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초상력은 생각보다 많다.
문제는자신이 셀레나도 인해 가진 능력도 여기에 있을지에 대한 것이었다.
던전 찾을 방법도 머리가 아픈 통에 이것까지 더해진 꼴이다.
일라이는 한숨부터 쉬었다.
"머리에 쥐나겠군."
"동료분들 없어요? 같이 찾아보세요!"
여직원의 당돌한 소리에 일라이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그래야 하나? 도움을 받긴 받아야겠지?"
"왕자님도 은근히 고구마시다."
"닥쳐, 나한테 있어 고구마는 거기뿐이니까. 갈게."
자연스럽게 섹드립을 하며 리비카와 길드를 나서는 일라이.
리비카가 일라이의 서류뭉치를 들며 물었다.
"이게 그 정보들인가요?"
"응, 던전을 찾을 생각이니까. 오늘은 허탕쳤어."
"아쉽네요. 다음에는 잘 찾아내실 거예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언제 뒤질지 모를 세상에서 칼춤추는 꼴이라고."
짧게 불평을 하며일라이는 리비카를 살펴봤다.
그녀는 걸어다니면서도 일라이가 사놓은 정보들을 살피고 있었다.
매우 세심하면서지나다니는 사람과 부딪치지도 않는 신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분명 참모감으로는 적절한데. 어딘가 아쉽단 말이야.'
자기도 모르게 리비카를 다시 평가하는 일라이.
그는 고개를 저으며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분간은 스스로에게 더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자신은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아 보였다.
'검술을 좀더 날카롭게 다듬자. 아무리 인간형태였어도 드래건이었어. 그런 유리엣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못 주다니.'
'잠깐, 생각해보니 그리메에도 능력이 있지 않나? 신의 나뭇가지를 축성했다면 필시 그 능력이 있을 텐데.'
'하지만 이걸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어. 내 스스로 알아낼 수밖에.'
생각을 하면 할수록 고민만 늘어나는 것 같았다.
쓴웃음을지으며 일라이가 바지주머니에 손을넣을 때였다.
갑자기 마차 하나가 느긋한 속도로 나타나며 거리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두 비켜섰으며, 일라이는 리비카를 보호하듯 안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 탓에 리비카가 얼굴을 붉혔다.
"어멋……."
"뭔 마차야?"
하필이면 좁은 곳으로 마차가 들어서다니.
나라의 기강이 서있던 때였다면 바로 큰소리를 쳤을 것이다.
마차를 보니 제법 덩치가 있는 마부가 술에 취한 모습으로 외치고 있었다.
"으흐헤하하하하! 노예 팝니다! 종족도 골고루, 취향도 골고루! 로리, 쇼타, 자웅동체 다 있습니다요! 푼돈만 내며고 취향대로 골라 잡으십쇼! 우흐헤헤헤헤!"
아무래도 흔한 노예상 같았다.
다만 성쪽에 관련된 노예상이라면 그 질이 좋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일라이는 팔짱을낀 채로 마차를 살펴봤다.
숨을 쉬기 위해 살짝 벌어진 창문 틈을 유심히 살펴봤다.
그곳에는 수많은 인영들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근처 랜턴빛을 받을 때, 그 인영들 중에서 익히 아는 얼굴이 보였다.
"음?"
일라이는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싶었다.
하지만 마차는 무심하게도 속력을 내며 사라지고 말았다.
떠나는 마차를 끝까지 지켜보며 일라이가 물었다.
"저 방향이면 어디로 가는 거지?"
"조금 신기하네요. 아직도 노예상이 살아 있다니. 음, 방향이 저쪽이면 '펠로르드' 영지가 있는 곳 아닌가요?"
리비카의 대답에 일라이는 표정을 찌푸렸다.
"길드의 말로는이 근처에 있던 영지들이랑 연락이 끊겼다는데."
"그럼 최소한 멸망했거나, 영지로서의 기능을 잃었겠군요."
"그래, 저 바보가 그걸 알 리 없겠지."
마음이 걸리기는 했지만 지금은자기 일에 충실해야 할 때였다.
그 잠깐 사이에 본 익숙한 얼굴이 누구인지 떠올리려 했다.
왕성을 몰래 빠져나와 만나던 창녀들 중 하나일지 모른다.
어쩌면 그저 잠깐 보고 지나친귀족여성일 수도 있다.
"걱정이 많아 보이세요."
