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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화 〉충격의 패배? 북녘의 철창 '르갈론' (23/100)



〈 23화 〉충격의 패배? 북녘의 철창 '르갈론'

하루의 시작으로 섹스로 떼운 일라이.
그는 여자들과 함께 즐거운 식사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건너편에서 아넬과 레피나가 다투기 시작했다.


"버섯 전골은 역시 간장이지!"
"간장은 무슨……토마토 소스에 먹는 거라고!"


아넬은 간장을, 레피나는 토마토 소스를 고집하고 있었다.
지하공동이 해방된 이후, 야신주 곳곳에서 버섯전골이 횡행하고 있었다.
당연한 현상이었다.
본래 버섯전골을 주로 먹던 마을이다.
드디어 되찾았는데  실력을 발휘하지 않을 리 없었다.
우선 일라이는 버섯전골에 있는 당면을 부드럽게 빨아먹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뜨거운 당면이 부드럽게 넘어왔다.

"흐음, 좋다."
"왕자님, 천천히 드세요."
"응."

리비카가 걱정하자 일라이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전골에 들어간 채소.
주로 나물들이었지만 배추나 양파처럼 굵직한 것도 있었다.
함께 들어간 고기 한접에 감싸 먹었다.
중후하면서도 포근한 풍미가 입 안을 가득 채웠다.


"크흐음, 좋아. 이거지, 이거……."


고개를 끄덕이며 대망의 버섯을 한접 집어드는 일라이.
검고 우람한 버섯이 모락모락 김을 피우며 젓가락에 들려 있었다.
왕궁에 있을 때 동양식 식단을 자주 먹었던 덕분에 일라이는 젓가락질이 능숙했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버섯을 천천히 베어 물었다.


"으음, 허읍, 후우……."


뜨거워서 크게 바람을 불다가 겨우버섯을 씹었다.
맛있다.
씹자마자 감미로운 육즙이 터져 나와 입 안으로 넓게 영역을 확장했다.
원체 부드러운 버섯은 씹으면서 그 향이 더해가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향연을 보는 것 같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일라이는 버섯 하나를 다 먹었다.

"훌륭하군."
"그나저나 그녀는? 일은 잘  건가?"

레스레모나가 자하에 대해서 물었다.
일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우린과 자하는 카드에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응, 우리의 일원이 됐지."
"연속해서 강자들을영입하다니. 역시 그대는 대단해."
"그런가? 운이 따라준 것 뿐인 걸."
"그대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강자들은 저절로 따를 뿐."


칭찬은 언제나 들어도 좋다.
특히 진심이 담긴 칭찬이라면 더더욱!
일라이가 함박 웃음을 지으며 식사를 마치자 여자들 역시 슬슬 식사를 끝냈다.
후회가 남지 않을 식사였다.


"식후엔 운동이지. 모두 걷자고."

의외로 레스레모나가 먼저 나서서 걷기를 제안했다.
나쁘지 않았기에 일라이는 그대로 따랐다.
물론 식사를 하고 나면 게을러지는 다른 여자들은 무리였다.
아넬과 레피나는 서로 다투다 말고 소리질렀다.


"귀찮게 뭐하러 그래! 나 태우고 가든가!"
"흥, 그러면 뱃살 처진다고!"


별 어이없는 소리들을 했으나 일라이는 혼자서라도 나갈 기세였다.
리비카는사람들 눈치를 보다가 일라이의 뒤를 따랐다.
최근 너무 레피나에게만 붙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진심으로 일라이를 좋아했다.
기회가 된다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아흐, 날씨 좋다."

일라이는 레스레모나와 리비카를 데리고 다니게 되었다.
야신주 마을 곳곳에서 버섯 가지고 온갖 음식을 해먹고 있었다.
심지어 지하공동을 해방시킨 일라이 일행을 선망의 시선으로 보기도 했다.

'후후, 역시 나는 잘났어. 이런 시선 받는 것도 지겹다니까.'


