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화 〉포유족 숙녀, 유자하 (18/100)



〈 18화 〉포유족 숙녀, 유자하

"하아, 자꾸만 여자들이 늘어나는 것 같은데."


레피나가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조금 쉬다 일어나서 저녁식사를 하는 일라이 일행.
한참 말을 꺼내던 일라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강제하지는 않았어. 선택은 본인의 몫이지."
"어떻게든 선택하도록 만들었겠지. 상대는 이계에서 난데없이 여기로 떨어진 방랑자. 선택의 폭이 넓을까?"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일라이를 노려보는 레피나.
비록 일라이를 싫어하는 그녀지만, 항상 지켜보기도 했었다.
배다른 남매이긴 해도 나중에는 왕위를 두고 다툴 테니까.
믿음직스러운 면은 어디에도 없는 일라이였기에 이런 결심을 하는  쉬웠다.
하지만 지금은 어찌 되든좋을 일이었다.
왕국은 사라졌고, 세계는 멸망해가고 있었다.

"크흠,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겠군."
"그렇지? 그 여자가 그렇게 탐나?"
"당연하지. 당장 전력에 투입할 수 있을 정도야."


당당하게 대답하는 일라이.
잔치국수를 한 그릇 해치우며 레피나가 물었다.


"그럼 하나 묻자. 그 여자 지금 어디에 있는데?"
"여기에."


대답을 하며 일라이가 가리킨 곳은 그의 목걸이에 꿰어 있는 카드였다.
검붉은색으로 빛나고 있는 카드가 불길해 보일 정도였다.
전부터 봐오던 것이지만 막상 전면에나타난 건 이번이 처음.
이번 기회에 레피나는 궁금한  묻기로 했다.

"그러고 보면 알려주지 않았지? 네가 지닌 능력이란  대체 뭐야?"
"이거랑 관련됐지."
"그거, 그리고 여자들이랑 관련됐다고는 들었어. 정확히 뭐야?"


일라이는 잠시 고민했다.
이 사실을 알려줘도 되는 걸까?
물론 지금 레피나는 일라이에게 협력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왕국의 왕족이기도 했고, 어쨌든 본격적으로 왕위를 다투기 전에 세상이 멸망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식으로 계약을 맺지 않아서 어떻게 될 지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 점을 상기해 보지만 역시 자기 성격대로 밀고 나가고 싶었다.


"간단해. 계약한 여자와 상부상조하는 거야. 여자는 나를 지키는 기사가 되고, 나는 그런 기사를 최대한 대우하며 적재적소에 써먹지."
"너랑 잘 어울리는 능력이네. 사람을 마음껏 부려먹는 거."
"……아직 부려먹지는 않았거든? 아무튼 그렇게 계약을 맺은 사람은  카드에 잠들 수도 있지."
"잠들어?"
"음, 사실 이 점은 나도 잘 몰라. 카드 안에들어가겠다고 하면 나는 허락해. 들어간 사람이 거기서 뭘 하는지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딱 한  과거에 계약을 맺었던 그 여자도 별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적어도 편히 잠들다 나온 게 아닐까 추측한 것 뿐.
말 그대로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일 수도 있다.
이건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신기하네요. 사람 하나가  작은 카드에 들어갈 수 있다니."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리비카.
레피나는 관심 둘 가치가 없다고 핀잔을 줬으며, 레스레모나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들어본 적 없는 능력이다. 그대는 타고났군."
"적어도 능력만큼은 말이지."


역시 가장 먼저 식사를 끝내는 일라이.
그는 방으로 돌아가서 쉬는 게 아니라, 마을을 돌아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나머지 일행은 레스레모나가 있기에 걱정이 없었다.
이럴 때 밖으로 나다니지 않으면 언제 나다닐까?


"그래도 여긴 공기가 좋네. 치안도 나름 확실하고."

이종족끼리 단결해서 그런 것일까.
야신주는 거리 곳곳에 경비병으로 보이는 건장한 이들이 자주 보였다.
 정도라면 갑자기 지진이나 재앙이 덮치지 않는 이상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느긋하게 돌아다닐 때였다.

"흐앗하하하하! 다 덤벼, 다아!"

광장 한 구석에서 어떤 여자가 호쾌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투기장 같은 것이 아닐까 싶어 일라이가 빠르게 향했다.
싸움 구경만큼 재미있는 건 없으니 말이다.


"크흐, 이번에도 승리인가?"
"진짜 압도적이야. 아무리 '포유족'이라지만, 어떻게 남자보다 더 센 거지?"
"근육도 그리 크지 않은데. 이런, 또 이기겠군!"


