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8화 〉신선한 던전을 찾자! (28/100)



〈 28화 〉신선한 던전을 찾자!

조세핀을 따먹고 나서 여관에 돌아온 일라이.
그는 은밀하게 잠을 자다가 아침이 되자마자 일어났다.
비록 술먹고 여자나 따먹으러 다닌 시간이 많았으나, 그는 원래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자였다.
문제는 그 습관이 검술 아카데미를 나오고 나서 망가졌다는 것이다.

"흐어험…아암."

크기가 넓지는 않았으나 간이 욕조에 따뜻한 물을 채우고 몸을 담궜다.
여독이 제법 풀리는  같았다.
던전에 대한 정보는 어제 살펴볼 만큼 살펴봤다.
정보는 다음에 받아가도 되니, 우선 던전을 찾으러 가는 게  번째 목표였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일라이가 물로 세수를 했다.

"허읍푸흐…어디 보자."


샤워할 때 팬티는 벗어도 카드 목걸이는 절대로 몸에서 떼지 않는 일라이.
그는 계약을 맺은 여자들의 상태를 일일이 점검했다.
항상 양호하다고 떠서 다행이었다.
누구 하나 적색경보가떴다면 분명 놀랐을 것이다.


"음, 여관에 있을 때만큼은 우린과 자하를 풀어줄까?"

사실 계약한 여자들이 현생 여자들에 비해 우위를 갖는 건 하나다.
바로 식량의 걱정이 없다는 것.
계약한 여자들이 카드로 들어가는 건, 정령이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개념이었다.
그래서 병에 걸리거나, 배고픔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당장 필요한 모든 정보를 주인에 의해 백업받고, 소환되고 나서 제 역할을 다하거나 현생 여자들과 함께 지낸다.
이것이 대표적인 알고리즘이었다.

"참 편하겠어. 나도 좀 편하게 살고 싶은데."

세상이 멸망하고 있는데 시답잖은 얘기나 하는 일라이.
그는 목욕을 마치며 방으로 돌아왔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기분 좋게 창문을 열자 거리를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오늘도 다들 고생하는구만."


왕자의 관점에서 말하며 일라이는 팔짱을 꼈다.
오늘 고생할 사람의 목록에 자신을 추가해야 한다는 건 조금 아쉬운 경우였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응, 들어와."


가운을 입은 채로돌아보는 일라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레스레모나였다.
그녀는 신기하게도 카드에 들어가기를 꺼리고 있었다.


"언제 돌아왔지? 걱정했다."
"아, 알아볼  많아서."

새삼 숨길 것도 없지만, 늦게까지 섹스하다 왔다고 한다면 누구나 한심하게  것이다.
일라이가 태평하게 대답하자 레스레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일라이 옆에 서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언제 죽을지 모를 시대에, 사람들이 하루의 시작을 열고 있었다.

"공주가 풀 죽어 있더군."
"레피나가? 걔 좀 드센 년이라 걱정마."
"시녀를 잃은 충격이 여전한 것 같더군."

레스레모나를 통해 비로소 레피나가 얼마나 리비카를 소중히 여겼는지 깨달은 일라이.
그는 말없이 그녀를 돌아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뭐, 함께 한 시간이 조금이긴 해도 깊이는 깊을 테니."
"사람의 인연이란 그런 것 아니겠어? 끊어진  하면서 이어지고, 끝난 듯 하면서도 다시 만나지."
"글쎄, 죽은 사람까지 다시 만날 것 같지는 않은데."
"나는 비록 섀도우 엘프지만, 그래도 우리 고장에서 이런 말이 있다. 끝난 인연이라도 떠올리는 순간 다시 이어진다고."
"의미를 알 수 없군.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럴  없을 테니까."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라는 거지. 식사나 하러 가자고."


살짝 일라이를 다독이며 레스레모나는 방을 나섰다.
어딘가 다른 그녀의 모습에 일라이는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쉬었다.
다시 만나고 싶다.
이 마음이 비단 자신만 있는 것은 아니리라.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는 없다.
그건 신도, 대마법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무슨 바보같은 생각이냐."


머리를 긁적이며 옷을 갈아입는 일라이.
그는 새삼 갑옷의 중요성을 되새기고 있었다.
싸울 때 그는 회피위주로 움직인다.
맞지 않는다는 마음가짐이라면 상처를 입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상 마음먹은 대로 인생이 흘러가진 않는다.


"흠……."

식당으로 내려가며 일라이는 생각을 정리했다.
오늘이야말로 던전 원정을 할 준비를 마치리라!

