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주지!
"그러니까 잘 생각해 보라고. 언제까지 부적절하게 힘을 쓸 거야?"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일라이는 마치 능숙한 사기꾼처럼 미소를 지으며 자하를 쳐다봤다.
지금 그녀는 거의 설득당하고 있었다.
애초에 설득당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넘쳐흐르는 힘을 억눌러야 했고, 그것을 간신히 씨름으로 푸는 나날.
그런 부자연스러운 나날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네 힘은 하늘이 내린 거야. 고작 수컷들 이기라고 존재하는 게 아니지. 좀 더 의미있게 쓰지 않겠어?"
"너 용사라고 했지? 그럼…세상을 구하는 데에 쓰라고?"
"그럴 수도 있지. 용사인 나를 따른다면, 세상을 구하기도 할 테고, 네 명예와 지위를 높일 수도 있어."
"하지만 내가 큰 도움이 될까?"
"물론이지! 너보다 센 녀석은 없을 거야. 부디 나랑 계약을 맺어 줘. 무너져가는 이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어보자고!"
한줄기 빛이 되라는 말에 자하는 고개를 틀었다.
그녀라고 어찌 부와 명예가 탐나지 않을까?
문제는 평소에는 조용하다가, 싸움만 시작했다 하면 드러나는 본성이다.
그 짐승같은 본성은 포유족인 그녀가 지닌 최대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단순히 인격이 바뀐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일종의 전투본능이었다.
"나는 자제력을 잃어."
"괜찮아, 네 매력이야."
"으, 응? 매력?"
"그래, 어제 씨름하던 너를 봤어. 정말 멋지더라. 있는 힘껏 싸우는 너를 본다면 더 멋지고 아름답겠지."
이제는 음유시인이라도된 것처럼 포근한 미소까지 짓는 일라이.
이쯤되면 이미 넘어가도 몇 번은 넘어갈 만한 상황이었다.
바라는 게 있는지 자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나 부탁할게. 너라면 가능할 거야."
"뭔데? 계약을 위해서 제시하는 건 당연하지. 들어주지!"
무엇을 바랄까?
자하 정도라면 왕국을 재건하고 나서 자신의 지위를 바랄지도 모른다.
기사단장? 아니면 그보다 좀 더 소박한 자리?
순수한 포유족인 그녀가 돈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일라이도 그걸 예측하고 있기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 마을에는 지하도가 있어. 과거에 자주 이용했지만 지금은 폐쇄된 곳이야. 거길 쭉 지나가다 보면 아래로 향하는 곳이 있어. '버섯 공동'이라는 곳인데 지하버섯이 자라나는 곳이야."
"신기한 구성이로군."
이토록 광대한 마을 아래에 깊고 어두운 공동이 있다니.
이건 이것대로 신기한 점이었다.
일라이는 좀 더 들어보기로 했다.
자하가 말을 이었다.
"그곳에 앞발이 없는 드래건이 있어. 아니, 와이번이라고해야 하나? 그 녀석을 없애줘."
"와이번이라…와이번은 늪이나 지하처럼 습기있는 곳을 좋아하지. 그런데 그놈이 무슨 원한이라도 샀나?"
싱긋 웃으며 일라이가 물었다.
와이번 하나 처치하는 건 큰 무리가 안 된다.
따로 원거리 무기를 준비해야 한다는 성가신 점이 있지만 말이다.
일라이의 질문에 자하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다가 대답했다.
"난 원래 외동이 아니었다. 남동생이 하나 있었는데…예전에 그놈이 내 남동생을 잡아먹었어. 복수를 하고 싶지만 놈은 너무 빠르고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더라고."
"흠, 날개가 없는 네겐 힘들었겠지. 무기같은 건 다루지도 않을 것 같고. 흠……."
턱을 괴는 일라이.
그때 레피나가 일라이에게 물었다.
"뭐야, 할 생각이야?"
