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수상한 영지의 마님
야신산에서 나와 말을 달리던 일라이 일행.
꼬박 반나절 동안 달려서 간신히 어느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쳐 쓰러질 기세로 달려온 터라 다들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이미 야신주가 잿더미가 된 뒤로 휴식만 간간히 취한 체달려온 셈이었다.
"여긴 '바리언' 영지로군. 제발 멀쩡해야 할 텐데."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일라이가 앞장 서서 달렸다.
바리언 영지라면 와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지금 상태가 어떤지는 들어가보면 알 것이다.
여러모로 모험이었다.
"그래도 밖에서 자는 것보다는 나아."
레피나의 말에 모두가 공감했다.
일라이는 카드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우린과 자하는 다시 카드로 돌려보냈다. 필요하면 바로 소환해야지. 그나저나 길드가 있으려나? 던전 정보를 얻어야 하는데.'
세상이 이 모양이 되어가지만 얻을 정보는 얻어야 했다.
만약 아직까지 외부세력에 대항할 힘이 있는 영지가 있다면 큰 희망이 될 것이다.
그런 곳은 필연에 가깝게 길드가 유지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그닥다그닥-!
정신없이 말을 타며 간신히 영지에 도달하는 일라이 일행.
방벽 너머를 보니 인기척이 없었다.
그러나 문은 무겁게 닫혀 있었다.
직접 가서 밀어야 할까?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누가 온 거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방벽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일라이가 바로 위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제1왕자 일라이가 이곳에 왔다!"
"1왕자님……?"
"이게 그 증거지!"
왕족만이 가질 수 있다는 뱃지를 치켜드는 일라이.
브류스터드 왕가의 뱃지는 햇빛이나 달빛을 받을 때 신비하게 빛난다.
지금 일라이가 들고 있는 뱃지가 그러했다.
그래서 아무리 왕족으로 살다 가난해져도 이것만은 팔 수가 없었다.
왕족임을 증명하는 건 피가 아닌 뱃지라는 우스갯소리 때문이었다.
철컥- 두우우웅-!
관문이 열리자 일라이 일행이 바로 들어섰다.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예를 갖추며 외쳤다.
"바리언의 경비대장 '듀퍼'가 왕자님을 뵈옵니다!"
"예의는 됐고 쉬러 갈 테니까 비켜."
"네, 그럼!"
무려 왕자나 되는 인물이 왔다.
내일 날이 밝자마자 듀퍼에 의해 얘기가 퍼질 것이다.
그러나 일라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 중요한 건 휴식이기 때문이다.
다그닥다그닥-!
영지 내에서 말을 달리며 여관을 찾아다니는 일라이 일행.
그때 시력이 좋은 레스레모나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딱 적당해 보이는 여관이 나왔다.
"저기로 간다!"
'콜바드의 찻잔'이라는 여관 앞에서 지면에 내려선 일라이 일행.
졸고 있던 시동 하나가 곧장 말들을 다루며 마굿간으로 데려갔다.
왕래가 많았던 영지이니 만큼 여관의 일개 시종조차 이 정도인 것 같았다.
바로 일라이가 들어가서 방을 잡았다.
지금 일라이 일행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었으니까.
"후우……."
방으로 들어온 일라이는 바로 옷을 벗고 씻었다.
악몽과도 같은 하루였다.
이렇게나 강행군을 하는 것도 사실 좋은 게아니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샤워를 마친 일라이는 슬슬 눈을 붙이려 했다.
"거지같은 드래건 새끼…두고보자."
기분이 나아졌다고 리비카의 죽음을 잊은 건 아니다.
그는 진심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드래건을 잡을 수 있을까?
'미친 수준의 마법을 사용한다. 꼼짝도 못하고당했어. 이건 따로 대항수단을 찾아야 한다.'
'이렇게 대항수단을 찾더라도 칼 휘두르며 조지기가 어려워. 몸이 거대한 새끼가. 검술 아카데미에서 배운 대괴수 매뉴얼을 떠올리자.'
'르갈론은 특히 맷집이 좋은 축에 든다. 견고한 비늘을 뚫을 방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떻게?'