***




식사를 마치고 쉰 다음, 일라이는 여자들을 데리고 영지 밖으로 나갔다.
그나마 안전한 구역인지라 아무렇게나 나서도 된 것이다.
이런 시대에 영지가 힘을 갖는 이유는, 거대한 몸집처럼 안전하게 관리되는 지역이 넓어서였다.
모처럼 우린과 자하까지 불러내서 다 같이 몰려다니는 일라이 일행.

"그래서  근처에 던전이 있다고?"
"내가 그저그렇다고 판단하는 중인 불확실한 정보가 그리 말해."
"뭐어? 그걸 곧이 곧대로 믿고 있단 말이야?"

마음에 안 드는지 레피나가 우린 곁에서 걸으며 한숨을 쉬었다.
불확실한 정보를 믿고 그대로 들어가다니.
이보다 더 무모한 짓이 있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우린은  손을 맞잡으며  눈을 빛냈다.

"던전이라니…어떻게 생겼을까? 진짜 재미있겠다! 막 미남이 대기하고 있으려나?"

조금 이상한 망상을 하는 것 같았다.
그 뒤를 이어 자하가 힘차게 기합을 내지르며 말했다.

"후후, 간만에 몸 좀 풀 일이 생기겠군. 나는 오히려 기대되는데? 던전이 있든 없든 실력을보이고 싶다고!"

어쩌면 자하는 마을과 가족을 잃은 충격에서 헤어나오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해하며 일라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그들이 가는 곳은 한때 바리언 영지의 경계탑이 있던 곳이었다.
영지는 근방 몇km 거리에 경계탑을 건설해야 한다.
그리고 시간마다 경계병들을 교대시키며 주변 치안에 힘써야 했다.
전략적 요충지라면 더더욱 이 경계탑이 중요한데, 물론 지금은 황폐화된 체였다.

"그나저나 그런 곳에 던전이 있다고? 요즘 던전은 별의별 곳에서 열리나 보군."

유리엣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그녀가 알기로 던전은 정해진 곳에 딱딱 나온다.
그래서 예측하기도 쉽지만, 워낙 던전 자체가 위험한 곳이라서 봉인하거나틀어막는 게 고작이었다.
머리 손질을 하는 유리엣을 돌아보며일라이가 웃었다.

"말했듯 불확실한 정보라고. 완전히 믿기도 어렵지만, 아예 불신하기도 애매하지."
"하여간…으휴."


한숨을 쉬며 레피나는 최근에 새로  지팡이로 지면을 짚었다.
전투용이라기 보다 등산에 적합해 보이는 지팡이였다.
그나마 이것을 호신용으로 쓴다면 적절할 것이다.
몬스터들은 인간을 비웃기 보다 죽이기를 우선하기 때문이다.
좀 더 걷자 경계탑이 있던 곳까지 올 수 있었다.

"살벌하구만."


경계탑 지역에는 경계를 위해 울타리로 방책을 만들어 놓는다.
그런데 그 울타리가 검게 그슬리거나, 아예 가루가 나있는 것도 보였다.
좀 더 나아가니 경계탑이었던 곳이 절반이나 박살난 채로 휑하니 서 있었다.
아마 다시는 경계탑으로서의 기능은 못할 것 같았다.

"저곳에 식량이 있다면 어쩔 거지?"

혹시 몰라 레스레모나가 물었다.
일라이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당연히 챙겨야지. 영지의 것이었다 해도 지금은 가진사람이 임자니까."
"드디어 우리 왕자님께서 도둑님으로 전직하셨구만!"

일라이의 어깨를 세게 내리치며 우린이 외쳤다.
그녀의 익살스러움에 일라이는 허무하게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경계탑으로 다가갔다.
다 떨어져 나간 철문이 덩그러니 있다가 타이밍좋게 쓰러졌다.


끼기익- 터엉-!


거대한 먼지를 피워올리며 쓰러진 철문.
일라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경계탑은 대략 5층 건물 높이로 이뤄져 있었다.
위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은 제법 조예있게 만들어진 모습이었다.
문제는 아래로 향하는 식량창고 쪽이었다.


"여기에 던전이 있다는 건데……."

천천히 그리메를 빼들며 아래로 내려가는 일라이.
다른  몰라도 몬스터나 야생동물이 있을 수 있었다.
그때 시원한 기분이 목 언저리에 감돌았다.


"바람의 정령이다."
"고마워, 레스."

레스레모나가 뒤에 바짝 붙으며 백업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무척 어두웠다.
이번에는 빛의 정령을 소환하는 레스레모나.
시야가  트이자안정감을 얻을 수 있었다.
돌계단을 내려가던 일라이가 고개를 들었다.
매우 심각한 표정이었다.


"왜, 왜?"

레피나가 걱정되어 물었다.
고개를 젓던 일라이가 대답했다.

