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1화 〉너무 잘나도 문제다 (21/100)



〈 21화 〉너무 잘나도 문제다

와이번을 해치우고 돌아온 일라이 일행.
일라이는 마을 거주민 몇 명을 종용하여 와이번 시체를 가져오게 했다.
어차피 와이번이 죽은 덕분에 버섯 재배를 다시 할 수 있게 됐다.
이 지역의 특산물 중 하나인 버섯은 진미나 다름없었다.

"와이번이 죽다니……."
"누가 그런 거지? 자하?"
"아니, 자하가 그러는데 저 인간들이 그랬대."
"쉽게  자들이 아니군. 진짜배기들이야!"


이종족들이 저마다 일라이 일행에 대해 말을꺼냈다.
물론 이런 반응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일라이와 아넬이었다.
특히 아넬은 묶고 있던 애쉬블론드 단발을 풀며 말했다.


"너무 잘나도 문제라니까."
"……네 저주마법이 유효한 건 맞는데. 숨통 끊은  나거든?"

아넬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일라이가 말했다.
그때 아넬이 풀어낸 머리를 부드럽게 쥐며 윙크를 했다.
묘하게 색기 있는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일라이에겐 통하지 않았다.

"애써 아닌 척하지 않아도 돼. 내가 많이 의지된다는 거지?"
"이 미친년은 언제 정신 차리려나……."


결국 아넬과 얘기하는 것을 포기하는 일라이.
어떤 주제로 얘기를 한다 해도 원하는 결과에 도달하진 못하리라.
아넬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뭔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러는 동안에도 마을은 축제분위기였다.
미티어에 의한 몬스터들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사는 이종족들은 강인했다.
그들은 죽은 자들은 추모하고, 살아 있는 자들과 함께 함께 일어설 것을 새삼 다짐했다.


"이건 좋은 징조야!"
"우린 생존할 있어!"
"강하다, 강하다, 강하다아!"


이종족들이 저마다 소리를 내지르며 와이번 시체를 바라봤다.
마을 중앙 광장에서 와이번의 시체가 거대한 봉에꿰인 채로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불이 붙으며 공개화형을 당했다.
이미 죽은 시체에 할 짓은 아니지만, 와이번은 마을 거주민들에게도 재앙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오죽하면 지하도를 폐쇄했을까?

"잘 타는군."


레스레모나가 감상적인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우린이 자기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물었다.

"저거 바베큐하려고 저런 걸까?"
"그건 아닌것 같다만. 여긴 이종족들이 많으니 바베큐로 먹기도 하겠군."


얼떨결에 레스레모나가 대답하고 말았다.
 대답에 우린은 아쉬운 듯 한숨을 쉬었다.
 세계로 넘어와서 고기구경을 해본지가 손에 꼽을 정도다.
이제 몬스터 고기라도 기꺼이 먹고 싶어진 것이다.
그에 반해 레피나와 리비카는 침착했다.

"저렇게 공개화형이라니. 의미심장하군."
"앞으로 올 몬스터들에 대한 경고, 그리고 아군인 마을 거주민들에 대한 희망을 상징하겠죠."
"물론 얼마나 더 버틸지는 운에 달렸지만 말이지."


레피나는 팔짱을 낀 채로  광경을 구경했다.
오늘은 그나마 쾌거이긴 했으나, 과연 얼마나 더 버틸지는 하늘에 달렸다.
아니, 어쩌면 오늘은 예외적으로 평화로웠던 날이라 할 수 있었다.
아넬이 아둥바둥대며 일라이의 어깨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라이는 고개를 돌렸다.
마을 거주민들에게 축하받고 있는 자하가 보였다.


"네 동생의 복수를 해냈구나!"
"제가 해낸 것도 아닌 걸요…헤헷."
"장하다, 장해!"
"아이, 부끄러워요."

유인원을 있는 힘껏 패대기 치던 여자는 어디로 가고,지금은 순박한 시골처녀만 보였다.
자하의 전혀 다른 모습에 적응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해는 갔다.
오직 그녀만이 가질 수 있는 전투본능.
그걸 최대한 활용한다면 백만대군을 얻은 것과 필적할 것이다.

'그렇기에 반드시 얻어야 하는 것. 좋아, 이제 슬슬 작업을…….'


입맛을 다시며 자하에게 다가가려  때였다.
갑자기 아넬이 두 다리로 일라이의 목을 감았다.

"컥, 커억, 뭐해?"
"저기 봐! 대박!"

피유우우우- 파아앗-!

놀랍게도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폭죽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그 뒤를 이어 여러 개의 폭죽이 날아오르며 불꽃놀이를 이어갔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불꽃놀이라니.
위험하지 않을까 싶지만 마을 거주민들은 자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불꽃놀이를 주도하던 남성 이종족이 외쳤다.


"오늘은 마음껏 먹고 마십시다! 몬스터들이 다시 오면 흠씬 두들겨 패주자고요!"
"예에에에에에!"


