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치열한 방어전!
환하게 불이켜진 거리를내려다보며 일라이는 한숨을쉬었다.
그의 곁에서 자연스럽게 둘러보고 있던 아넬이 물었다.
"여기라면 평생 지내도 될 정도인데?"
"근거는?"
일라이가 짧게 물었다.
멸망을 맞이한 세계.
이런 곳에서 평생 지낼 만한 곳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찾아내고 싶기에 일라이가 나선 것 뿐.
"이종족들은 인간에 비해서 기본적으로 신체능력이 좋아. 어느 혈족인가에따라 편차가심할 뿐, 대개 힘쓰는 일을 하고는 하지. 저 경비병들처럼."
타이밍 좋게 경비병들이 순찰을 하는 게 보였다.
제법 복장도 잘 갖춘 모습인지라 믿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라이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그렇게 볼 수 있지만, 저 정도의 전력으로는 좀 부족해."
"마법이나 도술을쓰는 혈족만 있다면 가능하다 보는데?"
"그게 쉽지가 않지. 우선 이 마을 자체를 봐. 근처에 산지가 많기는 하지만, 딱 붙어 있는 건 아니라서 요새로 삼아서 방어전에 쓸 수는 없어. 그럼 산성을 만들어야 하는데, 익히 알려진 대로 산성을 쌓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흐응, 그건 그래."
산에 진지를 구축하는 건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쉽지 않다.
같은 산이라 해도 바위 견고한 바위 지형이 있는가 하면, 잘 쓸려나가는 흙과 모래 지형이 있기도 하다.
지형을 이용한다는 건 무척 매력적인 생각이겠지만 여건이 따라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근처에 산성이 안 보이는 걸 보면 결국 실패한 것이라 여겼다.
일라이의 말을 곱씹으며 아넬이 진지하게 말했다.
"조금 시간을 들여서 전문인력을 양성하면? 여긴 충분히 그럴 여건이 되는 것 같은데. 논이나 밭도 많고, 이종족은 번식력도 좋으니까."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거지. 여기도 언제 재앙에 휘말릴 지 알 수 없어."
단호하게 끝을 내는 일라이.
아넬은 어깨를 으쓱이며 뒤로 돌아 앉았다.
그리고 두 발을 번갈아가며 흔들더니 물었다.
"여긴 어때? 마음에 드는 여자는?"
"있긴 한데 놓쳤어."
"한심하구만. 그래서야 하렘왕 되겠어?"
"헛소리하지 마. 나도노력하고 있다고."
"항상 인간들은 말해. 노력하고 있다고. 재능이 없으니 그만큼 더 노력한다고. 하지만 그런 녀석들 중에서 정말로 성공하는 경우는 별로 본 적 없는데."
"걱정마라. 내 걱정하는 게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걸 알게 해주지."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일라이.
하지만 아넬도 일라이라는 인간에게 적응하고 있었다.
비록 살 한 번 맞대보진 못했어도, 일라이가 얼마나 야심차고 유능한 남자인지 봤으니까.
진짜 재앙을 맞닥뜨린다면 어떨까?
그런 상황에서도 일라이는 태평할까?
"그럼 슬슬 잘 테니 꺼지시지."
"어머, 너랑 같이 잘 거라니까? 내가 같이 자준다는데 불만 있니?"
"미친년이 아직도……."
한숨을 쉬며 아넬에게 한 방 쏘려는 일라이.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상상도 못할 굉음이 들렸다.
슈후우웃- 콰르르르르릉-!
지면은 물론이고 고막까지 떨릴 만큼 압도적인 굉음이었다.
반사적으로 칼집을 들어올리며 일라이가 창문을 응시했다.
멀지 않은 저 편에서 거대한 운석이 떨어진 게 보였다.
평화롭던 야신주에 마침내 재앙이 도래한 것이다.
"으, 또 저래!"
아넬이 소리칠 때 일라이가 손을 휘저었다.
