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왕자는 하프엘프 공주를 만난다
"으음, 쿨럭, 쿠흑, 커헉!"
정신이 들자마자 격하게 기침부터 하는 일라이.
해가 사라진 건지, 아니면 저녁이 된 건지 주변은 어둑했다.
이마를 짚으며 일어난 일라이는 우선 주변을 살폈다.
"으으, 제기랄."
보이는 거라고는 무참히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시체.
후각이 감지하는 거라고는 피 냄새와 축축하고 시큼한 냄새 뿐이었다.
희미하게 빛이 내비쳐서 좀 더 시야를 넓혀 보았다.
끔찍했다.
웅장했던 왕궁은 무너져 있었다.
그나마 굵은 잔해들이라도 알아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할까?
광장에는 시체들의 지옥으로 변해 버렸고,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망할, 어떻게 된 거야? 진짜 멸망이라고?"
한참 융성했던 왕국의 왕자가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난데없이 멸망이라니.
그저 우스갯소리로만 치부하던 멸망 전설이 이렇게 실현되다니.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우선 왕성으로……."
호위할 기사가없다는 건 이럴 때 씁쓸하다.
다친 곳은 없지만 막 일어난 참이라 걷기가 힘들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 곳을 걸으려니 비위조차 상하고 있다.
차라리 대신 걸어줄 사람이 있다면 좋을텐데.
크게 숨을 내쉬며 일라이는 겨우 시체의 밭을 빠져나왔다.
"염병!"
하지만 시체의 밭은 다시 이어졌다.
왕성의 문이었던 곳은 힘없이 무너져 있었다.
그 틈으로 사람이 들어갈 틈새가 생겼는데, 지독한 피 비린내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이봐, 아무나 대답해! 누구 없어? 살아있다면 대답해!"
주변에 적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선 생존자를 찾고 싶었다.
정말 이대로 멸망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미 인지했을 터다.
어쩌면 현명하게 피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방탕한 왕자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일식이나 기대하며 광장에 나온 것이 전부였다.
데굴데굴- 탱-!
근처에서무거운 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흡사 자갈이 흘러가는 소리는 아마 왕궁의 잔해가 뒤늦게 쏟아지는 소리일 것이다.
그토록 찬란하던 왕궁이 지금은 이 모양이라니.
무슨 일이일어날지 모르기에 일라이는 그리메를 빼들었다.
시히잉-!
무언가를 차갑게 베는 소리와 함께 그리메가 칼집에서 뽑혔다.
120cm 는 넘을 법한 검신, 검신 곳곳에는 어두운 그늘이 져있는 듯 어두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칼날은 워낙 날카로워서 예전부터 달리 손으로 관리할 필요가 없었다.
어쩌면 이 점이 더욱 일라이의 마음을 잡아 끈 것일지도 몰랐다.
"후우…거기 누구야?"
앞에서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네 발로 기어서 근처를 탐색하는 것 같더니, 일라이의 목소리를 듣고 행동을 멈췄다.
그러다 마치 개처럼 더듬거리며 주변을 돌아보다가 일라이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워르르-
안타깝게도 그건 정말 인간이 아니었다.
전신이 새까맣게 변색된 듯한 대형견이 거품달린 아가리를 움직이며 일라이를 노려봤다.
알 수 없는 품종의 대형견.
아니, 대형견의 1.5배에 가까운 크기에 보고 있던 일라이마저 놀랄 정도였다.
"몬스터?"
컹컹-!
그때 대형견이 무섭게 달려들었다.
어딘가에서 길을 잃은 개는 절대로 아니다.
그렇다는 건 현생 포유류의 모습을 한 몬스터일 확률이 높았다.
실전 경험이 최소한으로 있는 일라이에게 몬스터는 여전히 생소한 존재였다.
자박자박- 콰학-!
털이 뒤덮인 발로 지면을 박차는 소리가 나더니대형견은 곧장 뛰었다.
그리메를 쥔 채로 일라이가 옆으로 비켜섰다.
커헝-!
대형견이 바로 허공을 가르며 지나갔다.
그때 일라이는 기지를 발휘해서 대형견의 옆구리를 빠르게 베고앞으로 굴렀다.
지극히 완력을 서두르는 일이었으나, 마지막은 가까스로 끝내며 유연하게 넘긴 것이다.
옆구리를 공략당한 대형견은 지면에 착지하자마자 쓰러졌다.
"쓰러졌나?"
상당히 절망스런 대사를 내뱉으며 일라이가 다가왔다.
그때 대형견이 발작을 하듯 일어났다.
그 순간 일라이는 날카롭게타이밍을 잡고 들어갔다.
"그대로 누워 있어, 개새끼야!"
이를 악물며 대형견의 엉덩이를 짓밟으며 허공으로 뛴 일라이.
일어나려던 대형견이 도중에휘청이자, 그 틈에 일라이는 스스로가 놀랄 만큼 침착함을 발휘했다.
