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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화 〉그녀는 드래건이랍니다 (25/100)



〈 25화 〉그녀는 드래건이랍니다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듯 일라이는 여자만 바라봤다.
그녀는 자신이 드래건이라고 했다.
물론 그 증거로 뿔이 나있는 모습은 제법 실감이 난다.
하지만 일라이는 믿고 싶지 않았다.
아니, 믿지 않으려 했다.


"그럴 리가. 드래건이  사람 모습인데?"
"우리 드래건은 하등한 종족으로 얼마든지 변할  있지."
"인간이 하등하단 거냐? 하, 그래. 네가 드래건이라 치자. 그런데……."

스르릉- 척-!

칼집에서 그리메를 뽑아드는 일라이.
그는 두 눈을 빛내며 여자를 노려봤다.
드래건이라면 이제 치를 떨 것 같다.

"드래건이라면 내가 그냥 못 있겠거든?"
"신기하군."
"신기해? 왜, 너도 내가 자살하고 싶어 환장한 새끼로 보이냐?"
"그건 아니야. 다만."

잠시 턱을 쓸며 고민하는 여자.
그러다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 너는 절망에 닿아 있었다. 한 발자국만 더 내디뎠다면 마음의 병을 얻어 영원히 일어나지 못했겠지."

"흥."
"그런데 지금 너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  같아. 내가 드래건이라는  믿으면서도, 오히려 투지를 불태우고 있어. 왜지? 불가능한 싸움일 텐데."


여자가 순수한 의도로 묻자 일라이가 웃기 시작했다.
그는 검을 늘어트리며힘없이 웃다가 간신히 표정관리를 했다.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인간다움일 텐데.

"왜냐고? 내 소중한 사람이 르갈론에게 죽었거든. 드래건이고 뭐고 찢어죽이고 싶을 만큼 싫거든. 네가 드래건이라면 르갈론의 동족이겠지. 그러니까 죽인다. 내가 죽더라도……!"


일라이가 말을 마치며 거칠게 달려들었다.
드래건은 인간 모습일 때 본체에 비해서 한없이 약하다.
죽일 타이밍을 노린다면 지금뿐이다.
그러므로 일라이는 이번 기회에 사활을 걸었다.
적어도 본체로 변신하기도 전에 죽여주마!


"흐핫!"


[브류스터드 파검류 - 추수]

있는 힘껏 검을 휘두르는 일라이.
여자가 가볍게 뒤로 뛰며 피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우선 너한테 말하고 싶은  번째."
"시끄러!"

지그재그로 빠르게 움직이던 일라이가 순식간에 가속을 했다.
타고난 육체와 천부적인 재능은 그를 검술 아카데미의 괴물이라 불리게 했다.
그리고 놀고 먹기 좋아하던 그 괴물이 마침내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을 위해서.


"하앗!"
"평범한 지르기는 통하지 않아. 지금의 너라면 더더욱."

빠르게 검을 내지르자 여자는 다시 몸을 틀어 피했다.
그리고 아까 하던 말을 이어서 하려 할 때였다.
일라이가 두 눈을 번뜩이더니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그리메를 뻗으면서 동시에 칼집을 휘둘렀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 휘둘러치기]


본래 존재하던 브류스터드 파검류에서 일라이 자신만의 감각을 담아낸 기술.
먼저 검으로 찔러 공간을 열고, 그렇게 열린 공간을칼집으로 있는 힘껏 가격한다.
그야말로 돌격기병으로상대 진형을 흐트리고, 경보병으로진형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과 같은 개념이었다.
예상치 못할 일라이의 변칙기술에도 여자는 침착했다.
그녀는 두 손을 펼쳐 앞으로 뻗으며 허무하리만치 검과 칼집 둘 다 튕겨냈다.

"재미있네? 그런 식으로 기술을 쓰는구나?"
"걸려들었어."


지금 일라이는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몸 자체에 반동을 역으로 회전시켰다.
기를 다룰 줄 알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멸검 - 종식]

전신을 타고 흐르는 모든 기운을 검에 집중하는 일라이.
그는 여자에게 튕겨질 때 칼집을 버리고 그리메를 두 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모든 기를 집중했다.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해도 좋다.
여기서 드래건의 목을 딸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할 자신이 있었다.
이 이변은 여자에게도 똑똑히 보였다.

'이 기운은 흡사 용살자의 그것…….'


그리고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동시에 일라이의 모든 기운을 담은 그리메가 순식간에 여자의가슴을 뚫었다.

푸욱- 츠칵-!

근육을 찢고 뼈를 부러트리며 깊숙하게 박히는 그리메.
일라이는 지친 얼굴로 겨우 미소를 띠었다.
이겼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떠냐? 드래건…아무리 너라도……."
"대단해. 이쯤 되면 진심으로 흥미가 가는데?"