승자가 되는 기분은 어떠할까?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모델이라도 된 것처럼 한껏 멋을 부리며 걷는 일라이.
그걸 보며 레스레모나가 순수하게 의문을 제기했다.

"왜 그렇게 걷지? 어디 불편한가?"
"아니, 그건 아니고……."


머리를 긁적이며 얼버무리는 일라이.
어떻게 봐도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곳곳에서 버섯 익는 냄새와 어린애들이 나와 서로 노는 모습이 보였다.
이종족의 어린애라고는 하지만 든든한 근육이 붙어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소름이 돋았다.
이들은 절대 적으로 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음? 이런…그걸 놓고 오다니."


문득 레스레모나가 멈춰 서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주머니를 뒤지더니 고개를 저었다.
일라이가 물었다.

"왜?"
"약초주머니를 놓고 온 것 같다.  근방에서 자라지 않는 거라 귀한 건데."
"그럼 돌아가야겠군."
"나 혼자서 충분하다. 먼저 가도 된다. 흔적으로 뒤쫓도록 하지."

새삼 레스레모나가 재주가 많다는 걸 깨달으며 일라이는 먼저 가버렸다.
그 뒤를 리비카가 허겁지겁 뒤쫓다가 레스레모나를 돌아봤다.
그녀는 희미하게 눈웃음을 짓더니 급히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리비카가 어떤 마음인지 간파한 것 같았다.


'이건 어쩌면 기회야!'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며 고개를 끄덕이는 리비카.
그녀는일라이를 살펴보다가 입을 열려 했다.
물론 일라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리비카, 모험하는데 어때?"
"네, 네? 아…힘든 것도 많지만 그래도 좋다 생각해요."
"그래?"

살짝 어깨를 움직이며 하품을 하는 일라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뺨을 긁었다.

"맞아. 나도 모험은 번거로운것이라 여겼거든. 지금도 그 생각이 아예 없진 않지만…정말 좋은 것 같아."
"그렇죠?"
"자기가 몰랐던 자신의 모습, 다른 사람의 모습도 볼 수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타인에게 접근할  있다는 것도 알았고."
"아하……."
"세계가 이 꼴이 된  안타깝지. 하지만 지금  모험하는 게 좋아. 목숨을 내놓고 다닌다 해도, 지금 바로 죽는다 해도 말이야."

의미심장한 일라이의 말에 리비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바로 죽을수는 없지 않는가.
둘은 시장가로 나아갔다.
결국리비카는 더 참지 못하고 일라이를 앞질러 가다가 멈춰 섰다.


"저, 왕자님."
"음?"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다.
자세한 이유는 몰랐지만 몸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 거라고.


"저……."
"세계 각지의 보물들이 모두 모였다! 와서 구경이라도 해봐!"


그때 장사꾼의 거친 고함소리가 끼어들었다.
얼마나 큰 건지 근처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전부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일라이는 미처 리비카의 말을 듣지 못하고 어깨 너머로 장사꾼을 바라봤다.
정말로 세계 곳곳의 보물이 있는 것처럼 쌓여 있었다.
운이 좋다면 헐값으로 좋은 물건을 구입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저기 좋은데? 한 번 가보자."
"네? 아, 그러도록 하죠."

시무룩한 얼굴로 일라이의 뒤를 따르는 리비카.
자신감이 사라져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호오, 주인장. 이 물건 괜찮아보이는데?"
"흐핫하하, 뒤에 있는 여자는 애인인가? 커플이면 값 좀 올려서 5천 에렌에 팔까 하는데."
"주인장이 아니라 양아치였군?"
"흐핫하하하하하하!"

장사꾼과 거침없이 대화를 나누는 일라이.
그 모습을 보며 리비카는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때 일라이가 물건 하나를 사는 게 보였다.
그건바로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목걸이였다.

"에잉, 바가지같지만 그나마 이게 멀쩡하니까. 리비카."
"네?"
"이거 가져."