"한심하군. 우리 힐러는 빛 마법조차 못 쓴단 말인가……."
"야, 뒈질래?"
"됐다, 뭘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대놓고 레피나를 디스하며 다시 내려가는 일라이.
레피나는이를 악물며 강렬한 시선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죽일 기세였다.
자하가 힘없이 웃으며 레피나를 다독여주었다.

"흐음…여긴……."


완전하게 내려온 일라이가 주변을 둘러봤다.
이미 주변에 있는 식량포대는 처참하게 뜯겨 있었다.
소형 몬스터나 야생동물이 챙긴  같았다.
한 발 늦었지만 던전을 찾으러 것이기에 본래 목적에 충실하려 했다.
깊숙히 들어가자 음푹 패인 곳이 보였다.

"저기가 던전으로 가는 입구?"
"아니, 잘못 왔군."

일라이는 그리메를 앞으로 겨누며 다가가다가 고개를 저었다.
던전으로 가는 입구가 아니라 동물 여럿이 무리지어 지낸 듯한흔적이었다.
즉, 이곳에 던전은 없었다.

"아, 힘 빠져."

기대한 건지 우린이 입을비죽였다.
자하 역시 힘을쓸 일이 없으니 근처에 있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이럼 너무 아쉽잖아!"
"후후, 그래도  볼 일도 없고. 좋지 않아?"


유리엣이 긍정적인 얼굴로 말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결국 피 한 방울 볼 일 없이 끝난 셈이다.
이로써 불확실한 정보 하나는 완전하게 배제할 수 있었다.


"던전이 그렇게 쉽게 나올 리가 없지."


혀를 차며 레피나가 말했다.
혹시라도 모를 일이지만 결국 던전은 보이지 않았다.
일라이 일행은 다시 위로 향하며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위험요소가 없다고 생각하니 경계가 풀린 것이다.


"그래도 너무 아쉽다. 미남도 없고."
"우린, 대체 던전에서 미남이 나올 거라는 발상은 어디서 나온 거야?"
"응? 그야 있으면 좋지 않겠어?  초콜릿 복근 가진남자!"
"나는 모성애 자극하는 남자였으면 하는데. 미소년 같은?"


우린과 자하가 번갈아가며 대화를 나눴다.
여자들의 취향이 새삼 단순하다는 것을 깨달은 일라이가 웃었다.
그러다가 묵묵히 뒤따르고 있는 레스레모나에게 시선이갔다.


"레스, 무슨 문제 있어?"
"음? 아니…내가 예민한 건지도 모르겠군."
"뭔데?"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일라이가 물었다.
혹시 복안이라도 있는 것일까?
레스레모나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지 않나?"
"뭐가?"
"여긴 며칠 전까지 사용된 것처럼 여러 흔적이 남아 있다. 심지어 저 패인 곳은 동물들의 안식처로 보일 정도고."
"그렇지."
"그런데  아무도 없지? 심지어 뜯어진 식량포대는 보여도, 뼈나 다른 건 보이지 않아."
"응? 그야 식량이 다 떨어져서 여길 떠난 거겠지. 야생동물이나 소형 몬스터들이 지낸 곳이기는 해도, 이젠 여기서 지낼 이유가 없으니까."

일라이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경계탑은 한때 누군가가 살긴 살았던 곳이다.
그러나 식량이 다하면서 더는 여기서 지낼 이유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무언가가 떠나도 이상할  없다.
그 말에 레스레모나가 고개를 저었다.
일라이 일행이 다 올라왔을  레스레모나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이상하단 거다.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여긴 천혜의 요새야. 적어도 자기 몸 숨기기에급급해서 무리까지 짓는 생명체라면 더더욱. 그런데 이런 곳을 포기하고 광활한 황야로 나갔다고? 먹이는 아무리 멀리 있어도 구해오면 그만일 텐데."
"그런가? 글쎄, 나는 사냥학은 깊게 배우지 않아서."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일라이.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일행들과 이곳을 나가려는데, 가장 앞서 있던 우린이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비명을 질렀다.


"으, 으으아아악!"
"뭐야?"

레피나가 황당해서 바깥을 보다가 기겁하고 말았다.
놀랍게도 바깥에는 새빨갛게 눈이 충혈된 고블린들이 보였다.
눈에 보이는 수효만 해도 10마리가 넘어갔다.
이곳에서 지내고 있던  고블린들이었던 것이다.
갑작스런 고블린들의 등장에 일라이는 다시 그리메를 빼들었다.

"모두…전투 준비."


그의 엄숙한 모습에 일행은 저마다 싸울 준비를 했다.
이곳에 던전은 없지만, 새삼  세상 자체가 던전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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