지켜보던 이종족들이저마다 혀를 내둘렀다.
현재 이들은 두 사람이 씨름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검은 단발의 여자가 연속해서 남자들을 내팽개치는 상황이 보이고 있었다.
심지어 여자는 다소곳해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매우 호전적이었다.

"다음, 얼른 다음!"
"저러면 누가 덤벼?"

지켜보던 이가 허무하다는 듯 묻더니 고개를 저었다.
여자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일라이는 관심이 가서 그녀를 더 지켜봤다.
검은색 단발에 회색 눈, 근육보다 드러나 보이는 F컵 가슴과 몸매 라인이 잘 나오는 얇은 옷이 특징이었다.
그녀는 두 손을털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더는 나서는 상대가 없자 씨름장을 내려온 것이다.

"그, 그럼 이만……!"

내려오자마자 마치 다른 사람이  것처럼 얼굴을 붉히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이들이 저마다 헛웃음을 들이켰다.
이중인격일까?
일라이가 근처에 있던 이종족에게 물었다.


"이봐, 저 여자 왜 저래?"
"여행자인가 보군? 저 녀석 이름은 '유자하'. 현존하는 포유족 중에서 가장  걸?"
"압도적이긴 하더군."
"남자보다  세다니  다 했지. 하지만 평소 성격은 온순해. 저렇게 온순한 게   분위기 탔다 하면 다 뒤집어 엎으니 문제지."


대체 저런 여자를 누가 데려가겠냐는 의문을 남기며 이종족 역시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일라이는 군데군데 파헤쳐진 씨름장을 살펴보더니 턱을 쓸었다.

'여자가 서 있던 곳을 예측해 보자.여기인가? 파인 깊이와 진행 방향을 보면 얼마나 힘을 들인 지  수 있지.'
'최소한의 힘을 들이면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았어. 힘을 쓸 줄 아는 여자다.'
'게다가 연속해서 자기보다  체구의 남자들을 들어 메쳤다. 기술 또한 뛰어나.'


단숨에 일라이의 흥미거리에 걸리고 말았다.
인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더군다나 자하처럼 압도적인 특징이 있는 여자라면 더더욱!

"그런데 놓쳤네……."

뒤통수를 긁으며 일라이는 주변을 돌아다녔다.
혹시 운이 좋아 만나지 않을까 싶었다.
수소문을 하고 다니기에는 인간이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물어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결국 자하를찾지 못한 일라이는 근처에 있는 돌멩이를걷어찼다.


"젠장,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데 놓쳤어. 뭐가 그렇게 빨라?"

보자마자 잡아채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있었을까?
힘은 자하가 압도적일 텐데.


"어차피 야신산에도 가야 하니까 당분간은 여기 있어야지. 씨름장 위주로 돌아다니면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듯 말하며 일라이는 그대로 여관으로 향했다.
야신주는 평소에 볼  없던 동방풍의 마을이었다.
소박한 옷차림을  이들이 많았고, 조금만 길에서 어긋나도 논밭이 보였다.
이런 평화로운 곳이 재앙을 피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조차 하기 싫다는 듯 일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으흐…엇?"


자하 놓친 것을 자책하던 일라이가 멈춰 섰다.
마을내 온천 근처에서 예언자로 보이는 사람이 보였다.
얼굴은 여우처럼생겼는데, 비열하다기 보다 세월의 깊이가 느껴졌다.
그는 개량한복을 입은 노인이었는데 일라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이로군. 점이라도 볼 텐가?"
"여우가 말을…아니, 음. 한 번 봐도 괜찮겠지?"
"세상에 해도 괜찮은 건 무척 많지. 해도 괜찮지 않은  하려니까 문제일 뿐."

여우 노인의 의미심장한 말을 들으며 일라이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적당히 준비를 하고 점을 보려 했다.
먼저 여우 노인이 입을 열었다.

"태어난 날의 날씨와 날짜, 그리고 태몽을 말해보게."


여우 노인의 질문에 대답하며 일라이는 기억을 뒤졌다.
다른   기억이 나는데 태몽이 애매했다.
사실 왕족이라고 해서 다 세상에 선택받은 것 마냥 특별한 태몽을 가지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정말로 전설적인 태몽을 갖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태몽 자체가 없어 억지로지어내기도 한다.
마침 기억난 태몽을 얘기하며 일라이가 멋쩍게 웃었다.

"뭐, 나도 믿지는 않지만 그렇대. 난데없이 이계의 인간이 나타나서 모든 드래건을 부리다니. 크흐흣."
"이계의 인간이라면 모습은 기억나나?"
"아니, 새까만 형체였어. 마치 그림자처럼. 그래서 불길하다는 의견도 있었대."
"흠…그럼 이제……."


