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영광의 숲, 몰락하다
풀이 수북한 곳에서 누워 있는 일라이와 레스레모나.
일라이는 우선 레스레모나에 대해 알아봤다.
[레스레모나의 스테이터스를 확인합니다.]
[이름 - 레스레모나]
[근력: C+ 체력: A 반사신경: A 지능: B 정신력: B 욕정: A]
[애정결핍(A+), 저격수(A), 정령술(A+), 열등감(C)]
전체적으로 우수한 스테이터스였다.
자신만의 기사단에 들이기에 그만인 수준이었다.
게다가 욕정이 무려 A랭크!
이 정도면 시도 때도 없이 육봉을 들이밀어도 받아주는 정도였다.
엄청난 쾌거에 일라이는 웃어버렸다.
"그나저나 이 숲을 떠나도 돼?"
"어차피 미련없어. 네이처 가드로 있지만, 그렇게 내 실력만으로 올라서도인정해주는 이들은 적었어."
"그렇겠지. 인간이나 엘프나, 결국 혈통가지고 물어뜯는 건 똑같거든."
일라이의 대답에 레스레모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나 다 알듯, 일라이는 왕족이었다.
왕족이라면 혈통에 대한 우월함이 있고, 그로 인해 이득을 얻었을지언정 손해를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일라이는 합리적인 말을 내뱉은 것이다.
"뭘 놀라? 왕족인 나라도 알 건 알아. 오히려 왕족이니 오만하게 살면서 눈 닫고 귀 닫으면 그 나라 오래 못 간다고."
의외로 현명한 말을 하는 일라이.
레스레모나는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에 기뻐하며 웃었다.
"역시 네게 관심을 가진건 잘한 일이라 생각해."
"그럼, 그럼. 내가 누군데? 현재 용사이며, 장차 세상을 구할 왕자인데."
"지금은 망국의 왕자겠지만."
"망국은 빼. 언젠가 다시 일으킬 거야. 너, 그리고 너와 같은 이들과 함께."
탐스런 그녀의 엉덩이를 쓸며 일라이는 일어났다.
슬슬 숙소로 가야했다.
하루에 격렬한 섹스를 2번이나해서 그런지 상당히 피곤했다.
일라이가 옷을 입자 레스레모나 역시 틀어진 옷을 제대로 입으며 말했다.
"장로님께 허락을 받을 거다."
"보내달라고?"
"그래, 아마 허락해주시겠지. 오직 그분만이 유일하게 내 편이셨어."
장로에 대해 말하는 레스레모나의 표정은 거의 사랑하는 아버지에 대해 회상하는 것 같았다.
대장로가 얼마나 선한 인물인지 알기에 일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라면 허락할 것이다.
굳이 허락하지 않더라도 레스레모나가 자기 의지를 밀어붙일지도 모른다.
온갖 기대감과함께 일라이는 레스레모나와 헤어졌다.
아직도 좆에서 그녀의 보지를 찔러대던 감촉이 남아 있었다.
"역시 여자는 엘프가 진리인가……."
풍만한 레스레모나의 가슴을 떠올리며 손을 꼼지락대는 일라이.
그는 숙소로 돌아와서 바로 누웠다.
내일 역시 바쁠 것이다.
어떻게든 도움이 되는정보를 얻고 싶었다.
그런 정보가 지겹게나오길 바라며 일라이는 눈을 감았다.
***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한 일라이는 바로 서재로 향했다.
오늘도 멋들어지게 엘프식 복장을 개량해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분신이나 다름없는 그리메가 잠들어 있는 칼집까지.
모든 것이 그를 빛나게 만들었다.
"시작해볼까!"
일라이의외침에 주변에 있던 엘프들이 일제히 돌아봤다.
그럼에도 일라이는 그대로 고서들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한가득 고서들을 가지고 와서 탐독을 하는 일라이.
"흐음……."
탐독한 지 2시간이 지날 때, 일라이는 마침내 도움이 되는 정보를 입수했다.
최초의 멸망 예언을 했던 사람이 '아리스테스'라는 기묘한 이름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자의 성별이 뭔지, 성격은 어땠는지, 선지자이거나 예언가였는지 알려진 건 매우 적었다.
