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화 〉마법소녀를 구워삶는 법 (16/100)



〈 16화 〉마법소녀를 구워삶는 법

얼떨결에 일라이 일행에 합류한 자칭 마법소녀, 심우린.
그녀는 리비카의 허리를 잡은 채로 말에 올라 있었다.
평생 말을 타본 적이 없기에 언제 떨어질 지 노심초사였다.
그 모습에 리비카가 웃으며 물었다.

"말 타본  없으신가요?"
"으읏, 네……TV로만 봤어요."
"TV……? 사는  근처에 말이 없으셨나 봐요!"
"평생 공부만 했는데 말을 타볼 일이 있긴 했을까요?"

자조적인 우린의 대답에 리비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비카는 귀족가에서 태어나 철이 들 때부터 왕궁에서 일했다.
시녀로 살아온 시간은 편안하지는 않지만, 결코 부족하지도 않을 삶이었다.
그래서하루의 대부분을공부에 쏟아야 하는 대한민국 학생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럴 수도 없었고 말이다.

"그나저나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말, 진짜 믿을 거야?"

레피나가 일라이의 옷깃까지 당기며 물었다.
산맥을 내려오면서 갖가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우린이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얘기가 가장 충격적이었다.


"글쎄……믿어야지, 어쩌겠어? 당사자가 저렇게 있잖아."
"진짜 미친년일 수도 있잖아?"
"야, 네가 그런 말하니 좀 웃기다. 아무튼 미친년이라도 좋아. 능력은 있으니까."


일라이는 왕족 답지 않게철저하게 사람의 능력을 본다.
기본적인 인성만 있다면, 그 사람이 이상한 취미가 있거나, 정신병자라 해도 유능하다는 이유로  받아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우린은 대학생이 되고 나서 철저하게 다이어트를 했다.
그 결과 지금의 세련된 몸매를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외모 역시 일라이에게 크게 어필이된 것 같았다.

"하여간 미친새끼……."


대놓고 일라이를 욕하며 옆으로 빠지는 레피나.
리비카가 우린과 대화나누는 것을 보며 레스레모나가 물었다.

"저 자가 쓰는 마법, 조금 파괴적이긴 해도 정교하더군."
"그래? 그럼 역시 믿고 쓸만 하겠네."


기사단이라고 해서 무조건 기사만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오직 일라이만을 위한 기사단에는 그 누구라도 들어올  있었다.
유능하고 예쁘기만 하다면 말이다.


"잠시 쉬어가자!"

야신주마을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쉬는 일라이 일행.
모두 말에서 내리며 아직 멀쩡한 초원길 위에 앉았다.
풀을 통해서 촉촉한 물기가 느껴졌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 레스레모나가 말했다.

"비가 오겠어."
"엘프들은 이런 거에 민감하지. 언제쯤?"
"2시간 뒤."
"그 정도라면 괜찮아. 그 전에 도착할 테니까."


조금 서두르는 식으로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를 시기였기에, 적당히 강행군을 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하지만 문제는 야신주 마을에 들어설 때부터였다.
야신주 마을 거주민은 전부 이종족이라 인간들을 배척하고는 한다.
물론 지금 일라이 일행에서 인간이래봐야 일라이와 리비카, 그리고 우린이 전부다.
하지만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인간이라 배척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부디우리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건량 하나를 까먹으며 일라이가 한숨을 쉬었다.
가장 걱정되는  야신주 마을의 폐쇄성이었다.
대중에 알려진 것처럼 야신주가 폐쇄적인 곳은 아니다.
다만 지금 인원의 성비를보자면 남자 하나에 여자는 여럿이다.
충분히 의도가 무엇일지 짐작해볼만 하므로 야신주 거주민들이 의심할 수 있었다.

"걱정마라, 내가 네 결백을 같이 말할 테니."

든든하게 입을 여는 레스레모나.
이왕 살까지 섞은 사이, 그녀는 일라이를 위해서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그녀의 말에 일라이가 웃어버렸다.

"그거 정말 든든한데?"


건량을 다 해치운 그는 일어났다.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가려 한 것이다.
레스레모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갑자기 휘파람을 부나 싶더니, 높낮이가 조금씩 뒤틀리며 노래 비슷하게변해버렸다.
그걸 보며 우린이 아는 척을 했다.


"어, 그거 정령부르는 거죠?"
"……어떻게 알지?"


놀란 얼굴로 레스레모나가 물었다.
엘프들이 자신의 정령을 부르는방식은 제각각이다.
정해진  없기에, 알려진 것도 별로 없다.
그런데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우린은 알고 있었다.

"아하하, 아니, 그게……예전에 자주 읽던 판타지 소설에서 봤거든요."