"내가? 사실 요즘 좀 그래."
"어려운 시기니까 그럴만도 하죠. 그래도…힘들면 털어놓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털어놓는다라. 그것도 낫겠지."
일라이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리비카는 확실히 똑똑한 여자다.
그녀는 사리분별이 확실하고, 상황판단 면에서도 봐줄만한 수준이다.
조금씩이긴 하지만 그녀에게 관심이 기울어지고 있기도 했다.
고작해야 색욕에 미친영주마님인 조세핀도 의외의 소질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리비카라면 어떨까?
'한 번 해볼까? 잠깐…….'
예전 같았다면 문답무용으로 리비카를 덮쳤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씩 철이 들고, 한 번 죽어봐서 그런지 몰라도 망설여졌다.
리비카를 소중한 사람으로 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탕한 왕자가 마침내 왕족이 아닌 사람의 입장에서 타인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여관에 도착한 일라이는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리비카가 따라 들어오자 일라이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만 가지?"
"저…저는 이 여관이 처음이잖아요? 어디서 지내야 할까요?"
"아, 그렇지."
생각해 보니 리비카는 딱히 방을 배정받지도 않았다.
여자들이 지내는 방이 있었지만 여유가 될 지 알 수 없었다.
우선 일라이가 옆방을 가리켰다.
"여자들이 지내는 방이야. 설마 나랑 지낼 생각이 아니면 저기로 가라."
"저, 저는 괜찮은데……."
"뭐?"
"아, 아뇨! 그럼 필요하실 때 부르세요!"
말을 더듬던 리비카는 바로 옆방으로 들어갔다.
일라이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서류들을 탁자에 두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엄청나게 많은 숙제를 받아온 기분이었다.
"하아…철학자 '클라톤'에게 숙제를 받은 것만 같군."
불평을 해대며 정보를 하나씩 살펴봤다.
우선 던전에 대한 건 차치하고 능력에 대한 걸 먼저 알아보려 했다.
고작 한 권의 책이지만 분량이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사람이 수필로 쓴 판본이라서 군데군데 지워지기도 했다.
보자마자 두 눈을 찌푸렸지만 별 수 없었다.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냐."
고개를 저으며 다시 집중하는 일라이.
그러다가 핑거스냅을 하며 일어났다.
"이건 여자들한테 맡겨야지."
일라이는 바로 던전 관련 정보들을 들었다.
그리고 옆방으로 향하며 노크를 했다.
노크 소리에 나온 건 리비카였다.
"아, 왕자님!"
"이거. 미안하지만 다들 제대로 된 정보를 찾아서 간추렸으면 좋겠어."
"네, 그럴게요!"
"부탁해."
자기 일도 바쁜지라 일라이는 해야 할 말만 하고 바로 빠졌다.
다시 탁자 앞에 앉자 답답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정말 이상한데. 왜 셀레나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서 가만히 있었을까? 능력 자체로만 본다면 엄청나잖아? 죽음에서 되돌아오는 거라니.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없었던 거지?"
일라이는 셀레나를 떠올리며 눈썹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각별한 관계는 아니라도 나름 떡정은 쌓인 사이다.
그런 사이라면 지나가는 식으로 말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일라이가 셀레나에게 들은 얘기라고는 최근 학계의 움직임이라거나, 실험의 어려움 같은 일상적인 얘기 뿐이었다.
그렇다면 추측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나한테 일부러 숨겼거나, 아니면 능력이 있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거나. 이래야 말이 되는데."
이미 죽어버린 여자였기에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일라이는 자신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자기 자신이 죽으면 바로 소생하게 만드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리비카의 등장으로 그건 없는 소리가 되고 말았다.
"나를 살렸고, 리비카를 살렸다면…이건 뭐지? 신관들이 지녔다는 부활? 하지만 그런 기적을 행하려면 신이 도와야 할 텐데."
정보를 살펴보며 일라이는 많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쓸만하다고 여겨진 것들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후우, 내가 가진 능력이 뭔지 알아야 제어를 하든 말든 하지."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기적에 가까운힘일 것이다.
알아내는 게 힘들겠지만 일라이는 해보려 했다.
어쩌면 세상의 파멸을 막아낼 힘일 수도 있을 테니까.
그는 책장을 넘기며 불현듯 떠오르는 셀레나의 미소를 애써 무시했다.
대체 그녀는 어떤 진실을 가지고 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