"너는 안전한 곳에 있어."
"나도 싸울 거거든?"
"그럼 따라 나오든가!"
문을 열며 바로 여관을 나서는 일라이.
상황은 항상 급박하게 찾아온다.
그 상황에서 침착하게 이겨내는 자가 바로 영웅이었다.
허둥지둥 자리를 피하거나, 진압하기 위한 이종족의 움직임이 보였다.
일라이는 빠르게 그들을 피해서 정면으로 달려갔다.
동시에 카드 속에 있을 우린을 불러냈다.
"우린,너만 믿는다!"
쉬이이잉-!
기이한 소리와 함께 우린이 나타났다.
평상복 상태의 우린은 기분 나쁘다는 듯 외쳤다.
"내가 무슨 주머니 괴물이야?"
"얼른 싸울 준비나 해!"
일라이가 막 외칠 때 둘 사이로 어떤 그림자가 뛰어들었다.
바로 레스레모나였다.
그녀는 빠르게 장전을 마치고 정면을 향해 머스켓을 조준했다.
그리고 지체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끼익- 타앙-!
주변의 혼란을 잠재울 만큼 강렬한 총성이 울려퍼졌다.
일라이가 정면을 향해 그리메를 뽑아드니, 막 머리에 구멍이 난 미노타우로스가 힘없이 쓰러졌다.
저 거구를 총알 한 발로제압했다는 건 기술력과 레스레모나의 타이밍이 위력적이었다는 증거였다.
"마, 마을 왜 이래?"
"위협이 도래한 거지. 어서 실력을 보여주실까? 마법숙녀."
일부러 마법숙녀라는 말에 강세를 넣는 일라이.
우린은 일라이를 노려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봉을 꺼내더니 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한 바퀴 돌며 외쳤다.
"햐아아앗, 심우린 프리즈마 하트!"
"…쇼를 해라."
우린이 마법소녀로 변신할 때 일라이는 정면으로 달려갔다.
미노타우로스를 포함해 새빨간 전신을 지닌 오크나 귀가 2쌍인 고블린들이 나타났다.
언제나 해오던 싸움이다.
그러므로 일라이는 두렵지 않았다.
막 거리를 좁히던 오크가 거대한 도끼를 치켜들었다.
일라이가 두 눈을 빛내며 그리메를 휘둘렀다.
"둔하잖아!"
푸훅-써걱-!
순식간에 오크의 두 팔을 자르며 앞으로 달렸다.
동시에 레스레모나가 지원사격을 하며 오크의 머리에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변신을 마친 우린이 분홍빛을 뿜어대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정신없이 모여드는 몬스터들을 보며 외쳤다.
"사랑과 정의, 우정의 이름으로 용서치 않겠다! 하아아아아아아앗!"
서서히 기를 모으는 우린.
힘은 그렇게 발동되었다.
[Strength]
스스로의 근력과 완력을 강화시켜주는 마법을 거는 우린.
그녀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몬스터들에게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자살행위.
그러나 본래 지닌 단점을 상쇄할 만큼의 마법이 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러블리 킥!"
슈욱- 퍼퍽-!
하이 킥 한 방에 고블린의 목을 따버리는 우린.
뒤에서 미노타우로스가 달려들자 우린은 날렵하게 뒤돌려차기를 했다.
"매지컬 플라즈마 킥!"
타앗- 퍼어엉-!
흡사 대포라도 터진 듯한 소리와 함께 미노타우로스의 거체가 저 멀리 날아가버렸다.
엄청난 위력인지라 곁눈질로 보고 있던 일라이조차 당황할 정도였다.
'진짜 미친년이네.'
혀를 내두르며 일라이는 바쁘게 검을 놀렸다.
수만 많다 뿐이지, 몬스터들의 질은 거기서 거기였다.
하지만 이러는 동안에도 마을의 피해는 커져만 갔다.