결국 소설을 봐서 찍어 맞춘 우린.
멍하니 우린을 바라보던 레스레모나는 바람의 정령을 불러냈다.
바람이 작게 부는 형체를 지닌 정령이 레스레모나의 주변을 배회했다.
일라이와 함께 말에 오른 레스레모나가 속삭였다.


"이 주변을 맡아줘."

그녀의 지시에 정령이 홀연히 사라졌다.
가만히 떠있는 것도 보기 힘든데, 아예 사라진 것 같았다.


"방금 그건 뭐지?"

아넬이 수상하다는 듯 쳐다보며 물었다.
아직 다른 종족을 많이 경험해보지 못해서 물어볼 게 많은 것 같았다.
바람의 정령이 사라진 방향으로 레스레모나가 고개를 돌렸다.

"주변을 정찰하라고 했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아서."
"습격 정도는 가능하겠지."

일라이가 말을받았다.
아넬은 근처를 둘러보더니 물었다.


"누가? 몬스터가?"
"뭐, 사람일 수도 있고."

세계가 멸망에 치닫는다 해도 인간들의 본성은 결코 죽지 않는다.
모두가 죽는다면,  자신만이라도 조금 더 살고 싶어하는 게 인간의 본능이다.
그 본능은 결국 누군가를 배신하거나, 죽이는 결과로까지 이어진다.
그렇기에 부랑자들이나 제국의 기사들의 습격을 충분히 예상할  있었다.
야신주에 거의 가까워질 무렵, 일라이가 당부하듯 말했다.


"아넬, 너는 좀 더 인간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어."
"흥, 내가 너보다 오래 살았……."
"지식이나 지혜는 오래 산다고 늘어나지 않아. 주변을 관심 있게, 오래 지켜봐야 늘어나는 법이야."

핑거 스냅을 하고는 야신주 근처에서 말을 멈추는 일라이.
그가 멈추자 일행 전부가 멈춰 섰다.
야신주의 입구를 지키는 이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생긴  인간 같으나, 기본적인 체격이 인간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무슨 용무로 왔지?"
"지나가려고. 며칠 묵으면 더 좋고."

일라이가 대표해서 대답했다.
그러자 경비병은 일라이를 노려보다가 콧방귀를 끼었다.

"흥, 부인들이 아주많군."
"그렇게 봐주니 고마워. 그럼!"


자연스럽게 일행을 이끌고 마을로 들어가는 일라이.
하지만 지나가면서 경비병을 비웃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혼자서 모든 여자들을 섭렵했다는 점에서 우월감을, 상대는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경비병은 일라이의 시선을 과하게 신경 쓰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마을에 들어온 일라이 일행은 쉴 곳을 알아봤다.
아무리 이종족들이 사는 마을이라 해도, 이종족만의 마을은 아니니까.

"길  묻지. 여기서  곳은 어디가 좋은가?"


일라이보다 앞서 레스레모나가 길을 물었다.
아무래도 인간인 일라이가 묻는 것보다, 그래도 좀 더 친숙한 엘프가 묻는 게 나았다.
정작 레스레모나는 섀도우 엘프지만 말이다.


"저기가 좋아. 마굿간까지 달려 있거든."

전신에 물기가 흐르는 노파가 대답했다.
레스레모나가 감사를 표하며 일라이와 함께 일행을 이끌었다.
확실히 이런 점에서는 엘프가 더 나았다.
인간에게 반감을 가진 상대라면,똑같은 이종족으로 대응하면 될 일이니까.
안전하게 여관까지 잡은 일라이 일행.


"후우……."

침대에 걸터앉으며 칼집을 내려놓는 일라이.
그는 길게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허락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헤헹, 이제 같이 잘 시간이 왔네?"


음란한 미소를 흘리며 아넬이 들어왔다.
일라이는 아넬을 빤히 쳐다보더니 그녀의 뒷덜미를 잡았다.


"아악, 뭐야?"
"나가서 놀아라, 아가야."


대놓고 아넬을 어린애 취급하며 문밖으로 던져버리는 일라이.
그는 한숨을 쉬며 아예 의자에 앉았다.
또 아넬이 들어올 걸 대비해서였다.
이제 좀 쉬나 싶더니 다시 문이 열렸다.

"아, 나가서 놀……."
"저기, 왕자님?"

용건이 있는지 우린이 들어왔다.
그녀는 허락도 없이 일라이의 맞은편에 앉아서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얼떨결에 너희랑 같이 다니기는 하는데. 이제 어쩔 건데?"
"야,  내 동료될 생각 없냐? 계약절차는 좀 끈적하다만."
"동료……? 너 해적왕 될 거야?"
"그건 또 뭔 소리야?"

인상을 찌푸리던 일라이는 혀를 찼다.
아무래도 우린과대화가 통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할  같았다.
하지만 우린은 끝낼 생각이 없는지 입을 열었다.

