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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화 〉다시 일어나라, 발정왕! (24/100)



〈 24화 〉다시 일어나라, 발정왕!

야신주는 잿더미가 되었다.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깨달은 드래건,르갈론에 의해서였다.
잠깐의 평화에 취하려 했던 이종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눈을 감고 말았다.
그나마 기절한 일라이를 데리고 여자들이 필사적으로 도망간 탓에 이외에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인 것일까?


"으으, 이럴 때 우린인가 뭔가만 있었어도!"
"쳇, 카드에 잠들어 있잖아. 있었어도 드래건을 어떻게 상대하냐?"

3명의 여자가 말을 탄 채로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나마 야신주 자경대가 죽음을 각오하고 시간을 끈 덕분에 이 정도로 도주할 수 있었다.
그들의 희생이 적어도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레스레모나는 기절한 일라이를 안은 채로 고삐를 잡고 있었다.


'시녀가 죽었어…….'

흔적조차 보기 어려울 만큼 토막난 리비카.
분명 일라이는 그녀의 시체를 봤을 것이다.
그래서 현명한 결정보다, 인간다운 결정을 한 것이다.
그 탓에 죽을 뻔한  논외로 칟라도 말이다.
그것으로 된 것일까?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건 죽을 때까지 가슴에 남는 법이다.


'나 역시…….'

대장로를 잃었을 때, 레스레모나는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꿈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냉철한 판단이었다.

"드래건은? 어떻게 됐는데?"

레피나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이럴 땐 항상 리비카가 뒤를 봐줬지만 지금은 달랐다.
오히려  위에서 능숙하게 고삐를 쥐고 있던 아넬이 대답했다.

"드래건은 최강의 존재야.  거체로 하늘을 난다는 것부터 사기라고! 언젠가 붙잡히겠지."
"으, 재수없는소리하네!"

현실적인 아넬의말에 레피나는 이를 앙다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말이 달리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도망가야 한다.
만약 르갈론이 일라이 일행에게 집착한다면, 그는 계속해서 쫓아오고 있을 것이다.
평화로웠던야신주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제 그건 어디에도 없었다.

"산으로 올라가지."

레스레모나가 말했다.
말을 타고서 산을 오르는 건 무모하지만, 지금은 최대한 모습을 숨겨야 했다.
제발 르갈론이 못 보고 지나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레스레모나를 선두로 일행이 전부 산을오르기 시작했다.
그나마 완만한 산지라서 다행이었다.
무모하다시피한 짓을 해야 할 만큼 상황은 촉박했다.

"제기랄, 염병…진짜 좋아했는데!"


레피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비록 리비카를 한낱 시녀로 봤을지언정, 그녀를 사람으로서 존중하기도 했다.
무언가 부족하다 싶으면 항상 그녀가 도와줬고, 그녀가 곁에 있어줬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없었다.


"후우, 조금만 더!"


일행을 독려하며 레스레모나가 고개를 들었다.
산 위에 온갖 넝쿨로 뒤덮인 민가가 하나 보였다.
산장처럼 크지도 않고, 이 시대에 산에 있는 민가는 수상해 보였다.
우선 저곳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관리된  오래된 것 같아서 주변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있었다.


"저기로!"


레스레모나가 먼저 도착해서 말들을 헛간에 넣었다.
레피나와 아넬은 르갈론이 나타날까 싶어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문조차 잠겨있지 않을 만큼 무방비한 곳.
들어서자마자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윽……!"


이런 곳은 처음이기에 레피나는 표정을 찌푸렸다.
얼마나 관리를 안 해놨으면 이 정도일까?
살짝 문을 열고 밖을 둘러보던 레스레모나가 말했다.

"여기가 야신산인가? 아무튼 이걸로 됐어."
"칫, 행운의 여신이 있다면 도움이라도 바라야겠네."