서서히 점을 치기 시작하는 여우 노인.
그는 침착하면서도 날카롭게 시선을 훑으며 점판을 내려다봤다.
쌀알을 움직이기 위해 손을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오직 눈은 점판의 한가운데에 고정시켰다.
 이리 열심히 하는지 일라이도 궁금해졌다.
그때 이변이 벌어졌다.
사방으로 퍼지던 쌀알들이 일제히 한가운데에 몰리기 시작했다.
일라이는 여우 노인이 염력을 쓰는 건가 의심했다.

"이상하군…이건 무조건 대인의 길운인데."


분명 좋은 점괘였으나 여우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염을 매만지며 이번에는 잣과 콩을 던졌다.
던지자마자 잣과 콩이 한가운데로 몰려들었다.
분명 점판은 피라미드처럼 한가운데가 튀어나온 형식이었다.

"염력이라도 부리는 거야?"

일라이가 웃으며 묻자 여우 노인이 두 눈을 굴렸다.

"능력을 가진 자는 점괘를 만날 수 없어."
"으, 음? 그래?"
"사소한 능력이라도 타고 났다면  이렇게 벌어먹지도 못 했지. 아무튼 기묘한 점괘가 나왔군."
"뭔데?"


여우 노인은 한가운데에 모인 쌀알과 잣, 콩을 가리켰다.
그리고  주변을 천천히 손으로 쓸며 입을 열었다.

"이 한가운데는 너이면서도 세상이다. 세상의 중심이 너라고 생각하고 점괘를 보는 게 일반적이지."
"그런 얘긴 들은 적 있어."
"그러나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만은 않아. 그래서 쌀알을 뿌리거나 잣, 콩을 뿌릴 때 주변으로 흩어지는 게 당연해. 한가운데에 모이는 일은 잘 없어."
"그런데?"
"하지만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지. 보게, 서로 다른 것들이 마치 더 높은 곳으로 오르려는  모여 들었잖나? 저 꼭대기에 대체 뭐가 있다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여우 노인이 멋쩍게 웃었다.
지금까지 이런 점괘는  번 본 적이 있다.
대개 그런 이들은 역사적으로 큰 획을그은 자들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멸망해가는 세상에서 알지도 못하는 인간이 이런 점괘라니.
무언가가 어긋났다고 여겼다.


"좋은 거 맞지?"
"좋은 거지. 적어도 그대는 제왕의 상이 있어. 사람복이 많고, 혹여 없다 하더라도 알아서 재사들이 모여들 거야."
"그거 반가운 소리군!"

금방이라도 뛸 것처럼 폼을 잡으며 웃는 일라이.
하지만 여우 노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분명 너한테 좋은 일이기는 한데…너무 과도하게 모여 있어. 이것들을 하나로 이어주지 못하면 과부하가 되고 말겠지."
"에헤이, 걱정마. 그런 능력은 내게 있으니."
"이 주변은 자연의 만물을 상징한다. 미래에는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을 다룰지도 몰라. 그래도 그렇게 자신할 텐가?"
"음? 그래?"


신이지 않는 한, 인간 외에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는 없다.
그건 이미 인간의 능력을 아득히 초월한 짓이다.
하지만 점괘로 보면 이미 일라이가 그것을 가능케 하다고 나와 있었다.
이 얼마나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일까?

"이런 점괘는 처음이야. 이런 인간 역시 처음이고."
"거 너무 그러네. 지금까지 쭉 실패자들의 점괘를 본 거잖아? 그럼 최초의 승리자 점괘를 볼 만도 하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일어서는 일라이.
그는 자신 있었다.
비록 왕국이 무너지고, 세상이 멸망해가도 그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감을 놓지 않을  있던 것이다.

"인간은 흔히 일의 성공여부를 운에 맡긴다 하더군."
"그렇지. 사람마다 주어진 운이 다르거든."
"우린 하늘에 맡기지."
"신 말인가?"
"신일 수도 있고, 그 외 초월적인 존재일 수도 있지. 아무튼……그 앞길에 하늘이 돕기를 바라네."
"덕담 고마워. 복채나 받으라고!"

당차게 복채를 내놓으며 일라이는 여관으로 향했다.
자하를 놓쳐서 안타까웠는데 그래도 기분 전환은  셈이었다.

"비록 미신이지만 기분은 좋단 말이야. 흐후후."

어깨를 으쓱이며 힘차게 걷는 일라이.
제왕이 될 상이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니 놀랄 게 없었다.
다만 사람 말고도 다른 것들을 다룬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건 혹시 세상 전체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수많은 생각들이 소용돌이 치듯 일라이의 머릿속에서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일라이는 평온한 모습을 유지하며 그대로 여관에 들어갔다.
누구보다도 크나큰 꿈을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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