마을 규모의 상당한 축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자하가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일라이는 난색을 표했다.

"어어? 이런, 뭐하잔 거야?"


어떻게든 자하를 찾아서 섹스를 해야 하는데 차질을 빚게 된 것이다.
제국에 오면 제국 법을 따르라고 했던가?
이곳 마을의 법도를 이행하는  역시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일라이에게 급한 건 바로 실력자였다.

"그대가 일라이라는 인간인가?"


한참 아넬과 함께 자하를 찾고 있을 때, 새까만 피부에 늑대가죽으로  모자를 쓴 남자가 나타났다.
듬직하면서도 과묵한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일라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흡족하게 웃었다.

"인간은 모두 게으르고 약골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솔직히 놀랐다. 그대가 와이번의목을 날리다니!"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었어. 물론 모두와 함께 싸웠기에 가능했지."


일라이가 겸손을 보이자 남자는 이채로운 눈빛을 띠었다.
아무리 같이 싸웠어도 결국 숨통은 그가 직접 끊은 것이다.
오만해질 법도 한데 일라이는그러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라이 어깨에 타고 있는 아넬을 쳐다봤다.
오히려 그녀가 가장 스스로를 뽐내려 했다.

"엣헴, 내가 없었으면 전부 거기서 죽었을 거야. 나로 말할것 같으면, 절세미녀에 저주마법의 대가…꺄앗!"
"넌 좀 닥치고 있어!"

일라이는 일부러 아넬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방해했다.
갑작스런방해에 아넬이 이를 악물었다.

"이히익, 이거 놔! 놓으라고 멍청아!"
"애처럼 나대지 좀 마. 그리고 뭐? 절세미녀? 아주 지랄을 해라."
"절세미녀 맞거든! 나보다 이쁜 년이 어디 있다고!"
"망상  작작햇!"

갑자기일라이와 아넬이 다투자 남자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와이번 사냥의 주역들이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종족조차 달라서 누구를 편들어야 할 지 의아했다.
그러다가 남자는 웃어버렸다.

"푸흡, 푸흐하하하, 정말 친해보이는군. 부럽다, 그런 전우애는 흔치 않지."
"전우애 아닌데."
"응, 이런 고자 왕자랑 전우애라니?"


일라이와 아넬이 동시에 부정했다.
그러다가 서로를 노려봤다.

"뭐? 고자? 뒈지고 싶어?"
"틀린 말 했어? 내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척을 하다니.  서지?"
"웃기지 마라.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다른 년들이랑 노는 거 몰래 훔쳐봤잖아!"
"헉…감이 좋은데? 아, 아니지. 아니거든? 내가  아쉬워서?"
"유감이지만 너는 안 박을 거니까 그리 알아. 내 좆이 아깝다."
"지금 말 다 했어?"


마치 좋게 헤어진 커플을 보는 것 같았다.
남자는 다시 혼란이 찾아올 것 같기에 적당히 끼어들었다.
그는 감사인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겠다. 사실 몬스터들이 쳐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또 이런 일인가 싶었어. 친지들도 많이 죽었지. 건물도 정말 많이 무너졌어. 무자비한 놈들이야."
'건물은 자하가 그랬는데.'

일라이는 미처 대답하지 못하고 속마음으로 대신했다.
그런 일라이를 보며 남자가 힘없이 웃었다.

"설마 외부에서 들어온 모험가들에 의해 사태가 정리될 줄은 몰랐다. 이제 우리 마을의 자랑인 버섯전골도 부활할 테지."
"버섯 전골? 그게 그렇게나 맛있나 봐?"
"먹어보면 안다. 아무튼 고맙다. 우리 모두가 너희에게 감사하고 있어."

다시 한  감사인사를 표하는 남자.
아넬을 지면에 내려두며 일라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다지 어려운 일을 해낸 게 아니다.
하지만 받을 인사는 받는 정석이다.

"좋아, 좋아. 나도 너희가 우릴 이렇게나 인정해줘서 고맙다는 말 하고 싶다. 항상 경계만  줄 알았는데."
"은혜를 입었으면 알아보는 법이지. 거기다 너희는 실력으로 입증했어."
"그렇지. 아무튼 여기서 조금만 지내다가 나갈게. 피해는 주지 않을 거니 그리 알고."
"음? 정착하는 게 아니었나?"


남자가 의문을 표했다.
이 정도로 유능한 모험가들을 최대한 붙잡아두고 싶었다.
하지만 각자 사정이 있는 법이다.

"정착은 지금으로써는 꿈도 못 꿔.  목표도 따로 있고."
"그런가? 아쉽군……."


정말로 아쉬운 기색을 보이는 남자.
하지만 일라이는 살짝 팔을 치며 웃었다.


"뭘 그래? 너흰 우리보다 더 강인하잖아. 그나저나 궁금한 있는데."
"뭐지? 잘난 인간."