아넬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벽에 기댔다.
레스레모나는 엘프이면서도 힘이 좋은지 잘도 일라이를 업고 매트리스가 퍼진 곳에 눕혔다.
다행히 별 외상은 없어 보였다.
수통을 열고 일라이의 입에 살짝 물을 흘렸다.


"걔 갠찮을까?"

낡은 의자에 앉으며 레피나가 물었다.
일라이를 내려다보는 레스레모나와 아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좋을 리가…없겠지."

무거운 대답을 하며 레스레모나는 일라이 곁에 앉았다.
아넬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스르르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그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분위기를 풀 수 없다.
리비카는 죽어버렸고, 리더라 할 수 있는 일라이는 혼수상태.
그가 언제 깨어날지도 불명확했다.

"으윽, 크으읍……."

그때 일라이가 신음을 흘리며 일어났다.
창백한 안색이 서서히 혈색을 찾고 있는  보였다.
레피나가 가장 먼저 달려왔다.


"일라이, 야! 괜찮은 거야?"
"크으, 제길."


가슴을 쥐며 괴로워 하던 일라이는 겨우 숨을 내쉬었다.
이것으로 사계는 효과를 잃었다.
그러나 겨우 이런 것에 기절하다니.
일라이는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말았다.

'검술 아카데미에서 마법에 대항하는 전술을 배웠는데. 이건 정말 예상외잖아.'


겨우 몸을 일으키던 그는 벽에 기댔다.
몸은 괜찮았지만 마음이 문제였다.

"일라이……."

슬픈 얼굴로 아넬이 불렀다.
일라이는힘없이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괜히 앞머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여기 어디냐?"
"야신산에 있는 허름한 건물이다. 르갈론을 피해 여기로 온 거지."

레스레모나의 대답.
일라이는 그녀를 돌아봤다.


"마을은?"
"……어쩔 수 없었다."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레스레모나.
예상한 일이었기에 일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리비카에게 생각이 미쳤다.


"씨발, 제길…리비카의 시체라도 가져왔어야 했는데."
"저기, 일라이, 워낙 급하게 떠나려고 해서……."
"됐어."

상황설명을 하려던 레피나의 말을 끊는 일라이.
그는 충분히 기분이 더러웠다.
상대가드래건이었다지만 쪽도 못 쓰고 졌다.
거기에 소중한 사람까지 잃은 것이다.


"흐으…씨발!"


후웅- 태앵- 탱캉-!


그리메가 든 칼집을 벽에 내던지는 일라이.
여자들이 놀라며 쳐다보자 일라이가 주먹을 쥐며 말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어. 검성이나 최악의 마법사만큼은 아니라도, 나 역시 왕족으로서 누군가를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 왕족도 아닌 것들이 해낸 일이니 나도 해낼 거라 여겼어! 그런데, 그런데 이게 무슨 개같은 일이야?"
"일라이, 진정해라."

천천히 손을 내미는 레스레모나.
하지만 일라이는 듣지 않았다.
그는 살면서 처음으로 분개했다.
무력감과 슬픔에 가슴이 미어터질 것 같았다.

"망국의 왕자라도 왕자야! 하렘왕이라고 한다면 자기 여자들을 지킬 수 있어야 해! 그런데 나는……."
"어쩔 수 없었잖아? 상대는 드래건이었다고."

일라이의 발 끝을 손으로 두드리며 아넬이 말했다.
제아무리 강한 인간이라도 드래건을 상대할 수는 없다.
일라이는 이마를 짚으며 두 눈을 감았다.

"못할 건 또 뭐냐고! 제기랄, 이제  해야 하지? 텅 빈 던전이라도 찾아다니면서 목숨을 부지해야 하나? 아니면 이대로 르갈론에게 발각되고 뒈지는 건가?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있는 힘껏 외치며 일라이는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든 이 분노를 표출하고 싶었다.
살면서 이 정도로 화가 나고 억울한 경우는 없었다.
항상 왕족으로서 부족함없이 자랐고, 조금 실수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멋지게 만회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수도 없었다.