간단하게 목걸이를 건네는 일라이.
리비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급히 목걸이를 걸어봤다.
무겁지도 않고, 새 것처럼 느껴지는 감촉이 마음에 들었다.
둘의 모습을 보며장사꾼이 히죽 웃었다.

"그건 인연의 목걸이야. 사람의 인연은 한 번 이어지면 쉽사리 끊어지지 않지. 죽지 않고서는 말이야!"
"그게 무슨 의미일지 모르겠군. 인연이야 알아서 사람 사귀며 만들면 되는 거지."

일라이가 투박하게 말하자 장사꾼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주술적인 의미의 인연이라네. 죽더라도 끊어지지 않는 인연! 너무나 질겨서 지겨울 정도의 인연이지."
"원 재수없는 소리나 해대고. 돌팔이였구만."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리비카와 함께 자리를 벗어나는 일라이.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리비카는 얼굴을 붉혔다.
가슴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저기, 왕자님."
"응? 아니, 그나저나 리비카. 무슨 소리  들려?"
"네? 아뇨."

고개를 젓는 리비카.
일라이는 귀를 파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리비카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 뭐 말하려고 했지?"
"아…그게 있죠."

리비카는 뜸을 들였다.
지금이라도 물러날 수 있다.
대충 목걸이 사줬다고 고마워 하며 물러나면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어렵게 만들어진 기회를 수포로 돌릴 셈인가?
결국 리비카는 결심하며 고개를 들었다.


"저…왕자님이 좋아요."
"음?"


근처를 지나는 글래머 체형의 이종족 여성을 보다가 일라이가 눈썹을 움직였다.
리비카는 그가 못 들었을까 봐 재차 말했다.

"제 마음 진심이예요. 진심으로 왕자님을 좋아합니다. 이러면 안 된다는  알지만……."
"지금 나한테 고백하는 거야?"
"네, 감히 제 주제에 고백하는 거예요. 이 마음 더는 억누를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먼 발치에서 지켜보고 싶었지만, 그래서는,그래서는……."


두 손을 맞잡으며 살짝 떠는 리비카.
그녀는 지금까지 일라이를 보며 품었던 감정을 다 말하고 싶었다.
몸이, 영혼이 그러라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부끄러운 기색을 감추며 리비카가 다시 입을 열려  때였다.

화악- 화악- 바우웅-!


저  창공에서부터 거대한 것이 홰를 치는소리가 들렸다.
아까부터 소리가 들리는  같다던 일라이가 급히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하늘이 일식이라도 온 것처럼 어두워졌다.
하늘이 어두워진 게 아니었다.
어느새 창공에는 거대한 한쌍의 날개를 펼치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그건 바로 드래건이었다.

"어이, 저게 뭘까?"
"엥? 와이번?"
"와이번이 저렇게 크다고?"


사람들이 놀라거나 불쾌하게 여기고 있을 때였다.
드래건은 입을 크게 벌리며 폭풍 같은 브레스를 내뿜었다.
평화롭던 시장거리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투콰카카카칵- 콰드득-!

주변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일라이는 그리메를 빼들며 방어자세를취했다.
그때 그는 보고야 말았다.
눈앞에서 폭풍 브레스에 말려든 채 사지가 찢어지는 리비카를.

투콰카카칵- 콰직콰직- 쩌억-!

"리, 리비카……!"
"왕자…님."


그 흔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체 리비카는 조각나버리고 말았다.
눈 앞에서 시녀를 잃자 일라이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지금까지 그 어떤 실패를 겪었어도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어차피 달려가다가 넘어질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러나 이번 일은 차원이 달랐다.

"꺄아아아악!"
"드래건이다, 드래건이라고오!"


주변이 비명으로 가득 찼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일라이는 리비카의 주검을 내려다봤다.
자신이 사준 목걸이가 의미심장하게 빛나는 게 보였다.
그 위로 이종족들이 도망치며 아무렇게나 짓밟기 시작했다.