"그럴까 한다만."
"아무리 너라도 그건 무리지. 단독으로 무슨 와이번을 잡아?"
"특대 사이즈의 발리스타만 있다면 가능해. 준비해달라고 해야 하지만, 그것만 있으면 못할 것도 없어."
"와이번은 생각보다 더 빠른 놈이야. 드래건만큼은 아니라고 거구에, 그 거구를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비행 몬스터지. 그런 놈을 어떻게 맞춰?"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는 거야. 땅에 떨어트리기만 하면 아무 것도 아니니까."
자신만만한 일라이와 신중한 레피나.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리비카가 나섰다.
그녀는 우선 애도를 표하는 듯 자하를 향해 고개를 숙이다가 일라이에게 말했다.
"왕자님, 이번 일은 모두의 도움을 받으셔야 할 것 같아요. 사안이 사안이니 만큼 조금 위험해질 수 있어요."
"위험해진다는 건?"
팔짱을 끼며 일라이가 물었다.
사실 어느 일이든 변수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변수는 항상 스스로가 제어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다.
리비카는 그것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먼저 지하 공동은 무척 광활할 겁니다. 버섯이 자라날 정도면 상당한 습도 역시 지녔겠죠. 하지만 공기는 어떨까요?"
"와이번도 잠시 지내는 둥지 같은 곳이야. 피차 조건은 같아."
"허나 왕자님은 인간이예요. 무엇보다 숨을 헐떡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죽음의 카운트 다운이죠. 그럴 거면 속전속결이 낫습니다."
"여자들이랑 같이 싸우라고?"
뺨을 긁으며 일라이가 묻자 리비카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참모정신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싸울 거라면 같이 싸워라.
이건 개인 토너먼트가 아니다.
힘을 빌릴 수 있다면 최대한 빌리는 게 좋다.
그래야 힘든 일을 빨리 끝낼 수 있을 테니까.
리비카의 말에 맞춰 레스레모나가일라이의 어깨를 잡았다.
"그말이 맞다. 나 역시 기꺼이 도울 준비가 됐다."
그녀의 사격술과 정령의 백업이라면 와이번을 떨어트리는 것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린.
"흥, 나도 도와주지. 감히 귀여운 남동생을 죽이다니! 더러운 쇼타콘 녀석!"
"…귀여운남동생이라고는 안 했어. 그리고 쇼타콘을 그럴 때 붙이라고 있는 이름이 아닌……."
"시끄럿!"
일라이가 태클을 걸려하자 우린이 소리지르며 막았다.
그모습을 보며 아넬이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실력자들이 모였다지만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와이번은 쉬운 적이 아니었다.
아넬이 일라이의 허벅지에 발을 올리며 말했다.
"나도 도와주도록 하지. 와이번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거야."
"좋아, 이 조합이라면 드래건이라도 두렵지 않지. 해보자고!"
왕자답게 일라이는 여자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두와 함께 하는 게 낫다.
그것이 왕이 기사들과 함께 싸우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단숨에 기획이 수립되었다.
길안내는 자하가 하기로 했다.
그녀는 유일하게 두려움을 안겨준 와이번이 여전히 무서운 것 같았다.
"너무 무서워하지마. 나는 사람의 마음 같은 건 치유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위로는 해줄 수 있어. 네 잘못 아니야."
레피나가 자하를 위로해주며 빛을 밝혀주었다.
그러자 자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박한 미소를 지었다.
누가보더라도 귀엽기 귀여운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의 F컵 가슴은 상당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저 엄청난 살덩이…….'
레피나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있다는 건 질투하고 싶어진다.
그래도 왕족으로서 그녀는 참기로 했다.
지하도는 생각보다 넓었다.
여러 사람이 드나들었던 곳이니 당연했다.
버섯 재배를 이유로 만들어진 지하공동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으, 벌써부터 공기가 습해."
이런 것에 예민한 우린이 표정을 찌푸렸다.