지금 자신은 목숨이 걸린 싸움을 하고 있다.
생명을 죽이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므로 일라이는 냉정하게 지금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기술을 찾아내 대형견을 향해 흩뿌렸다.
[브류스터드 파검류 - 숨통 자르기]
승부는 단숨에 났다.
허공으로 뛰어오른 일라이가 왼팔에 힘을 집중한 채로 그리메를 휘둘렀다.
그리메는 지극히 단조로우면서 차갑게 하나의 궤적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기운차게 일어나던 대형견의 목이 그대로 허공을 나뒹굴더니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툭- 떼구르르르-
"후, 후우……."
대형견이 확실히 죽은 것을 확인한 일라이는 표정을 찌푸렸다.
대개 날붙이로 동물을 죽이면 피가 분수처럼 튀다가 사방으로 퍼진다.
그런데 이 대형견은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피가 걸쭉하게 나오다가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씨발,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군. 네가 암컷이라도."
지극히 자기 자신 다운 말을 하며 일라이는 앞으로 나아갔다.
왕궁의 문을 지나, 경비대가 있던 곳까지 지나며 마침내 대정원에 들어섰다.
아름다운 꽃과 화초로 만연하던 곳이 지금은 피와 시체로 얼룩져 있었다.
그나마 알아보기 힘든 시체들이라는 점에서 비위는덜 상했다.
우선 일라이는 최대한 주변에 귀를 기울였다.
'들리는 건 바람 소리와 시체들 옷깃이 휘날리는 소리뿐. 소리는 질러도 되겠지만 침착하자.'
일라이의 마음은 착잡했다.
세계가 정말 멸망한다면 지금까지 따먹으려고 점찍어놓던 여자들이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멸망은 현재진행형이다.
언제 완료되는지 몰라도, 어쨌든 그 멸망의 시작이 여기서 펼쳐지고 있었다.
하필 첫타겟이 자신이라는 점에서일라이는 자존심에 거대한 스크래치가 남았다.
"어떤 새끼인지 몰라도 해보자고. 우선 이 멸망에 대해 알아보겠어. 물론 내 기사단인원 구하는 것도 멈추지 않을 거고."
현재 일라이에게는 선택지가 여러 가지였다.
다만 확실하게 할 것을 언급하고넘어가자면, 멸망에 대해 알아보는 것과실력 있는절세미녀들을 찾아내는것이다.
아직 멸망이 완성된 건 아니다.
그렇다면 여전히 사람들은 살아 있을 것이며, 그들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장소 역시 있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멸망의 입김이 닿지 않은 평화로운 곳도 있으리라.
어디든 좋았다.
절세미녀들만 볼 수 있다면.
"그 무엇도 내 탐욕을 막을 수는 없지. 흐흐, 꼰대조차 내 탐욕을 막진 못했어!"
이제는 죽고 없는 부왕을 떠올리며 일라이는 탐욕스럽게 웃었다.
왕성이 있던 곳에 도착하니 더욱 착잡했다.
적어도 항상 암캐들처럼 따르거나, 마지못해 따먹혀주던 시녀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여긴 다른 곳에 비해 덜 파괴된 것이 아마 운석이 아닌 다른 것에 습격당한 것 같았다.
"어디 보자."
시체와 근처 기물에 들짐승의 것으로 보이는 발톱 자국이 보였다.
그 크기는 물론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욱 거대했다.
그렇다는 건 아까 대형견의 경우처럼 동물의 모습을 한 몬스터들이 쳐들어 왔다는 계산이 나왔다.
우선 일라이는 자신이 돌무더기에 대충 깔려 있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 탓에 살아 있는지 몰라도, 아무튼 여기서 멀쩡히 있다가 죽임당한 사람들보다는 낫다고 여겼다.
"야아아아! 누구 있어? 나 왕자 일라이다. 누구든 좋으니 모습 좀 비쳐! 여자면 환영이고, 남자면…어, 아무튼 좋다."
마지못해 남자까지 허락하려는 일라이.
그때 근처에서 화분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또 몬스터일까 싶어 일라이는 그리메를 들었다.
대형견의 피가 묻어 조금 변색되어 있었다.
"씨발, 좀 털고 다니자고!"
스스로에게 욕하며 그리메를 살짝 휘젓는 일라이.
피가 떨어져 나가며 힘없이 지면을 물들였다.
화분이 떨어진 곳으로 가니 아무 것도 없었다.
문득 일라이는 백과사전을통해 봤던 지식을 떠올렸다.
'몬스터 중에는 은신이나 은폐를 할 줄 아는 유형도 있다. 만나서 좋을 건 없지. 어둠에 몸을 숨기며 싸우는 비열한 족속들. 그것들의 방식으로 싸우는 건 내게 절대적으로 불리해.'
여기서는 물러나는 게 상책일 것이다.