일라이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운석이 떨어진 곳에서 몬스터들이 생겨나는 것 같아. 뭐지? 단순히 피해를 주는 마법이 아닌 건가? 아니…마법이긴 한 건가?'
갈수록 저 운석이 수상했다.
압도적인 위력으로 지면을 박살내는 미티어.
그 미티어를 정작 보려고 하면 시간이 지나 사라지기도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으리라 짐작하며 일라이는 마저 고블린의 목을 베었다.
퍼석- 푸화악-!
고블린이 피를 뿌리며 죽자, 그 시체를 타고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일라이가 옆으로 빠지며 그것을 쳐다봤다.
사람만큼 거대한 사마귀 같지만, 마치 암살자처럼 흑색의 상의를 입은 기이한 생명체였다.
그리메를 겨누며 물었다.
"네가 이놈들 대장이냐?"
"크킷, 대장은 따로 있지."
"말이 통해서 다행이군. 진짜 대장은 누구냐? 너 따위한테 볼 일 없어."
"신나게 거짓 존재들을 없애고 있겠지. 너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대낫처럼 거대한 앞발을 칼처럼 갈아대기 시작하는 사마귀.
그러다가 날개를 펼치며 일라이에게 덤벼들었다.
순간적인 속력이 아음속에 가까웠다.
그러나 일라이에게는 느린 속도에 불과했다.
주변 기물을 날리며 달려드는 사마귀를 보며 일라이가 그리메를 두 손으로 쥐었다.
"검술 아카데미에서는 너보다 더 쩌는 새끼들 많이 봤다고!"
[브류스터드 파검류 - 추수]
사마귀의 앞발은 물론이고 목까지 깔끔하게 갈라버리며 옆으로 구르는 일라이.
사지가 절단되며 허공에서 흩어지는 사마귀를 보며 일라이는 조소를 보냈다.
고작 저 정도로 자신을 상대하려는 것 부터가 어불성설이었다.
"자, 그럼 대빵을 찾으러 가볼까?"
일라이가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근처에서 날뛰던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5마리의 고블린이 오크 시체 하나를 들고 바로 일라이에게 내던졌다.
일라이는 가볍게 오크의 시체를 썰어버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일라이의 뒤에서5발의 총알이 빠르게 날아오며 각각 고블린들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핏핏핏핏핏-!
일라이와 레스레모나의 훌륭한 합작이었다.
같이 싸워본 건 이번이 처음일 텐데, 둘은 마치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호흡이 맞았다.
고맙다는 의미로 엄지를 치켜들며 일라이가 거리로 들어왔다.
"꺄아가하아악!"
"흐헥, 푸흐헥!"
고블린 하나가 이종족 여성의 사지를 자른 채로 범하고 있었다.
거대한젖가슴 한쪽을 피가 나게 물어뜯다가 사정을 하려는지 몸을떨었다.
그 고블린의 목이 난데없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새빨간 궤적을 그리며.
"싸기 전에 뒤지면 존나 억울하지? 그렇게 뒤져."
일라이는 고블린의 시체를 걷어차고는 이종족 여성을 내려다봤다.
풍만한 글래머 체형이지만 이미 살리기엔 늦은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종족 여성은 고맙다는 의미로 웃더니 서서히 눈을 감았다.
"쯧."
일라이.
그는 딱히 영웅은 아니다.
정의로운 마음으로 용사가 된 건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살릴 수 있는 목숨이 앞에서 죽어가는 건 인간으로서 지켜보기 힘든 일이었다.
근처에널브러져 있던 담요 하나를 시체 위에 덮어주며 일라이가 말했다.
"편히 잠들길."
아쉬움을 뒤로 하고 거리의 반대편으로 달려가는 일라이.
그러다가 옆에 있던 건물이 폭삭 무너지며 괴성이 들렸다.
파스슷- 커어어엉-!
급히 멈추며 고개를 돌리자 거대한 유인원을 닮은 것이 포효를 하며 등장했다.