"너도 봐서 알겠지만내 능력은 마법소녀. 이참에 변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지."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우린을 둘러싼 오라가 사라져 있었다.
일라이가 우린을 가리켰다.

"네 몸 주변에 오라가 돌던데. 그건 뭐지?"
"내가 마법소녀 모드라는 증거 중 하나지. 자, 잘 보라고."
"잠깐,  하려는 거야?"
"마법소녀 변신."
"마법숙녀겠지! 그만 둬!"
"마법소녀라고! 심우린, 마법소녀 모오드으!"

갑자기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는 우린.
못 볼 본다는 듯 일라이는 이를 악물며 이 광경을 지켜봤다.
진한 분홍색 빛이 우린을 감싸더니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이미 이것만 하더라도 엄청난 규모의 시야마비였다.
빛이 조금씩 잦아들 때, 그곳에는 마법소녀로 변신한 우린이 있었다.

"자, 됐지? 이 상태에서 내가  수 있는 마법은 다양해!"
"……왜 네가 난데없이  세계로 온 건지 알겠다."
"왜?"

기대하듯 묻는 우린.
일라이는 그 기대를 산산조각냈다.

"네가 존나이상한 년이라서."
"마법 맞을래?"
"됐고, 네가 강하다는 건 알겠어. 아니, 이미 알고 있다고."
"살고 싶어서 헛소리하는 거지?"
"네 혼자 몬스터들을 쫓았잖아? 이미 그것만 해도 엄청난 거라고. 지금까지 본 마법사들 중에서 너처럼 자유자재로 마법을 다룬 자는 본 적도 없다고."


일라이는 어디까지나 진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우린이 혼자서 몬스터들을 쫓을 때 보면 최소한 3~4개의 마법을 동시다발적으로 사용했다.
이건 천재라 불리는 마법사들이나 가능한 정도였다.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일라이가 말을 이었다.


"숙소까지 잡았으니 하는 말인데. 너 나랑 계약하자."
"계, 계약? 뭔가 불안한데."


마법소녀로 변하며 자부심과 자괴감을 동시에 느끼는 우린.
그런 그녀가 진심으로 떨기 시작했다.

"이상한 거 아니니 안심해. 우선 너랑 섹스를해야 해."
"…미친놈."
"그게 계약 방법인데 어쩌겠어? 아니면 당장 여기를 나가서 여기저기 떠돌던가."
"뭣?"
"아무리 너라도 쉽지 않을 걸? 마법숙녀라 해도 결국 인간. 먹고 마시지 않으면 힘이 다하지. 그리고 넌 지금 무슨 상황이 일어나는지 단편적으로밖에 모르잖아?"

현실적으로 파고 드는 일라이 때문에 우린은 더욱 떨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난데없이 섹스를 하자니.
정말 이상한 논리였지만 그녀는 수긍하기로 했다.
적어도 일라이를 떠나면 할 게 없는  분명하다.
세계가 이렇게  원인이나 앞으로 뭘 해야 할지도 물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 계약이란 건?"
"네가 나랑 섹스를 하면 동의를 해야 해. 내 기사단에 들어올 여자가 되든가, 아님 그냥 섹파로 끝나거나."
"너같은 놈이랑 누가 섹파를 해?"
"말이 그렇다고. 그렇게 해서 계약을 하면 너는  여자가 되는 거지. 더불어 나는 네 스텟을   있고."

설명을 마치며 어깨를 으쓱이는 일라이.
황당하다는 듯 일라이를 바라보던 우린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이런  수 없는 세계에 떨어진 이유는 모른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미지수.
그렇다면차라리 외모도 따라주고, 실력도 있는 일라이에게 의탁하는 게 나았다.


"그냥 동료로 데리고 다니기엔 넌 아까운 여자야."
"거짓말, 공주님이 그러더라. 너 변태라고."
"그  말은 무시해. 미친년이니까. 그리고 내가 하는말은 진심이야. 너는 예쁘고, 남부럽지 않을 실력을 지녔어."

있는 그대로 자신을 인정해주는 일라이.
그의 모습에 우린은 조금 마음이 동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아무리 잘 하더라도 인정받기는 힘들다.
뒷배경이 좋거나, 인맥이 좋지 않고서는 인정이란 건 그저 겉치레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 점에서 우연히 얻은 능력이기는 하나, 이것을 일라이에게 인정받은 건 우린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결정하는 건 네 자유야."

그렇게  마디를 던지며 일라이는 침대에 누웠다.
느긋하게 잠이라도 청하려는 것 같았다.
태평한 일라이를 보며 우린은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에는 묘하게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할게…계약."
"흐음, 빨라서 좋군."


흡족하게 웃으며 우린을 올려다보는 일라이.
그와 눈이 마주친 우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마법소녀가 왕자의 거래를 받아들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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