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도전이라면 화끈하게 받아준다!
영광의 숲에서 보내는 첫 아침.
일라이 일행은 식당 한 구석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책을 보면서 배운 것과 달리, 엘프들은 인간처럼 육식을 하기도 했다.
앤션트 엘프가 아니고서는, 굳이 육식을 금지하는 게 본인들에게 좋지 않은 걸 깨달은 것이다.
"그래도 엘프들이 사는 곳에서 고기라니…익숙치가 않네."
양념이 잘 배인 닭갈비를 뜯으며 일라이가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와서 느낀 건 살아왔던 곳에서 배운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 그게 진리인양 익혀 왔었는데, 이제 와서 실제로 체험해보니 경우가 달랐다.
엘프들은 오만할지언정, 적어도 채식에 미친 종족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애초에 오래 버티지도 못했으리라.
그리고 수렵꾼이라 할 수 있는 네이쳐 가드들이 제법 보였다.
"살벌하구만. 제국의 엘리트 가드들 같네."
레피나가 방울토마토 하나를 베어먹으며 말했다.
제국에서는 기사들보다 더 상위의 존재인 엘리트 가드라는 존재가 있었다.
먼 옛날에 소드마스터라 불린 자들이 있다면, 최근까지 제국에는 엘리트 가드들이 있던 것이다.
물론 멸망을 맞이하며 이것도 옛 이야기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먼저 일어난다."
"잠깐! 헤헹, 어딜 가려고?"
아넬이 익살스럽게 웃으며 일라이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를 똑바로 보는 자세로 바꾸더니 혀를 낼름거렸다.
"이제부터 너를 유혹할 거야."
"어린애 몸 보면서 흥분하면…내가 내 좆을 자르겠다."
"무서운 말 하지 말라구. 그렇게라도 해서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거지?"
"평정심은 지랄……."
인상을 찌푸리며 일라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때 아넬이 가랑이를 벌리더니 곧장 두 발을 일라이의 어깨에 얹었다.
그리고 히죽 웃으며 가랑이 사이에 일라이의 목을 조이려 했다.
속옷조차 입지 않은 아넬의 보지 둔덕이 보였다.
털은 보이지 않았고, 굳게 다문 조갯살만이 시야에 아른거렸다.
음란한 암컷의 냄새를 풍기던 보지를 서서히 벌리며 아넬이 물었다.
"한 번 먹어볼래? 목 마르면 물이라도 줄 수 있는데."
촉촉하면서도 빠져들 듯한 목소리.
몽마는 몽마인지 제법 목소리에 매료를 담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일라이는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아넬과 눈을 마주쳤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레피나와 리비카는 마른 침을 삼켰다.
'설마 넘어가는 거야?'
'안 돼,왕자님……!'
두 여자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일라이는 바로 일어났다.
그것도 아넬을 옆으로 치우며!
"꺄악!"
"쇼를 해라. 네가 날 유혹하기에는 100년이나 이르다고. 좀 더 빵빵해지면 와."
"이 씨…두고 봐!"
유혹에 실패해서 눈물짓는 아넬.
그런 아넬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리비카.
그리고 평온하게 식사를 마치는 레피나까지.
혼자서 먼저 일어난 일라이는 먼저 서재로 향했다.
멸망에 대한 정보를 한 시라도 빨리 얻고 싶었다.
"찾을 수 있을까?"
한숨을 쉬던 그는 마지못해 발걸음을 떼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 그리메는 항상 휴대한 체였다.
"잠깐, 멈춰!"
네이쳐 가드로 보이는 남성 엘프 3명이 일라이를 막아섰다.
진지한 얼굴로 엘프들을 바라보던 일라이가 물었다.
"무슨 용무지?"
"풉, 무슨 용무? 어제 잘도 지껄이던데. 어디 진짜 실력이 어떤지 봐도 될까?"
3명 중에서 가장 자신이 있는지 긴 머리를 하나로 땋은 남성 엘프가 나섰다.
훤칠한 키에 날렵해 보이는 체구.
대충 그가 얼마나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지 예상이 갔다.
게다가 이곳은 엘프들이 사는 숲.
아무리 실력자인 일라이라 하더라도 승리를 장담하긴 어려웠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군.'
차라리 잘됐다고 여겼다.
여기서 확실하게 실력을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레스레모나를 생각해서 먼저 싸워보는 셈이라 쳐도 좋다.
물론 이렇게 되면 자신이 어떻게 싸우는지 레스레모나에게 노출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정도는 감안해서라도 좋은 기회였다.
"좋아. 뭐, 대련같은 거라도 할까?"
"흥, 따라 와라. 개망신 당하게 해주지."
"이름이라도 알려주시지?"
"'루세페'다."
루세페는 일라이를 흘겨보며 어디론가 향했다.
아마도 대련장 같은 곳이리라.