장난스럽게 말하는 남자.
별명이라고 하기에 적절하다 여기며 일라이는 피식 웃었다.
이종족도 막상 친해지고 보면 좋은 이들이 아닐까 싶었다.


"이 근처에야신산이 있지?"
"있지. 조금 걸어야 하고, 거기까지 가는 길이 끊겼지만. 있기는 해."
"흠, 길이 끊어졌어?"
"최근 일인데, 본래 그곳은 나무가 많은 우림인데 그 나무들이 한꺼번에 쓰러지고 말았어. 그 탓에 가는 길이 막혔지."
"그렇군."


짧게 말을 내뱉으며 일라이는 고민했다.
나무들로길이 막혔다.
처리하는 방법이 있긴 할까?
물론 정답은 바로 떠올랐다.
우린의 마법으로 해결하거나, 자하의 완력으로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자하와의 계약을 서둘러야 해.'

하지만 여전히 자하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대로 보내야  것 같았다.
결국 너무 잘나도 문제다.
적당히 잘났다면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들뜨지는 않았을 텐데.


"오늘 인간과 이종족이 친교를 맺습니다!"
"잘난 인간들이우리를 구했습니다!"
"내일부터 벗서 전골의 계보가 다시 이어집니다!"


발표를 하듯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나왔다.
언제 갔는지 아넬이 우린에게 매달린 채로 물었다.

"내일은 전골을 먹을  있겠는데?"
"오오 버섯전골 오오!"

격하게 흥분하는 우린.
아넬은 우린의 흥분을 이해할  있기에 해맑게 웃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며 레스레모나는 말없이 포근한 미소만 지었다.
그리고 일라이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좋아, 그럼 내일은 거기나 가볼까~!"
"잠깐, 그러다 몬스터를 만날 수 있다. 조심하는 게 좋아."
"몬스터들은 내 위협이 안 돼. 그나저나 너 이름이뭐야?"
"'블렌스'."
"나는 일라이. 걱정해줘서 고맙다."

짧게 손을 흔들며 블렌스에게 이별을 고하는 일라이.
그는 자하를 좀 더 찾아보려다가 와이번 시체로 눈을 돌렸다.
이미 이종족들이 온갖 술과 식사거리를 가지고 와서 와이번 시체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노릇노릇하게 잘 익은 와이번 시체가 조금씩 야위어가고 있었다.
이종족들이 신나게 뜯어 먹더니 시체에 소스까지 뿌렸다.

"이럴 때는 굴소스지!"
"그렇게 비싼 걸! 금수저라도 물고 태어났냐?"
"하하, 그럼 겨자소스!"
"그냥 고추장이나 발라!"

와이번 시체는 그들에게 좋은 일용할 식사가 되고 있었다.
과연 몬스터는 어떤 맛일지 궁금했지만 감히 다가가긴 어려웠다.
굳이 저걸 탐내고 싶지 않았다.


'파충류 맛이겠지.'


검술 아카데미에서 야영훈련을 하며 도마뱀을 잡아먹어 본 적이 있는 일라이.
그때의 참담하면서도 안타까운 감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크기에 비해 먹을  별로 없던 도마뱀.
맛은 닭고기를 연상케 하면서도 지극히 미미한 맛이었다.
다시 먹고 싶지 않았다.


"잘난 인간이 된 소감은?"


레피나가 다가오며 뾰루퉁한 얼굴로 물었다.
잠시 그녀의 안색을 살피다가 일라이는 웃었다.

"별 감흥은 없어. 난 원래 잘났거든."
"어흐, 재수없어."
"하지만 기분은 좋네."
"기분이 좋아?"


떠보듯 묻는 레피나.
그녀의 뒤로 리비카가 수행하기 위해 나타났다.
일라이는 와이번 시체를 신나게 뜯어먹는 이종족들을 바라봤다.
불길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환희에 몸을 떠는 구도자들 같았다.


"응, 자칫 절망에 빠질 뻔한 사람들이 전부 기뻐하고 있잖아?"
"이 기쁨이 얼마나 오래 갈 줄 알고?"
"그런  상관없어."


레피나에게서 등을 돌리는 일라이.
그는 여관을 향하며 말을 이었다.

"얼마나 이어지는 기쁨이든, 지금 당장 기뻐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저들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일 걸?"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일라이가 여관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레피나가 한참을 쳐다보자 리비카가 물었다.

"왕자님께서 철이 드신 거죠?"
"아니, 저 인간 원래 저래. 겉으로 멍청해 보여도 실은 모든 걸 냉철하게 주시하고는 하지. 단지 평소에 감정이 앞서는 것 뿐이야."

정확하게 일라이를 평가하며 레피나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와이번 시체가 거의 뼈가 보일 만큼 고갈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서로 준비한 음식까지 나누며 만찬을 즐기기 시작했다.
어쩌면 지금 같은 시대에 다시는 보기 힘든모습일 것이다.
일라이가 했던말을 곱씹으며 레피나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에서기나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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