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뜻밖의 출연? 이세계 마법소녀!
급히 영광의 숲에서 빠져나온 일라이 일행이 뒤를 돌아봤다.
이미 숲에서 1km 가까이 빠져나온 상황.
영광의 숲이었던 곳은 깔끔하게 가라앉고 말았다.
"뭐야? 숲이 없어졌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놀라는 아넬의 말에 일라이가 첨언했다.
그는 불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루밀다에 대해서 아쉬움이 앞섰다.
차라리 계약만이라도 해뒀다면.
그랬다면 덜 아쉬웠을 텐데.
'애매한 상태라서 어떤 상태인지 알 수도 없어.;
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루밀다는 죽지 않았다고.
적어도 그녀는 살아 있다고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평생을 살면서 자신의 직감을 의심해본 적이 없는 일라이.
그는 한숨을 쉬며 속력을 더했다.
"어, 야! 같이 가!"
갑자기 일라이가 속력을 올리자 레피나가급히 달렸다.
그 뒤를 리비카가 말없이 뒤따랐다.
숲을 빠져나와 잠깐동안 이어지는 황야지대.
이곳을 지나니 지역간 경계선이라 불리는 경계산맥이 등장했다.
산맥이라고 하기에는 완만한 등산로가 많아 사실상 경계선으로만 쓰이는 곳이었다.
조금씩 속력을 줄이며 일라이가 물었다.
"세상이 이 모양인데 여기 길은 너무 깔끔하잖아?"
"히힛, 혹시 살아 있는 생명체만 다 사라지는 거 아니야?"
장난스러운얼굴로 아넬이 물었다.
그녀는 일라이 어깨에 걸터앉은 채로 느긋하게 바람을 쐬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영광의 숲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넬은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너는 어째 해맑다?"
일라이의 질문에 아넬이 피식 웃었다.
"그야 나는 너를 유혹해야 하니까."
"글쎄, 나이나 좀 먹고 오라고. 그 빈약한 몸으로 뭔 유혹이야?"
"지금도 간신히 버티는 거 다 알아. 후후, 네가 나한테 유혹당했다는 거 인정하게 해주지."
"……몽마도 싸이코패스가 존재하나 보군. 별 개소리 다 듣네."
속으로 한숨을 쉬며 일라이는 산맥 근처를 살펴봤다.
원래이런 곳에 몬스터들이 숨어 있거나, 부랑자들이 함정을 파놓고는 한다.
그런데 시기가 시기라서 그런 낌새는 없어 보였다.
그나마 전국구적인 멸망이라서 한 편으로는 다행이었다.
함정 같은 걸 걱정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방심해서는 안 돼.'
하나의 그룹을 이끄는 입장에서 일라이는 침착해지려 애썼다.
그때 등 뒤에서 푹신한 느낌이 들었다.
레스레모나가 숨을 죽이고 있다가 물었다.
"일라이…이제 어쩔 거지?"
"영광의 숲은 물론이고 근처 지형이 개판이 되었어. 여기 넘어서 나오는 '야신주' 마을로 갈 거야."
"야신산이 근처에 있는 그곳 말인가?"
"맞아."
야신산이라는 말에 일라이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웃었다.
그곳이라면 물론 가볼 생각이 있기는 했다.
다만 지금 그곳이 무사할 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야신주 마을은 흔히 인간이 아닌 이종족들만의 마을이다.
대개 이런 마을을 '이타영지'라고도 말한다.
영주가 있어서 영지가 아니라, 이종족들이 각각 그곳의영주인 셈인지라 붙인 차별적인 말이었다.
"지진은 멎었는데. 언제 또 이렇게 될 지 두려워요."
리비카가 불안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건 그녀 말고도 다른 사람들 역시 공감하는 바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진도 높은 지진은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 때 벌어져도 큰일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기사단의 일원을 만들어야 할 때, 일라이는 스스로를 재촉하지 않으려 했다.
삐용삐용- 퓨우우-!
한참 산맥에 올라서 내려가려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는 한층 가까워지더니 다른 이질적인 소리들까지 섞였다.
크르르- 카아악- 크학-!
"몬스터들 소리다."
일라이는 그리메를 뽑아들며 말에서 내렸다.
그러자 레스레모나 역시구식 머스켓을 꺼내들며 탄환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절도있는 자세로 탄환을 장전하고 있으니 리비카가 선망의 시선을 던졌다.
"머, 멋져……!"
"흥, 뭐가 멋지다고!"
레피나가 불만스러운 듯 팔짱을 꼈다.
그때 아넬이 말 위에 앉아서 일라이에게 물었다.
"야생동물 같은 냄새가 나. 몬스터들이 맞나 봐. 어떻게 하려고?"
"죽여야지."
몬스터들을 제때 처리하지 않으면 따라올지도 모른다.
그런 혹을 달고 다녀서 좋을 건 없다.
해치울 수 있을 때 해치워야했다.
일라이의 대답에 아넬이 히죽 웃으며 말 위에 섰다.