하지만 에레스트 대륙의 역사상, 아리스테스보다 더 전에 존재한 예언자는 없었다.
어쨌든 최초의 예언을 한 것만으로 이름이 올라 있었다.
"역시 도움이 된다니까. 다음은……."
바로 다음 고서를 뒤적거리는 일라이.
이번에는 좀 더 근원적인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세상을 파멸시킬 존재에 대해서였다.
"뭐야…'암흑의 존재'?"
암흑의 존재가 세상에 강림해서 모든 것을 무로돌린다는 것.
그게 마왕인지, 불멸자인지, 혹은 초월자일지 알 길은 없었다.
하지만 타오르는 거대한 검은 불길과 같은 형상을 한 삽화가 눈에 띠었다.
파멸을 불러올 암흑의 존재가 얼마나 미지의 존재이고, 위험한 존재인지 단숨에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이번 고서는 좀 더 정독을 한 뒤에 일라이가 고개를 저었다.
"이것 외엔 없어. 하지만 모든 걸 무로 돌리는 암흑의 존재라니. 이름부터가 음흉하잖아?"
한숨을 쉬며 다음 고서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암흑의 존재에 대한 기원에 대해 서술되어 있었다.
태초의 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 암흑의 존재는 본래 신이 될 존재였다.
"이거 흥미로운데?"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지만, 이번 재앙을 불러온 존재가 암흑의 존재라면 필히 익혀야 할 주제였다.
일라이는 고서에집중했다.
고서에서는 암흑의 존재가 신에 맞먹는 존재이나,스스로 타락해서 천상계가 아닌 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
그 지옥을 홀로 정복하며 수많은 몬스터와 마수를 지배했고, 그것으로 세상을 노린다는 전형적인 파괴자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전형적이라고 하기에는 현재 상황과 맞아 떨어져서 소름돋기도 했다.
"이거 진짜 엄청나겠는데?"
다음 고서는 특정 종교단체인'가리는 자'에 대한 것이었다.
이것에 특히 눈이 갔다.
"가리는 자? 분명 자주 들어본이름인데."
가리는 자.
에레스트 대륙 전역에 걸친 엄청난 규모의 종교단체였다.
사이비라 매도당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고요하게 참선하는 것을 기본 미덕으로 아는 단체였다.
이곳은 종단에 관련된 자들이 전부 베일에 싸여 있었다.
세계 역사에 관여되었다고도 하고, 황족과 왕족들과 연을맺었다는 말도 있었다.
어떤 것이 사실이든, 이들은 이름처럼 은밀한 자들이었다.
"음…어쩌면 둘이 매칭을 할 수도 있겠는데?"
만약 암흑의 존재와 가리는 자가 한통속이라면?
흔히 사이비 교단은 거짓 신을 불러내고는 한다.
소설에서조차 흔하게 쓰이는 이야기지만, 현실로 대입한다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잠시 머리를 쓸어넘기며 일라이는 고민했다.
'아리스테스…그리고 암흑의 존재와 가리는 자 교단. 이 셋이 아무 관계도 없을까? 정말?'
다른 건 몰라도 가리는 자는 매우 수상했다.
하필 자신이 아는 이름이라서 더더욱 신경쓰였다.
역사의 뒤에서 암약하던 음침한 사이비 집단이 하필 언급되다니.
"모르겠다."
가리는 자의 연혁을 살펴보며 일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다음 고서가 시급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고서를 가지러 가려던 일라이는 잠시 흔들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딛고 선 대지 역시 엄청난 진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지진에 엘프들이 당황했다.
"지진인가?"
"정령들이 화라도 난 건가?"
"얼른 장로님께!"
아무리 엘프라 하더라도 당황할 때는 당황하나 보다.
저런 인간적인 모습에 일라이가 감동할 무렵, 갑자기 굳건하게 버티고 있던 서고 전부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서재는 순식간에 개판이 되고 말았다.
"으아아아아악!"
"제길……."
일라이는 겨우 굴러가던 의자를 잡아 몸의 균형을 맞췄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보았다.