그러나 여자는 태연했다.
분명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안색이 창백하긴 했다.
그에 반해 여자의  눈은 총기가 있다 못해 넘쳐 흐를 정도였다.
아무리 인간의 몸이라도 본질은 드래건.
그러므로 고작 인간의 검술에 일격사할 이유는 없었다.
자신의 가슴에 박힌 그리메를 내려다보며 여자가 웃었다.


"사실 나는 그리 호전적이지 않아. 조용히 살다가 잠에 들었고, 세상이 태동을 하니 다시 깨어났지. 하지만 이건 놀라워."
"어, 어떻게…내 혼신의 일격을 맞고도 서있는 거지?"
"네가 못난 게 아니야. 내가 너무 강한 거지."

스윽- 추우욱-!


자기 가슴에서 그리메를 빼며 일라이에게 다가가는 여자.
역공당할 타이밍.
일라이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음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지는 것일까?
이번에는 죽을지도 모른다.

"내 이름은 '유리엣'. '퓨어 드래건'이며 아직 깨어난  얼마 안 되어 적응중이야."
"화를 내지 않는 거냐?"
"왜? 470년간 살면서도 너 같은 인간은 처음이야. 내게 이렇게 상처까지 준 인간은 더더욱. 인정할게, 너는 충분히 흥미를 가질 가치가 있어."
"내가?"
"응, 앞으로 너를 따라다니겠어.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내 탐구욕은 엄청나거든? 네가 태동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지 궁금해졌거든."

말을 마치며 해맑게 웃는 유리엣.
그녀의 미소를 보자마자 마음속 어둠이  가시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않게 상처를 재생시킨 유리엣은 일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상의 여인이 애정을 가지고 쓰다듬는  같았다.

'연상은 연상이지…무려 470살이잖아?'


겉으로 보기에는 20대 초중반의 미녀나 다름없는유리엣.
그런 그녀가 400년도 더 넘게 살아온 드래건이라니.
긴 백발이 은빛 드레스와 함께 찰랑거리며 은은한 분위기를 더했다.
그리고 유리엣은 일라이의 손을 잡았다.
만약 일라이가 한심한 모습만 보이며 절망했다면 유리엣은 그냥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다운 호기로운 모습이 먹먹했던 그녀의 심상을 감동시킨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혼란을 느끼는 일라이.
유리엣은 일라이의가슴을 쓸며 말했다.


"퓨어 드래곤 유리엣이 너를 친구로 인정한다. 자, 이제 우린 친구 맞지?"
"…친구라는 게 그렇게 되기 쉬운 거였어? 게다가  드래건이잖아."
"종족이 무슨 상관이야? 나는 적어도 르갈론처럼 모든 걸 지배하려는 성격은 아니야. 그런 거친 성격은 이 세계를 위해서라도 좋지 않아."
"흠, 적어도 너는 북녘의 철창과는 다른가 보군."
"그거 르갈론의 별명 맞지? 내가 잠들어 있을 때도 오랫동안 활동했나 보네."
"고대유물이 난데없이 튀어나와서 놀랐다고. 그런데 이제는 여자 드래건까지 나타나다니."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이는 일라이.
르갈론의 출현은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드래건의 등장이라니.
그런데 이제는 자신의 친구까지 된 여성 드래건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도 이건 불행중 다행이었다.
드래건이라는거대한 전력이 생긴 거니까.

"혼자서 다니는 거야? 무슨일인데 절망에 닿아 있었어?"


친구처럼 친근하게 묻는 유리엣.
일라이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며 모든 얘기를 했다.
망국의 왕자였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리 오래 된 일은 아니지만 말해주고 싶었다.


"흐음, 인간은 역시 엄청나."
"문란하다고 해도 인정하겠어."
"우리 드래건은 개개인의 차가 있긴 해도  정도는 아니거든."
"왜?"
"딱히 고결해서는 아니야. 그냥 그럴 필요를 못 느끼는 거지."

유리엣의 대답에 일라이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소린지 알 수 있었다.
만약 드래건이 인간처럼 종족 번식본능이 강했다면?
어쩌면 세계에는 인간만큼의 머릿수를 지닌 드래건이 날뛰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분명 또 다른 이름의 지옥일 것이다.


"지금 이상한 상상했지? 후훗."
"아, 아니야……!"


일라이는 태연한 척 하다가 혀를 찼다.
그녀와 함께 집에 오니 여자들이 맞이해줬다.
일라이가 다시 돌아오자 안도하던 여자들은 갑자기 유리엣에게 시선이 모였다.


"누구지?"
"또 어디서……?"
"하아……!"

레스레모나와 아넬, 레피나는 각자 반응을 마치며 유리엣을 쳐다봤다.
일라이는 유리엣을 가리켰다.

"퓨어 드래건 유리엣이야."
"반가워. 일라이의 친구라면 내 친구이기도 하지?"


난데없이 드래건과 친구가 되어야 하는상황.
 여자는 유리엣을 보더니 황당한 표정을 짓다가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  명은 인간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유리엣이 다른 종족임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 것이었다.