"좋아, 이번에는 나도 도와주지."
"당신은 역시 몽마로군."
경계의 시선을 보내는 레스레모나.
그러나 아넬은 평온했다.
"그럴 거 없어. 친구잖아?"
"나는 당신을 친구로 여긴 적은 없는데?"
"헤휴, 왜 그렇게 쌀쌀 맞아? 일라이는 나한테 유혹당한 수컷이고,그 수컷의 친구가너라면 나랑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거잖아?"
"야, 잠깐. 내가 뭘 유혹당했냐고?"
정면을 경계하다 말고 일라이가 뒤돌며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넬에게 유혹당했다는 건 근거없는 낭설이었다.
미쳤다고 로리 몸에 유혹당하겠는가?
물론 같은 로리였던 루밀다는 잘 따먹었지만 말이다.
"어, 앞!"
레피나가 급히 정면을 가리켰다.
마침내 가로수길로 한 무리의 짐승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전부 합해서 8마리나 되는 늑대들이었다.
크기가 송아지 정도로 컸고, 그들은 저마다 입에 거품을 물며 헐레벌떡 달려왔다.
자세히 보니 어딘가 이상했다.
"잠깐, 저것들……."
두 눈을가늘게 뜨던 일라이가 그리메를 늘어뜨렸다.
지금 몬스터들은 달려드는 게 아니라,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것 같았다.
겁없이 누구라도 공격하는 몬스터들이 도망이라니?
일라이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망이라니?"
"에이…그건 좀."
"야, 섹스 못했다고 돌았냐?"
"흠……."
네 여자가 한꺼번에 묻거나 도발하자 일라이는 심경이 복잡했다.
레스레모나는 적어도 진지한데, 쉽게 말을 못 받아들이는 아넬이나 우선 디스하고 보는 레피나가 문제였다.
그에 반해 리비카는 혼자서 고민하는 것 같았다.
"잠깐만요, 저것들 뒤에!"
한참 달려오던 몬스터들 뒤에 빛나는 무언가가 보였다.
척 보기에는 얇고 치장이 화려한 옷을 입은 여자 같았다.
그 여자가 흑갈색 머리를 양갈래 만두처럼 땋은 채로 허공을 날고 있었다.
그리고 분홍빛 오라를 주변에 펑펑 뿌리며 몬스터들을 향해 마법을 날리기 시작했다.
꼭대기에 하트모양이 달린 이상한 봉을 휘저으면서 말이다.
"야앗, 정의와 사랑의 이름으로 너희를 고깃덩어리로 만들어주마!"
아무리 봐도 마법소녀처럼 보였다.
일라이 역시 마법소녀가 뭔지는 과장된 컨셉의 소설을 봐서 알고 있었다.
설마 그런 미친 짓을 하는 사람이실제로 있다니.
"야, 아넬. 네 친구 같은데?"
"뭔 소리야? 저거 인간인데."
"아니, 정신적인 면에서 말이지."
"……나빴어."
일라이에게 한 방 먹은 아넬이 김 샌다는 듯 주저앉았다.
그때 마법소녀로 보이는 여자가 화려하게 허공을 선회하며 몬스터들을 마법으로 박멸하는 게 보였다.
제법 노출도가 높은 복장인지라, 방향을 바꿀 때마다 그녀의 꿀이 흐르는 듯한 하체가 보였다.
전형적인 슬렌더 체형에 가슴은 B컵.
어쨌든 가슴이 어느 정도 있는 수준이었으므로 일라이가 바로 관심을 가졌다.
"호오…저거 대단한데?"
"일라이, 혹시 저 여자의 몸매를 보고 평가한 건 아니겠지?"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오는 레스레모나의 질문.
일라이가 말없이 당황하자 레스레모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머스켓을 들며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가장 가까이에 다가온 몬스터의 머리를 한 방에 날렸다.
타타탕- 슉팍-!
순식간에 헤드샷을 갈기자 마법소녀 역시 일라이 일행을 발견했다.
이미 몬스터들은 멸절되고 있는 상황.
일라이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며 여자에게 물었다.
"저기…누구지? 혹시 이 멸망을 불러온 장본인인가?"
"으앗, 사, 사람이다아!"
"…그럼 사람이지 뭐겠어?"
여자가 너무 격하게 놀라자 일라이는 그리메를 칼집으로 되돌렸다.
마치 사람을 처음 본 것처럼 너무 놀라는 것이다.
마법을 부리며 몬스터들은 잘도 때려잡으면서 사람 보고 놀라다니.
별난 여자가생각하며 일라이가 한 발자국 다가섰다.
그러자허공에 떠있던 여자가 물러나며 마른 침을 삼켰다.
그녀의 짙은 분홍색 눈이 떨리는 게 보였다.
"어이, 사람 처음 봐?"
"말도 안 돼. 이런 절망적인 세계에서 사람이 살았다니?"
"응, 아직 살거든. 그리고 아직 안 망했어. 망해가는 거지."
"그리고 말까지 통하다니!"