밖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종말을 맞이한 것처럼엘프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얼른 준비하라고!"
"이러다 몬스터들이라도 온다면?"
"지금 여기 인간들도 있지? 수상하다고!"
여기저기서 비명이 빗발쳤다.
비명에 가까운 노성 역시 빗발쳤다.
드문드문 운석이 떨어지는 과격한 소리까지 들렸다.
그럼에도 일라이는 침착했다.
우선 숙소로 가서 말을 타야 한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올 것이 온 것 같았다.
"야, 일라이!"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말에 탄 이들이 달려왔다.
레피나가 2마리의 고삐를 쥔 채로 외쳤다.
"빨리 와! 타라고!"
"고마워!"
일라이가 급히 말 위에 올랐다.
그러자 리비카가 다급하게 외쳤다.
"지진이 너무 오래 가요! 아마도 이곳도……."
"헤엥, 너흰 제법 침착한데?"
지켜보고 있던 아넬이 입을 비죽였다.
하지만 농담을 나눌 때가 아니었다.
일라이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일행을 이끌기 시작했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레스레모나를 찾고 싶었다.
더불어 루밀다도 데려가고싶었다.
"우선 레스를 찾자!"
"레스? 그 까만 엘프?"
단숨에 얼굴을 구기는 레피나.
일라이는 더 설명하려다가 위를 올려다봤다.
나무 위에서 간편한 복장을 한 레스레모나가 바로 일라이의 뒤로 내려섰다.
순식간에 말을 타자 일라이는 반사적으로 말배를 걷어찼다.
히히히힝-!
우렁차게 외치며 말이 정면으로 달려갔다.
일라이가 레스에게 물었다.
"괜찮아?"
"응, 허락 받았어."
"앞으로 잘 부탁해! 이봐,다들 여기 떠나기 전에가볼 데……."
그때 영광의 숲에 있던 모든 건물들이 일제히 무너져 내렸다.
엘프들이 집을 짓는 방식은 나무를 이용하거나, 그 나무 뿌리 위에 짓고는 한다.
그러나 엄청난 진도의 지진이 오래 지속되면 나무들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다.
집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무하게 집들이 무너지며 처절한 비명이 사방에서 울려퍼졌다.
"야, 뭐해? 얼른 떠나자고!"
숲을 떠나다 말고 망설이는 일라이를 보며 레피나가 외쳤다.
하지만 일라이는 루밀다를 포기하기 싫었다.
"우선 이쪽으로!"
급히 루밀다의 집으로 말을 몰았다.
다른 엘프가 죽더라도 그녀는 안 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가 얼마나 현재에 후회하고, 어떨지 모를 미래로 나아가고 싶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된 이상, 그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 어디로 가는 거야?"
"왕자님, 여기는 전혀 다른 길입니다!"
레피나와 리비카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얽혀 들어왔다.
그럼에도 일라이는 묵묵히 고삐를 쥐었다.
뒤에서 레스레모나가 껴안는 게 느껴졌지만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제발, 제발!"
일라이가 이를 갈며 루밀다의 집이 가까워지는 것을 봤다.
그러나 그곳에는 루밀다의 집이 아니라, 원래부터 있던 나무의 거대한 잔해들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땅속으로 꺼진 것처럼 루밀다의 집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것이다.
지진이 갈수록심해지자 일라이는 이를 악물며 외쳤다.
"제길, 우선 다음 행선지로 출발! 전력을 다해 달린다!"
"예에, 얼른 달려엇!"
아넬이 일라이의 어깨에 앉은 채로 주먹을 들었다.
전력을 다해 말을 다루며 앞으로 내달리는 일라이.
그는 루밀다의 집이 있던 곳을 돌아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그녀는 어떻게 된 것일까?
죽은 것일까?
아니면 눈치가 빨라서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을까?
모를 일이었다.
"부디 다시 만나……."
"음?"
혼잣말하는 일라이에게 레스레모나가 물었다.
일라이는 제대로 대답조차 않고 묵묵히 정면을 쳐다봤다.
주변 광경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음 역시 흔들리는 것 같았다.
부디 루밀다가 살아 있기를 바라며 일라이는 고삐를 강하게 거머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