그러자 레스레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나라도 이건…후우."
머스켓의 탄환을 점검하며 그녀는 애써 공기에 대해서 잊기로 했다.
그나마 지하도 곳곳에 형광석이 박혀 있어 길을 찾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도중에 우물로 향하는 길로 빠질 뻔 했지만 바로 올곧게 갈 수 있었다.
마침내 지하공동으로 내려가는 길을 발견하자 일라이가 앞장 섰다.
"좋아, 해보자고."
"잠깐, 와이번 상대해본 적 있어?"
혹시 몰라 레피나가 물었다.
특정 몬스터를 상대해본 적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생각보다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일라이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없어!"
"……뭐?"
"검술 아카데미 다닐 때 상황극처럼 모의전을 해보긴 했어. 직접 상대하는 건 처음이지."
"너 진짜 또라이구나?"
"오빠라고 불러, 짜샤. 곧 멋진 오라버니라 부르게 해주지!"
말을 마치며 일라이는 바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타기 시작했다.
여자들 역시 군말없이 일라이의 뒤를 따랐다.
여전히 버섯이 자라나고 있는 지하공동은상당히 넓었다.
곳곳에 돋아나 있는 버섯과 형광석이 흡사 광산을 방불케 했다.
아마 와이번이 있다는 사실만 없다면 낭만적인 곳이었을 것이다.
"크흐, 저 버섯으로 전골이라도 해먹으면……."
우린이 군침을 삼켰다.
그녀는 마치 불고기 전골을 맛보듯 혀를 내밀어 살살 돌리기 시작했다.
위에서 아넬이 막 떨어지며 우린의 어깨에 탔다.
"읏샤, 너 참 비위 좋다?"
"으윽…나 불고기 전골 같은 거 좋아한다고."
"그게 뭔지 알아. 예전에 잠깐 있던 세계에서 사람들이 그거 해먹고 있더라."
"엇, 너 혹시……?"
쿠르르르릉-!
그때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만 진도가 약한 걸 봐서는 인위적인 것 같았다.
그리메를 빼들며 일라이가 지시했다.
"레스와 우린은 원거리 지원사격 준비, 아넬은 좀 더 앞에서 저주 마법을, 레피나와 리비카는 완전 뒤로 물러서!"
순식간에 진형이 잡히는 일라이 일행.
일라이는 허공을 응시하며 차갑게 웃었다.
마침내 와이번과 싸우게 된 것이다.
이것 역시 소중한 경험이며 투자다.
그렇다면 멋지게 끝내고 싶었다.
"크워아아아아아!"
그때 돌무더기를 무너트리며 와이번이 등장했다.
흡사 드래건을 연상케 하듯 피막으로 이뤄진 한 쌍의 날개, 머리에서부터 꼬리까지 길게 돋아난 촉수 같은 가시, 그리고 길쭉한 입.
드래건처럼 앞발이 있지는 않지만, 한 번 물면 놓지를 않는 긴 주둥이는상당한 흉기였다.
철컥- 타타탕-!
레스레모나가 순식간에 사격을 했다.
먼저 노린 곳은 와이번의 머리와 날개였다.
와이번이 놀라며 좀 더 높이 날아오르려 하자, 우린이 한 바퀴 돌며 외쳤다.
"히야핫, 우린우린 샤인 프리즘!"
우린이 마법을 발하며 허공을 가리켰다.
그러자 막 뚫려 있는 곳으로 올라가려던 와이번이 뭔가에 부딪쳤다.
아마도 진공이나 염력으로 만들어진 배리어에 막힌 것 같았다.
그렇게 막히며 와이번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불청객에 놀랐지만, 이제 자신이 유리하다는 사실에 덤비려 했다.
"크라르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일라이 일행을 향해 날아드는 와이번.
사냥감을 채가려는 솔개처럼 와이번이 날아오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발생했다.
그때 아넬이 천천히 속삭였다.