"네 마음 잘 알아. 나도 가슴이 아파."


레피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일라이의 곁에 앉으며 그의 손을 따스하게 쥐었다.

"지금은 엄청 화나겠지만, 이겨내야지. 너는…우리를 인도하고 있으니까."
"빌어먹을……."
"네가 여기서 무너지면 우리 모두 어찌해야 될 지 모른다고. 그러니까 조금 방황하더라도 무너지지 말아줘. 다시…일어나 줘. 망할 자식아."

일라이와 눈을 마주친 채로 진심어린 조언을 하는 레피나.
그녀는 말을 마치며 입술을 비죽이더니 다른 데로 가버렸다.
그런 레피나를 보며 일라이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두 눈이 흔들렸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났다.


"지금 일어나면……."
"괜찮아."

걱정하는 레스레모나를 향해 손을 내젓는 일라이.
그는 그늘진 얼굴로 칼집을 들더니 밖으로나갔다.
이곳에 있기만 해서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괜찮을까?"

아넬이 팔짱을 낀 채로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확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집에서 나온 일라이는 무작정 걸었다.
때마침 하늘이 흐려지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솨아아아아- 추적추적-

이 시기에는 항상 비가 오고는 한다.
지금은 기분이 기분이라서 더욱 우울했다.
최대한 나무나 수풀이 많은 곳으로 다니며 일라이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카드를 보며 여자들을 소환하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뭐하는 짓이냐…우울하니까 좀 대달라고? 섹스도 신념으로 하는 거야. 시정잡배 찌질이처럼 섹스마라, 일라이."


스스로에게 일갈하며 일라이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이곳에 올라온 건 처음이었다.
분명 처음에는 목적이 있어서 오려고 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찾는  없는 것 같고, 그렇다면 목숨이라도 부지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는 섹스보다 더 큰 것을 원했다.

'누구라도 나와라. 베어버릴 테니까.'


지친 얼굴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라이.
그는 차갑게 내리붓는 빗줄기를 느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쓰게웃었다.
죽어버리고 말았다.
리비카는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될 여자였다.


"나한테 고백까지 한 여자를…지키지 못했어."

고백에 대한 대답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녀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걸 보고야 말았다.
아마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얼굴에 묻은 빗물을 털어낼 때 앞에서 인기척이들렸다.
여자들이따라왔나 싶어 눈을 뜨자 그곳에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보였다.


"고민이 많아 보이네."
"……넌 뭔데?"

눈앞에 있는 긴 백발의 여자를 보며 일라이가  눈에 힘을 줬다.
은빛으로 물든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조금은 슬퍼보이는 얼굴로 일라이를 보고 있었다.
균형잡혀 있으면서 가녀린 몸매와는 어울리지 않은 D컵 가슴이 빗물에 젖어가는 게 보였다.
살며시 미소를 지으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이 풀리게 만드는 묘한 매력까지 있었다.
새하얀 머리칼은 길게 늘어트려 엉덩이께에 걸쳐 있었다.
순백의 순수함을 담은 듯한 머리칼은 그 자체로도 비단과도 같았다.
다만 여자의 머리에 나있는 자그마한 뿔과 눈을  순간 조용한 감상은 깨져버리고 말았다.
여자의 머리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한 쌍의 뿔이 굴곡진 채로 나있었다.
그리고 눈은 파충류의 그것을 연상케 하듯 길게찢어진 금안이었다.
한 마디로 나타난 것처럼 신비함을 온 몸에 걸친 듯한 여자였다.

"나? 글쎄……."


여자는 백치미가 느껴지는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서는 하염없이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빗줄기를 잡으려는 듯 손을 살짝 들며 여자는 입을 열었다.


"대충 대답해도 되겠지?"
"뭐라고?"
"나는 드래건이야."
"드래건……?"


일라이는 당황하며 몸을 떨었다.
정체불명의 미녀와  만남치고는 매우 강렬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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