몬스터에게 유리한 곳에서 싸워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물러나려는데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자, 잠깐……."
"음? 아, 레피나!"
두 눈을 가늘게 뜨던 일라이가 입을 크게 벌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레피나는 살아 있었다.
그녀는 출구가 막힌 왕성의 가장자리에서 숨어 있었다.
그러다가 일라이의 목소리를 듣고 화분을 떨어트린 것 같았다.
"제, 제발 도와줘, 아흑, 제발……."
평소에 당당하고 제멋대로인 레피나는 없었다.
지금 그녀는 그저 두려움이란 것을 대면한 하프엘프 공주에불과했다.
국왕 조슈아도 일라이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색골이었다.
엘프를 건드려서 임신시킨 것을 운좋게 제2공주로 받아들여진 게 바로 레피나였다.
새삼 생각해 보면, 그녀는 출생부터가 특별하다고 여겨졌다.
"얼른 내려와."
"출구가 막혔어."
"그럼 뛰어내려."
족히 10m 는 될 법한 곳에서 뛰어내리라는 일라이.
레피나는 잠시 일라이를 노려보다가 외쳤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죽어! 내가 너냐?"
"내가 받아 줄게."
"……뭐?"
"내가 받아줄 테니까 얼른 뛰어. 거기 있다가 봉변당할 수 있다고."
일라이가 진지하게 말하자 레피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이토록 진지한 일라이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니, 어쩌면 한 번 본 것도 같다.
제1공주와 밀애를 나누던 그라면 이런 모습이었겠지.
묘하게 분한 감정을 억누르며 레피나는 단숨에 뛰어내렸다.
"꺄아아악!"
"으읏, 큭! 씨발, 내 허리가 자랑거리라는 걸 고맙게 여겨!"
타앗-!
간신히 레피나를 받아낸 일라이는 이를 악물며 그녀를 내려놨다.
브류스터드 왕가의 피가 흐르는 자들은 저마다 능력을 각성하지만, 신체능력 역시 개인에 따라 우월하다.
일라이는 그 중에서도 축복받았다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고마워……."
"후우, 지금부터가 문제야. 왕궁 사람들은?"
"흐윽, 다 죽은 것 같아. 어흑, 막 비명이 들리고, 끄흑, 짐승들이 사방에서 외치기도 했어."
자신이 봤던 참상에 대해 짧게나마 얘기하는 레피나.
일라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은 그녀가 폭주하며 울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그럴 여유도 없으니까.
"괜찮아, 이제 나를 만났으니까."
"다 죽은 거야? 수행기사들도?"
"응, 나는 광장에 있었는데…일식이 빠르게 일어나자마자 다 뒈지더라고. 운 좋은 놈은 몇명 살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늘에 외로이 떠있는 만월을 올려다보며 일라이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나마 달은 멀쩡히 있는 것 같다.
내일 뜰 해를 볼 수는 있을까?
"이제 어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을 묻는 레피나.
이미 대답을 준비한 일라이가 싱긋 웃었다.
"어쩌기는? 우선 살아 남아야지.너는 잠자코 나를 따르라고."
"뭐어?"
"너는 멸망 전설을 모르지? 아무래도 거기서 선택받은 용사가 나오는 것 같더군."
"그래서?"
"그 용사가 되고 싶어서 말이지. 물론 내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서니까 딱히 위선을 부릴 생각은 없어."
역시 지극히 일라이 다운 대답이었다.
정의로운 왕족이었다면기꺼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용사를 자처했을 것이다.
그런데 일라이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 용사가 되겠다고 한 것이다.
이야기속에서 나오는 용사와는 다르기에 레피나는 헛숨을 들이켜다가 고개를 저었다.
"용사가 되는 게 쉬운 줄 알아?"
"우선 나만의 기사단을 만들 거야. 실력 쩌는 절세미녀들로! 아, 너도 끼워줄게. 어쨌든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잖아?"
"윽!"
일라이와 함께 해야 한다는 점에서 레피나는 욕을 내뱉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은인이며,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게다가 레피나 역시 일라이의 실력은 인정하고 있었다.
혹시 알겠는가?
그가 정말 용사일지.
"쳇, 잘나셨네."
"걱정마. 실력자들을 모으고, 이 사태를 틈틈히 파악할 거야. 그리고 전부 쳐부숴야지."
자신만만한 일라이.
그 모습에 레피나가 딴죽을 걸듯 말했다.
"마치 거칠 게 없는 모습이네."
"당연하지.이제나한테 위협이 될 인간은 없어."
당연하다는 듯 거만한 발언을 하며 일라이는 앞으로 나아갔다.
더 이상 생존자를 찾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안전한 곳을 찾아야 했다.
일라이를멍하니 쳐다보던 레피나도 얼른 걸음을 재촉했다.
우선 이 죽음의 성지에서 몸을 빼내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