[Curse - Optical Illusion]
"왜곡."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와이번은 갑자기 온 몸을 뒤틀며 옆에 있던 공동 벽에 스스로 날아가서 처박혔다.
퍼어억- 쿠르으으으응-!
지성이 없는 존재는 물론이고, 있는 존재마저 자기 눈에 속게 만드는 왜곡 저주.
그것이 와이번에게 적중한 것이다.
알아서 벽에 처박힌 와이번을 보며 레스레모나와 우린이 치열하게 원거리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레스레모나는 탄환을 재장전하며 외쳤다.
"바람과 물의 친구여!"
바람의정령과 물의 정령이 서로 뒤섞였다.
그리고 거대한 물회오리로 변하더니 와이번에게 직격했다.
어색하게 접혀 있던 날개를 제대로 타격하며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키헤엑!"
와이번이놀라며 다시 날아가려할 때, 우린의 이중 마법이 날아들었다.
분홍빛 레이저와 눈보라 공격이었다.
"러브 섹시 빔!"
본질과 전혀 다른 이름을 부르며 우린이 마법에 힘을 줬다.
그러자 두 개의 마법이 와이번의 날개와 몸통을 꿰뚫어버렸다.
"쿠히에에에엑!"
처절한 비명과 함께 와이번이 힘없이 추락했다.
그 틈을 일라이가 놓칠 리 만무했다.
전력질주를 하던 일라이가 그리메를 두 손으로 잡았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그리메가 위협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혀를 내밀어 주변 공기를 맛보던 일라이가 웃었다.
"이런 곳에서 5분만 더 있다가는 뒤진다고. 그러니 그 전에 네가 뒤져줘!"
검으로 크게 호를 그리던 일라이가 허공으로 뛰어 들었다.
와이번의 거체가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며 포효를 내질렀다.
가까이에서 듣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우렁찬 소리였다.
하지만 일라이는 두려움 없이 와이번의 몸통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 송곳]
푸후욱- 꽈각-!
와이번의 살갗을 찢어발기며 그대로 뼈까지 관통한 일라이.
긴 목을 내빼며 처절하게 빔여을 지르던 와이번이 덜덜 떨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일라이를 떨쳐내기 위해 와이번이 날개를 움직였다.
"키히익!"
"흐흐, 못 날겠지? 그렇게 처맞았는데 다시 날 수 있다면 그게 이상하지!"
어떻게든 날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날개 하나가 반대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뼈가 드러날 만큼 망가진 상황이었다.
와이번은 재생력이 좋은 몬스터지만, 지금 당장은 다시 날 수 없었다.
거칠게 검을 빼낸 일라이가 바로 와이번의 안면을 향해 도약하며 외쳤다.
"상대 잘못 만났다 생각해라, 파충류 새끼야!"
"꾸히에에에에!"
[브류스터드 파검류 - 숨통 자르기]
검을 쥔 채로 크게 횡베기를 하는 일라이.
와이번의 피를 머금은 그리메가 순식간에 궤적을 남기며 사라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와이번의 목이 잘리며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푸샤학- 투툭-
마침내 와이번이 쓰러지자 자하는 마른 침을 삼켰다.
눈앞에 있지만 항상머나먼목표라 여겼다.
뭘 어떻게 하더라도 이기지 못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것을 일라이가 해결해줬다.
그는 결국 와이번을 쓰러트리고 만 것이다.
"대단해, 정말…대단해……!"
손으로 입을 막으며 울음을 막으려던 자하.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잠에 들 때마다 악몽과 함께 찾아오던 와이번.
그 와이번이 마침내 숨을 거둔 것이다.
모든 악몽의 시작이라 일컬어지던 존재가 쓰러지자 자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고개를 숙이며 울고 있는 자하에게 여자들이 다가와 위로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와이번을 쓰러트린 일라이는 소리없이 웃었다.
이제 남은 건 계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