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화 〉이제 시작인데 벌써? (2/100)



〈 2화 〉이제 시작인데 벌써?

전날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겨우 돌아와서 누운 일라이.
해가 이미 중천에 떴으나 일라이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시녀가 급히 들어오며 외쳤다.

"와,왕자님! 제2공주 님께서 오셨습니다!"
"쿠으, 푸흐으……."

근육으로 이뤄진 상체를 드러낸 채로 침대에 누워 있던 일라이가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건 갑자기 소리가나서 그런 것이지, 고작 제2공주 따위가 두려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에게 있어 윗사람은 부모와 몇년 전 모험가가 되겠다고 가출한 제1공주 밖에 없었다.
 때문인지 일라이는 더욱 안하무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으읏, 왕자님! 지금 공주님께서……."
"아, 귀찮아아. 가서 미녀나 대령해."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공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쿠흐,뭐? 네가 대신 대주겠다고?"
"왕자님, 제발!"
"알았어, 한 번만 싸주면 되는 거지?"


비몽사몽 상태로 일어나며 시녀를 덮치려는 일라이.
그때 실크로 이뤄진 원피스를 입은 채로 작달만한 체구의 하프엘프, 제2공주 '레피나 브류스터드'가 나타났다.
 금발을 양갈래 롤헤어로 꾸민 머리를 매만지며 레피나가 일라이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까칠하면서도 어리광을잘 부리기로 유명했다.
그녀 역시 일라이처럼 왕가의 능력인 '치유'를 물려받은 입장이었다.
그러나 둘의 관계를 설명하자면 복잡미묘  자체였다.


"아, 진짜! 왕자나되는 인간이 왜 저래?"
"헙, 공주님!"
"너는 그냥 꺼져."
"네, 네……!"


시녀를 물린 레피나는 혀를 찼다.
이제야 슬슬 정신이 드는지 일라이가 목 뒤를 주무르고 있었다.
대륙에서 이보다 더 한심한 인간이 있을까?
허구한 날 여자를 따먹거나, 술에 취해 뒹구는 게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러면서 계승서열은 제일 높은지라 신하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허나 지금 일라이에게 필요한 건 브레이크 역할이었다.
그걸 밀애를 나누던 제1공주가 나간 뒤로 해줄 사람이 없었다.


"우으…너는  왔냐? 허엄."
"하아, 이 인간아. 벌써 정오가 가까워지는데식사 안 한다고 신하들이 지랄이더라."
"말  곱게 해라. 그리고 오빠라고 불러야지?"
"내가 왜? 기회만 오면 그쪽 목에 칼이라도 들이밀면서 나라를 가질 입장인데?"


레피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왕족 사이에서 근친이 흔한 것처럼, 자리 하나를 놔두고 피터지는 암투를 치르는 것도 결코 희귀하지 않다.
그러나 레피나의 건방진 말은 항상 안 좋게 작용하고는 한다.
바로 지금처럼.

"그래? 그럼 지금 당장 해보시지."

일라이가  눈에 힘을 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수풀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맹수와도 같은 표정이었다.
평소에는 삶에 의욕이 없어 보이면서도 방탕해 보이는 얼굴이, 지금은 무척 무섭게 느껴졌다.
결국 레피나는 떨고 말았다.


"그, 그, 그…지금은 칼을 안 가져 왔어."
"쯧, 너한테 뭘 바라냐."
"뭐? 지금 나 개무시한 거야?"


입을 비죽이며 레피나가 따지듯 물었다.
하지만 일라이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레피나는 말 그대로 로리 체형이었다.
나이야 이제 막 성인이 됐다지만, 가슴보다 꿀이 흐르는 하체로 승부를 보는 레피나 같은 여자는 별로였던 것이다.
물론 이것 역시 어필 포인트가 되기에 언제라도 따먹을 가치로 여겨질 수는 있었다.