침착하게 루세페를 따라가며 일라이는 조금씩 몸을 풀었다.
상체 근육을 조금씩 움직이다가, 걸어가면서 발목과 종아리 근육을 풀기도 했다.
"여기라면 모두가 볼 수 있겠지."
서재와 멀리 있지 않은 거대한 광장이 보였다.
숲에 있는 자연적인 광장이 더욱 맑고 아름답게 보였다.
햇빛을 받아 빛나는 대리석바닥이 묘한 신비로움마저 자아냈다.
"좋아, 해보자고."
엘프들이 몇 명 쉬고 있거나, 근처에서 마법 연습을 하는 게 보였다.
그러다 일라이와 루세페가 나타나자 자연스레 시선을 모았다.
모르긴 몰라도 기본 무장을 한 자들이 여기에 온 것이다.
특히 한쪽은 인간이기에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 직감한 것 같았다.
스르릉-!
일부러 힘있게 그리메를 빼들며 일라이는 목을 풀었다.
루세페가 오른손에 브로드 소드, 왼손에 메일 브레이커를 쥐는 걸 보며 일라이는 생각했다.
'이도류? 자세를 보면 정족 이도다.그에 비해서 어제 레스레모나는 단검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등에 총을 메고 있었어.'
생각을 마친 일라이는 그리메를 두 손으로 쥐었다.
그때 루세페가 쏜살 같이 달려들며 기합을 내질렀다.
"하아, 핫!"
[오블론 제식 - 나팔잎]
휘릭- 태탱-!
전력을 다해 브로드 소드를 휘두르며 한 바퀴 돌더니 연이어 메일 브레이커를휘두르는 루세페.
이도류 답게 적극적인 공격행보였다.
일라이는 그리메를 들어 막아내더니 뒤로 밀려났다.
힘에서 밀린 게 아니라 기술로 밀린 것이었다.
'원심력을 이용해서 묘하게 같은 힘을 두 번 맞붙게 만들었어. 머리가 좋은데?'
제법 영리하게 싸우는 루세페를 보며 일라이는 미소지었다.
적어도 엘프들이 허약한 종족은 아니라는 의미니까.
루세페가 다시 자세를 잡으려 할 때, 이번에는 일라이가 공격에 나섰다.
지그재그로 빠르게 움직이던 일라이가 가볍게 검을 내질렀다.
미리 간파하며 루세페는 일라이의 측면으로 빠졌다.
그리고 바람을 가르며 쇄도했다.
그 속도는 어제 본 레스레모나를 방불케 했다.
'하지만 느려.'
숨을 짧게 내쉬며 브로드 소드를 내지르는 루세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인간인 일라이의 자존심을 짓밟고 싶었다.
이곳은 영광의 숲.
엘프들만의 성지니까.
"햐아핫!"
[오블론 제식 - 식인꽃]
브로드 소드를 높이 들어 그대로 내리찍는 루세페.
그리메로 막을까 고민하던 일라이는 급히 옆으로 비켜났다.
그러자 브로드 소드에 이어 메일 브레이커를 덧대 내리 누르려던 루세페는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났다.
'막으려고 했다면 단숨에 무너졌다. 힘에서 밀리지는 않지만 분명 기술적인 수를 썼겠지.'
한 시라도 방심해서 좋을 건 없다.
루세페는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었고, 아무리 대련이라 해도 결국 서로에게 큰 상처가 날 수 있었다.
그걸 알기에 일라이는 비릿하게 웃었다.
이제 끝내고 싶었다.
'남자한테 관심없어!'
보폭을 넓게 하며 루세페가 달려들 때였다.
일라이는 크게 뒤로 물러나며 재정비를 하려 했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태세를 바꿔서 지면을 박찼다.
쉽게 물러난 일라이를 보며 마음을 놓으려던 루세페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시야에 꽉 차도록일라이가 그리메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 추수]
있는 힘껏 대각선으로 베는 일라이.
침착하게 지켜보고 있던 루세페가 몸을 슬쩍 틀어 피했다.
그러나 일라이가 노린 건 바로 이것이었다.
"안 닿을 줄 알았지?"
사삿- 지이이익-!
"엇……?"
일라이는 공격을 내지르는 그 순간에 빠르게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마치 루세페가 언제, 어떤 각도로 몸을 틀지 미리 알고 있던 것처럼.
그래서 회피에 성공했다고 여긴 루세페는 단숨에 옷이 찢겨나가고 말았다.
바로 정신을 차려 반격하려고 했으나 이미 목 언저리에 그리메가 위협적으로 다가와 있었다.
"큭……!"
"한 판."
가볍게 루세페를 이긴 일라이.
코를 납작하게 하려던 루세페는 오히려 제 꾀에 자기가 넘어간 셈이 되었다.
그는 마지못해 항복의사를 밝혔다.