"크윽, 제길!"

그리메를 다잡으며 일라이는 다시 위를 쳐다봤다.
드래건이 무슨 생각인지 근처에 있는 고층 건물 위에 내려서며 일라이를 굽어 보고 있었다.
거대한 도마뱀같은 얼굴, 와이번 따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견고하면서도 거대한 전신, 철과 같은 비늘과 발톱, 마지막으로 잿빛의 눈까지.
눈 앞에 있는 존재는 전설상에 존재한다는 드래건이었다.
꿈도 아닌 현실에서 마침내 드래건을 만나고 것이다.

"최악의 대마법사가 잡은  마지막 드래건이라 생각했는데. 뭐야…왜 드래건이……?"
"두려운가? 인간."

드래건은 입조차 벌리지 않고 그렇게 물었다.
일라이는 드래건의 생김새를 자세히 살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살기가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라이는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강철 같은 모습과 잿빛의 눈.'
'폭풍 같은 브레스를 날렸다. 풍룡?'
'아니, 놈은 아마도 다른 존재겠지. 이제야 기억이 나.'
'강철의 육체와 폭풍을 닮은 숨결의 드래건.  놈은 르갈론이다…북녘의 철창이라 불리는 드래건!'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제 사라진  알았던 드래건이 태연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일라이가 멍하니 올려다보자 르갈론이 비웃듯 말했다.

"그래, 내 존재가 놀랍겠지. 오만한 인간아, 우리 드래건들이 모두 사라졌다 생각하는가?"
"유감이로군."
"크흐흣, 정말 유감인 일이지. 우린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세계의 주인이 바뀔 때를 기다린 것 뿐."

사악한 미소를 짓는 르갈론.
일라이는 다시  번 리비카의 시체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말이 없었다.
말조차  수 없고, 숨조차 쉴 수 없는 상태였다.

"개새끼……."
"아끼는 여자였나? 안타깝군. 어차피  좀 낳다 보면 쓸모없어질 존재다만."
"말 함부로 하지마…이 새끼야!"

일라이는 살면서 마지막으로 무모한 용기를 내려고 했다.
냉철한 머리는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 도망가거나, 동료들을 기다려서 협공을 하는 게 옳다고.
그러나 인간적인 마음이 말하고 있었다.
리비카의 용기있는 고백에 대답도 못해주지 않았느냐고.
그렇다면 여기서 마음을 보여야 하지 않느냐고.


"하아아아앗!"


온 힘을 다해 기합을 내지르며 르갈론에게 달려드는 일라이.
그는 빠르게 근처 엄폐물과 건물 벽에 나 있는 틈새를 딛고 올라가며 건물로 오르려 했다.
그때 르갈론이 비웃듯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건물 벽을 전력으로 차며 반대편으로 튕겨나간 일라이가 이를 악물었다.
순식간에 르갈론이 내려선 광장에 내려서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인간…무모하구나."
"무모한 게 누군지 가르쳐주지!"


두 눈에 불똥이 튀며 그리메를  손으로 굳게 쥐는 일라이.
검을 들기 시작한 이래로 그는 항상 생각했다.
지킬 사람이 있다면 지키기로.
그게 왕족이자 남자의 의무라고.
지금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르갈론을 5m 정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사계(死堺)]

르갈론이 갑자기 두 눈을 희번뜩거리며 일라이를 쳐다봤다.
그 순간 세상이 멈춘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라이는 검을 든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세상이 멈춘 것이 아니었다.
일라이의 시간이 멈춘 것이었다.


"너, 너억……!"
"지금 죽이기엔 아깝지. 잠시 자고 있어라."

상대방의 정신에 간섭해서 죽음에 가까운 정신적 타격을 주는 힘의 경지, 사계.
드래건인 르갈론이 바로 그 사계를 사용한 것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며 일라이는 천천히 무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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