슬슬 이 여자를 아넬에게 맡겨야 할까 고민이 되는 일라이.
그가 턱을괼 때 여자가 호기심에 찬 눈으로 지면에 내려섰다.
가까이에서 보니 붉은색의 세라복을 입고 있는 게 보였다.
그렇다고 그녀가 해군이냐 하면 그건 더더욱 아니었다.
"너 대체 누군데?"
완고한 얼굴로 묻는 일라이.
여자는 당황하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나,나?"
"응."
"나…그, 마법소녀!"
"……다시 한 번 말해줄래?"
"마, 마법소녀! 그, 봐, 봐. 마법소녀잖아?"
두 팔을 쫙 펼치며 해맑게 웃는 여자.
일라이는 이게 혹시 꿈일까 싶어 혀를 깨물어봤다.
어김없이 아팠다.
즉 이건 현실이라는 뜻이었다.
"미쳤어?"
"아니, 진짜 마법소녀라니까? 솔직히 마법을 쓰는 소녀라면 마법소녀밖에 없잖아?"
살면서 이런 컨셉은 처음이었기에 일라이는 혼란을 느꼈다.
자칭 마법소녀라는이 여자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 지 자신이 서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법소녀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몸매의 굴곡이 그대로 보이는 세라복은 확실히 마법소녀가 아니라면 입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마법사로 보이냐 하면그건 아니었다.
'마법사들도 기본적으로 몸은 단련하는데. 이 여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
그렇다고 문답무용으로 좆을 꽂을 수도 없는 일이다.
스테이터스를 알아내면 보기는 쉽겠지만, 지금은 여건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 그러는 너는 누군데?"
"왕자."
일라이의 단답에 여자가 할 말을 잃은 표정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여자 입장에서 일라이가 이상해 보이긴 할 것이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고서 자신이 왕자라니.
여자는 기적적으로 웃음을참았다.
"푸읍, 어, 푸흐흣, 그, 그래? 크흐……."
"지금 비웃냐? 나라가 멸망하긴 했지만 최근까지는 왕자였어."
"흐흐흣, 그렇구나. 아, 갑자기 동료를 만난 것 같네."
"그런 모욕적인 언사는 좋지 않아. 미친사람은 저어기 몽마 하나로 족해."
말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넬을 가리키는 일라이.
그 손짓에 아넬이 길길이 날뛰었다.
"내, 내가 뭘!"
"몽마라면 서큐버스?"
"응."
일라이가 바로 대답하자 여자는 놀랐다.
그녀는 몽마라기에는 너무도 빈약한 아넬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그렇지? 지가 나를 유혹했다고 생각하는 미친 년이야."
"어머, 불쌍해라."
"너도 불쌍하거든?"
"내가 뭘? 나는 진짜 마법소녀라고?"
"애초에 너 나이가 몇이야?"
한숨을 쉬며 일라이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여자는 난데없이 당황을 하더니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제대로 대답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어, 그, 저……."
"…몇살이냐고. 설마 30?"
일라이가 마음대로 찍어대자 여자는 두 눈을 날카롭게 떴다.
여자에게 있어 나이와 몸무게는 예민한 문제다.
그걸 건드렸으니 일라이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 와중에도 여자는 영리하게 대답했다.
"19살이다!"
"20살이구만? 여자들은 항상 자기 나이에서 몇 살 빼더라."
"아, 아닌데……."
"그나마 너는 양심적으로1살만 뺐어. 맞지?"
"아니, 진짜 아니야."
"근데 얼굴은 왜 이렇게 빨개?"
"헉!"
지적하는 일라이를 보며 여자는 자기 얼굴을 감쌌다.
그때 일라이가 히죽 웃었다.
"뻥인데. 진짜 20살이었구만?"
"윽, 비열해!"
"비열이고 뭐고 소녀도 아닌 주제에 마법소녀라고?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이거?"
"아니라고! 이건 그냥 코스프레일 뿐이라고!"
"뭔 소리인지……."
여자한테 대놓고 한숨을 쉬며 일라이가 말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코스프레라고는 하지만 그 힘은 진짜였다.
그렇다면 계약을 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단지 저 여자의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면 곤란했다.
"으으, 거기 자칭 왕자!"
여자가 거칠게 부르자 일라이가 멈춰 섰다.
"내 이름은 일라이야. 자칭 왕자가 아니라."
"하, 내 이름은 '심우린'이거든? 명문대인 '소려여대'를 다니고 있는 여대생이다!"
"여대생이고 뭐고 그런 거 모르겠고. 웬만하면 컨셉 좀 바꿔라, 자칭 마법소녀씨."
받은 말 그대로 돌려주는 일라이.
그렇게 시크하게 말을 향해 걸어가는 일라이를 보며 우린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뛰어오르더니 일라이에게 드롭킥을 날렸다.
온전한 두 다리를 모아 그대로 힘을 싣자 제법 묵직한 한 방으로 변했다.
드롭킥에 당한 일라이는 쓰러지다가 우린을 노려봤다.
아무래도 쉽게 볼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