그리메는 명검이다.
르갈론의 배를 가를 명검이라면 그 중 하나에 들 법한 명검이었다.
하지만 고작 명검 하나로 모든걸 해결할 수는 없었다.
지금 일라이에게 필요한 건 일류를 넘어선 특급의 검술이었다.
안타깝게도 일라이의 검술은 일류일 수는 있어도, 특급에 닿지는 못했다.
"빌어먹을! 적어도 검성 수준이라도 됐으면……."
분한 마음에 벽을 강타하는 일라이.
그럼에도 쉽게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지고 나서 속으로 삭히고 있어야 한다는 건 정말 억울한 일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템빨로 간다…더 좋은 도구로 승부를 거는 거야!"
그러려면 결국 던전을 탐색하는 건 필연적인 수순.
크게 한숨을 쉬며 일라이는 잠을 청하려 했다.
우선 내일 할 일은 길드로 가서 정보를 얻는 것이다.
그때까지 일행을 최대한 쉬게 해두는 게 나을 것이리라.
***
식사를 마치며 일라이는 말없이 여관을 나섰다.
우선 길드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야 했다.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려 할 때였다.
다그닥다그닥- 푸르릉-!
"음?"
"바리언 영지의 남작 '드미트리'가 왕자님을 뵈옵니다!"
두 마리의 건장한 말이 이끄는 마차에서 누군가가 뛰어나왔다.
그는 바리언 영지의 영주인 드미트리였다.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나타나자 일라이는 피식 웃었다.
결국 얘기가 퍼졌으니 숨길 것도 없었다.
"오, 드미트리 영주. 반가워."
"누추한 곳에 어쩐 일로……."
"누추하기는! 이곳보다 좋은 곳도 없을 걸? 다들 힘든 세상이잖아. 여긴 어떻지?"
"그럭저럭 버티고는 있습니다. 따라오시죠,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흠……."
일라이는 턱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드미트리를 통해서 여러 정보를 캐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무리 영주의 팬티 색깔까지 알고 있는 게 길드라지만, 결국 귀족들만이 아는 정보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마차에 오르자 일라이는 비로소 편안함을 느꼈다.
최근 너무 말에 의지한 경향이 있었다.
'아니야. 마차도 좀 타다 보면 결려.'
모든 게 편할 수는 없는 법.
드미트리는 금색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다가 물었다.
"혹시 불편한 점은 없는지요?"
"그러고 보니 어제 드래건을 만났지. 북녘의 철창을 말이야."
"부, 북녘의 철창? 죽은 줄 알았는데……."
"나도 그리 생각했지. 여기도 언제든지 공격당할 수 있어."
"걱정마십시오. 저희는 대용병기가 있기에 걱정 없습니다!"
"눈앞에서 마을 하나가 잿더미가 되더군. 무자비한 놈이야. 내 사람도 잃었어."
일부러 부담이 갈 만한 얘기만 늘어놓는 일라이.
드미트리는 식은땀을 닦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왕자나 되는 사람이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맞춰야 할 지 알 수 없다.
무엇보다 수도 근처에서 사는 대귀족도 아니고, 드미트리처럼 변경 귀족이라면 더더욱 예법에 무지하다.
그러나 일라이는 그걸 책망하고 싶지 않았다.
'다 망한 국가의 왕자인데, 뭘.'
속으로 한숨을 쉰 일라이가 팔짱을 꼈다.
마차는 어느새 영주관에 도착해 있었다.
"내리시지요."
"아, 됐어. 내 스스로 내린다."
드미트리가 노예를불러 계단을 만들려 하자 일라이가 저지했다.
이제 와서 왕자같은 취급을 받기에는 어불성설이라 여겼던 것이다.
영주관 주변은 잡초가 조금 돋아나 있는 걸 빼면 안전해 보였다.
성곽조차 제대로 서있으니 안정감이 들었다.
'그나마 멀쩡한 영지야. 여기라면 희망이…….'
드미트리의 안내를 받아 영주관저로 들어가는 일라이.