가슴에는 이상한 촉수 하나가 비틀거리며 몸을 핥고 있었고, 유인원은 신경 쓰지 않는지 일라이를 노려봤다.
보자마자 기묘한 느낌이 들어 일라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기분이 드는데…….'
말라가는 입술을 적시며 일라이가 그리메를 들었다.
그리고 차갑게 물었다.
"뜰 거면 얼른 덤벼. 이제 와서 겁나나?"
쿵쿵쿵-!
대답은 돌진으로 대신하는 유인원.
유인원이 적정 거리까지 오면 바로 목을 날려버릴 생각을 하는 일라이.
그렇게 그리메를 쥔 손에 힘을 불어넣고있을 때, 옆에서 익숙한 모습의 이종족 여성이 뛰어들었다.
그녀는 바로 자하였다.
"흐으앗!"
후우욱- 푸콱-!
측면에서 뛰어들며 순식간에 유인원으 안면을 걷어차는 자하.
그 박력만큼은 마법을 사용하는 우린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거구의 유인원이 멍한 얼굴로 비틀거리자 자하는 자연스럽게 유인원의 한쪽 발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뒤로 메쳐버렸다.
쿠우웅- 쾅-!
유인원이 쓰러지마 건물 하나가 박살났다.
그러나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지 자하는 유인원의 발목을 잡은 채로 들어올렸다.
이번에는 건물이 밀집된 곳을 향해 있는 힘껏 내던졌다.
마치 장난감 인형이라도 된 듯 유인원은 힘없이 건물들에 날아가 피투성이가 되었다.
콰르르르릉- 푸컥-!
온 몸이 피칠갑이었으며, 대놓고 포효를 내지르던 위세조차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겁먹은 표정으로 자하를 바라보는 유인원의 얼굴은 압권이었다.
"정말 대단한 여자로군."
레스레모나가 있는 대로 솔직하게 말했다.
뒤이어 몬스터들을 처치하고 온 우린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하아, 하아. 이제 몬스터 없지?"
"저게 마지막일 거야. 그런데……."
일라이가 가리킨 곳에는 이미 자하가 유인원의 안면을 주먹만으로 찌그러트리고 있었다.
퍽퍽- 츄퍽- 퍽퍽뻐억-!
그야말로 일방적인 폭행의 현장이었다.
유인원은 제대로 반격조차 못하고 얼굴이 뭉개지며 죽어버렸다.
가슴에서 버둥거리고 있던 촉수 역시 자하가 한 번 짓밟는 것으로 고깃덩이가 되고 말았다.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자하는 공허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음? 어, 어머……!"
그러다 정신이 든 건지 얼굴이 온순해진 자하.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숙였다.
유인원이 나타나서 없앤 건물보다, 자신이 유인원을 처리할 때 무너트린 건물이 더 많았다.
이 정도면 누가 테러범인지 판별하는 게 어렵지 않을 정도였다.
자하가 막 자리를 벗어나려 할 때 일라이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잠깐만!"
"히익!"
자하가 반사적으로 일라이의 정강이를 가격하려 했다.
일라이가 피하자 자하는 몸을 살짝 틀며 로우 킥을 시도했다.
비록 정신은 들었어도 전투감각은 그대로였던 것이다.
"아오, 말 좀 들어봐! 그 좋은 재능을 썩힐 거야? 앙? 마음대로 표출하고 싶지 않냐고!"
있는 힘껏 소리를내지르는 일라이.
그의 말에 동요한 건지 자하는 막 내지르려던 주먹을 멈췄다.
일라이의 얼굴 앞에서 멈춘 주먹은 박력 그 자체였다.
천천히 주먹을 거두며 자하가 물었다.
"마음대로…표출한다고? 흐, 흐읏,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가능해. 나를 따라오면 가능하다고!"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일라이.
뒤를 돌아보며 여자들에게 눈짓까지 했다.
그러자 여자들이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자하는 마음이 동하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얘기라도 들어보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