'드래건이란 거 참 대단하구만.'

이미 겪어봐서 알지만 새삼 드래건의 위엄이 느껴진 일라이.
그는 한숨을 쉬며 근처 의자에 앉았다.
이제 새로운 목표를 세워야 했다.


"일라이, 그래서 목표가 뭔데?"

확인시키듯 유리엣이 물었다.
그녀는 집 중앙으로 가서 한 바퀴 돌더니 뒷짐진 채로 일라이를 바라봤다.
뒤에서 여자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는  같았다.
질문을 받은 일라이는 핑거 스냅을 했다.

"계획은 크게 바뀌지 않아. 전력을 늘리고, 안전한 곳을 찾고, 나라를 다시 세울 거야."
"그거 참 좋기는 한데, 여건상 힘들지 않을까?"
"드래건이 대놓고 활보하는 지금은 좀 그렇지. 하지만 행운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 그리고……."

물론 비단 행운에만 의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모험을 하는 것이다.
거기에 도박까지 더하면 정말 뒤가 없는 인생이 된다.

"이제부터 던전을 찾아다닐 거야."
"던전?"

유리엣이 관심이 가는 듯 물었다.
일라이는 짐에서 지도를 꺼냈다.
조금 낡기는 했지만 가장 정확한 지도였다.
언젠가 모험을 떠나게 되면 써먹기 위해 놔뒀던 것이 내내 활용되고 있었다.
지도를 들며일라이가 진지하게 말했다.

"최악의 대마법사였던 강진모는 에레스트 곳곳의 던전을 공략했지. 하지만 그놈이 신도 아니고 모든 곳을 공략했을 리는 만무해."
"그렇다면?"

레스레모나가 무언가 느껴진다는 얼굴로 물었다.
일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미처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던전을 공략할 셈이야. 아마 찾기 힘들 거야. 이미 누군가가 다녀간 던전을 주로 만날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곳은 은신처로 활용하고, 쌩쌩한 던전은 바로공략한다. 이게  플랜이야."

절도있게 지도를 접으며 말을 마치는 일라이.
그의 계획은제법 현실성이 있었다.
하지만 아넬이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전력이 되겠어? 던전마다 득시글거리는 몬스터나 함정도 제각각이야. 멸망의 영향을 받아서 더 위험해졌을지도 몰라."

중요한 것을 지적하는 아넬.
이에 대한 생각 역시 안해본 바는 아닌지 일라이가 바로 답했다.


"그건 문제없어."


일라이는 순식간에 카드를 쥐며 여자들을 소환하려 했다.
우린과 자하가 순식간에 카드에서 나왔다.
둘은 비록 카드에 잠들어 있기는 해도 일라이가 파장을 보내 그동안 있던 일에대해서 알 수 있었다.
자하가 주저앉아 울자 우린이 바로 위로해줬다.


"으엉헝, 우리 마을이……!"
"괜찮아, 괜찮아. 어떻게든 우리는 살아갈 테니까. 괜찮아."

 여자가 서로 부둥켜 안는 것을 보며 일라이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의 전력이라면 가능해. 우연찮게도 각자 포지션도 딱딱 정해졌지. 나랑자하는 근접 딜러, 우린과 레스레모나, 아넬은 지원사격과 원거리 딜러를, 그리고 레피나는 힐러에 유리엣은 참모이자 전술사관을 겸하면 되고. 이 정도로 조합되는 경우는 검술 아카데미에서도 본 적 없었어."

엘브루트 가문의 세 여자는 아직 영지를 지켜야 하기에 함부로 부를 수 없었다.
사실 함부로 소환해서 여자들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일라이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이라면 크게 전력에 영향이 가지 않을 것이므로 제외하기도 했다.
일라이의얘기를 듣고 여자들이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괜찮네!"
"어쩌다 보니 잘 맞네."
"그래, 슬픈 일은 제대로 울어서 털어내자고! 다시 가는 거야!"
"우리만큼은  수 있어. 그렇게 믿자."


여자들이 각자 각오를 다졌다.
유리엣의 가세로 일라이 일행은 던전 하나쯤은 노려볼만한 전력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새로운 생존방법으로 변할 것이다.


"모두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지만, 그걸 감안하고서 나아갈 수밖에 없어. 이미 그런 세상이니까."


일라이는말을 잠깐 쉬었다.
그러다가 힘없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죽은 자들의 몫까지 사는 거야. 약속하지, 내가 죽더라도너흰 지킨다. 서로가 서로를 지킬 테지만  지분이 더 컸으면 좋겠어."
"왜?"


아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당연하다는 듯 일라이가 대답했다.

"그야 나는 왕이 될 몸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그의 대답에 여자들이 피식 웃었다.
이것으로재정비는 확실하게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남은건 투지와 조금의 운 뿐.
일라이는 이것이 좋은 시작이라 여기며 의지를 다잡았다.
애써 떠오르는 리비카의 모습을간신히 지우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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