인정하기 싫지만 마지막 순간에 일라이의 기술과 통찰력은 엄청난 수준이었다.
가볍게 루세페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일라이가 입을 열었다.
"서로 얼굴 붉혀서야 쓰겠어? 이런 어려운 때에. 그러니 쓸데없는 삽질은 그만 두자고."
"크으……!"
굴욕적인 표정을 짓는 루세페.
그런 루세페를 비웃듯일라이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서재로 향했다.
어차피 이길 건 알고 있었다.
얼마나 실용적이고 기술적으로 이길지가 중요할 뿐이었다.
"흠…갑자기 생각나네."
아까 전 아넬이 보였던 새하얀 보지둔덕과 선홍색의 조갯살 내부가 떠오른 일라이.
어린 것에게 흥미가 없기는 하지만, 그곳에 혀라도 갖다 댔다면 어땠을까?
어떤 맛이고, 풍미를 지녔을까?
그건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쓸데없는 잡념이라 여기며 머리를 휘휘 젓는 일라이.
그는 서재로 들어가서 정보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가 따라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왕자님!"
"음? 리비카."
달려온 건지 리비카가숨을 헐떡이는 게 보였다.
이제 막 식사를 마치고 겨우 일라이를 따라잡은 것 같았다.
멸망이 찾아온 뒤로 세계의 날씨는 상당히 이상했다.
추울 때가 있는가 하면, 더울 때도 있었다.
지금은 살짝 더운 때였다.
그 탓에 전력질주를 한 리비카의 몸이 미미하게 땀에 젖어 있었다.
"저, 저도 도우려고요……."
"그럴 필요 없는데. 그냥 쉬어."
"가만히 있기엔 뭐해서요. 그리고 공주님이랑 몽마분이 친해지시라고 저 혼자 나오기도 했고요."
일라이는 잠시 고민했다.
레피나와 아넬을 그대로 놔둔다 해서 사이가 좋아질 수 있을까?
오히려 더 싸우지 않을까?
하지만 싸우면서 친해질 가능성은 커 보이기에 가만히놔뒀다.
'그 둘 묘하게 비슷하지. 빈약한 것도 그렇고.'
한숨을 내쉬며 일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는 번안 마법이 걸려 있으니, 리비카가 책을 봐도 큰 문제는 없었다.
둘은 서로 의견을 맞추고는 고서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흠…이건 아니로군."
흥미로운 고서 하나를 발견해 읽어보던 일라이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예언 얘기를 하는 것 같다가, 가면 갈수록 종족의 기원에 대한 얘기 뿐이었다.
아무리봐도 멸망과는 관련이 없어 보였다.
미간을 찌푸리며 일라이는 책을 덮었다.
"그나저나 왕자님."
"왜? 뭐 찾았어?"
일라이가 바로 고개를 들며 물었다.
리비카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그…궁금한 게 있어서."
"뭔데?"
"정말 용사가 되실 건가요?"
리비카의 질문에 일라이는 피식 웃었다.
새삼스러운 걸 묻고 있었다.
용사가 되는 건 그에게 크게 중요한 것도아니었다.
"나말고 어울리는 사람이 있냐?"
"없죠."
"그럼 내가 용사지."
"용사는 모두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왕자님이 타고난 강자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조금 아쉬워요. 수많은 역사와 종족이 공존했던 에레스트 대륙. 그 대륙에서 굳이 제일가는 사람이 되어 피곤해지실 필요가 있을까요?"
리비카의 질문에 일라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면 그녀와 단 둘이 있는 상황이다.
왕궁에서라면 몰라도, 지금은 제법 다른 생각이 들 법하기도 했다.
리비카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왕자님이 편하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모든 게 멸망하더라도, 왕자님 혼자만이라도 편안하게…그러셨으면 좋겠어요."
"절세미녀들 없이 나만 편하면 무슨 소용이야? 그런 것보다 차라리 쟁취하며 싸우는 게 낫지. 왕국도 언젠가 재건해야 하고."
"왕자님이 다치는 걸 바라지 않아요."
"오호…그러셔?"
피식 웃으며 리비카 곁으로 가는 일라이.
갑작스런 움직임에 리비카는 놀랐지만 표정은 진지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일라이를 좋아하고 있었다.
단지 표현하기가 어려웠을 뿐.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일라이가 뺨을 긁으며 말했다.
"걱정해줘서 고맙네. 정말로."
"당연한 건데요……."
"너처럼 예쁜 시녀가 걱정해준다면 누구나 좋아할 걸?"
"앗, 아아……."
리비카의 턱을 살며시 들어올리는 일라이.
순수하게 놀라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일라이는 미소지었다.
위험한 장난을 벌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엘프들의 성지, 그리고 엘프들의 땅이다.
어쩌면 자신에게 불행의 신이 옮겨 붙은 게 아닐까 자책하며 일라이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동안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