그는고급 쇼파에 앉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귀족에 걸맞은 아름다운 양식의 식기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머,실례합니다. 저는 영지의 안사람인 '조세핀'이라 합니다."
조세핀 바리언이 하체 라인에 딱 붙는 스커트를 만지작대며 예를 갖췄다.
일라이는 사무적으로 예의를 차리려다가 그녀의 외모를 유심히 관찰했다.
고풍스럽게 위로 땋아올린 적발, 호수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벽안에 음란한 미소가 입가에 걸처져 있었다.
무엇보다 압도적이라 해도 좋을 풍만한 몸매가 특징이었다.
마치 애 셋을낳고서 능수능란하게 먹여 살리는 유부녀와도 같았다.
'평민들에서나 볼 법한 비주얼이야. 하지만 귀족의 매력이 더해져서 충분히 색기가 넘친다. 이 여자, 위험할지도?'
간단하게 조세핀에 대해 판단하며 일라이는 자리에 앉았다.
곧 드미트리가 차를 내오게 하며 얘기가 시작되었다.
"괜찮으시다면 이곳에 묵으시는 걸 추천합니다. 밖은 지옥일 겁니다."
"지옥이긴 하지."
때마침 나온 홍차를 마시며 일라이의 시선은 조세핀에게 고정되었다.
그녀는 천천히 다리를 꼬며 육덕진 하체 라인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홀리려는 듯 빠져들 듯한 미소까지 완벽하게 이어졌다.
그런 것도 모른 체 드미트리가 바쁘게 말을 이어나갔다.
"최근에 조사해본 결과, 근방 영지에서 소식이 들리지 않더군요. 아무래도 드래건에게 당한 건지, 몬스터에게 당한 건지."
"뭐든 있을 수 있는 일들이지. 최대한 조심히 알아봐. 그렇게 해서 나쁠 건 없을 거야."
"네,그러도록 하죠."
"그나저나 이 영지에도 길드는 있겠지?"
마침내 일라이가 드미트리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길드에 대해 묻자 드미트리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 있습니다. 그것도 두 곳이나……."
"그렇군. 여기 처음인지라 지리를 잘 몰라서 말이야."
"아, 지금 당장 하인을 시켜서 지도를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럼나야 좋지."
드미트리는 바로 하인을 부렸다.
이런 와중에도 조세핀은 천천히 자신의 두툼한 입술을 혀로 적시고 있었다.
머리가 절반이나 벗겨진 드미트리에겐 이미 지친 것 같았다.
지금 그녀는 전형적인음란한 유부녀처럼 굴고 있었다.
'저런 음란한 몸매에 어울리는 짓을 하다니. 음탕한 마님일세……언제 한 번 본때를 보여주지.'
딱히 가지고 싶은 여자는 아니었다.
이런 영지에서 평생을 썩고 있는 것 보면 특출난 능력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욕망을 푸는용도라면 제법 훌륭하게 쓰일 것이다.
어차피 일라이의 주변에는 절세미녀들이 많기 때문이다.
드미트리와 여러 이야기를 하고 나서 일라이는 일어났다.
자신있는 표정으로 드미트리가 말했다.
"언제든지 와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도록 하지."
간단하게 악수를 나누며 일라이는 조세핀 앞에 섰다.
그녀의 손등에 짧게키스를 남기고는 영주관저에서 나갔다.
일라이는 느긋하게 영주성을 나서며 하품을 했다.
어제 있던 일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날씨는 화창했다.
"이제 길드로 가볼까?"
그리메를 찬 칼집에 손을 댄 채로 걷는 일라이.
이제 모든 준비를 차근차근 할 때였다.
부디 그때까지 재앙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스읍…아무튼 서두를 것만 서두르고 나면 여흥을 즐겨야겠군."
영주성을 슬쩍 돌아보던 일라이는 호쾌하게 웃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여자는 꼬이기 마련이다.
그 여자가 처녀든, 누군가의 것이든 상관 없었다.
일라이에게 있어 여자는 흔하디 흔한 물건이었으니까.
괴물처럼 더욱 강해지겠다는 맹세와 함께 일라이는 길드를 향해 바쁘게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