"하아암, 밥 먹을 거면 너 혼자 먹어. 아오, 속 안 좋네."
"하여간 웃기지도 않아! 저딴 게 이 나라의 왕자고,  오빠라고? 아오, 차라리 언니가 더 나았지!"

있는 대로 소리를 치며 나가버리는 레피나.
그녀의 성격이 언제부터 꼬인지는 일라이도 알지 못한다.
다만 언제나 그녀의 어리광을 들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아, 오늘도 일과를 해볼까?"


오늘은 무려 휴일이라는 일요일.
그래서 할 일도 별로 없었고, 무엇보다 밖은 사람으로 붐빌 것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브류스터드 왕국 사람들은 놀기 좋아하기로 유명하니까.
그러니 그 틈에 잠깐 끼고 싶었다.
방에 달린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는 일라이.
전날 풍겼던 술 냄새가 서서히 가시기 시작했다.


"허업, 스헙, 햐아…이제야  시원하네."


루토리아 양식으로 지어진 방은 욕실마저 예술작품으로 보일 만큼 멋지다.
아담한 넓이에 금으로 도배된 욕조, 그리고 경험많은 장인들이 만든 훌륭한 양변기와 샤워기까지.
누릴 수 있는 온갖 호사를 바로 왕궁에서 누린다는 건  축복이었다.
처음부터 왕족으로 태어난 일라이는 이걸 당연히 여기고 있지만 말이다.

"음? 그나저나 오늘 일식이 있다고 했지?"


샤워를  하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던 일라이가 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면 곧 일식이 진행될 것이다.
한낱 전설은 믿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하루하루 왕족으로 사는 건 최고의 삶이다.
하지만 이런 것도 계속 되면 지루한법이다.
지금 일라이에게 필요한  자극이었다.


"좋아, 일식이 가장 잘 보이는 게 보르고트 광장이었지? 거기로 가자!'

오늘은 특별히 실전을 치르거나 사냥을 하러 나갈 때의 복장을 하는 일라이.
버프코트를 입고, 스케일 아머로 상체를 살짝 조인 다음, 승마바지와 철제 레깅스로 하체를 보강한다.
그 다음 '신의 나뭇가지'를 축성해서 만든 명검인 '그리메'를 꺼내보았다.
짙은 회색의 그림자가 항상 검면에 남아 있다 해서 붙은 이름.
일라이는 자신의 명검인 그리메를 항상 분신처럼 여겼다.


"좋아, 오늘은 너도 가는 거다!  복장에 이 검이면 끝났지."

술을 마신 다음날이라 그런가?
묘하게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막 방을 나서려 할 때 일라이 앞에 어떤 시녀가 달려왔다.

"헉, 허억, 왕자님. 흐읏, 나가시려는 건가요?"
"응, 왜?"

자신을 모시는 시녀 중 하나인 '리비카 블라리온'였다.
힘겹게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쉬던 리비카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한때 사령술로 이름이 드높은 귀족가문중 하나였으나, '5년 전쟁'에서 '겔보이드 제국'에 의해 산산조각난 가문이기도 했다.
 가문의 생존자이면서 어떻게든 가문을 살려보겠다고 시녀까지  인물이었다.
사령술로 유명한 가문이니 다들 꺼려 했지만, 일라이는 어차피 여자면 사족을 못 쓰는 종자이니 바로받았던 것이다.


"음주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빈 속에 바로 나가시면 몸에 안 좋으실 거예요."
"하여간  귀찮게 내 걱정하네. 아, 됐어."
"하지만 그래도……."
"아, 됐다니까? 짜증나게 하지마라. 고작 일식 좀 보다돌아올 거야. 그 시간에 식사나 준비해놓든가."

시녀는 수발을 드는 사람이지, 식사를 일일이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다.
일라이가 얼마나 오만한 왕족인지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리비카는 얼굴색이 바뀌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있어 일라이는 은인이나 다름없다.
만약 시녀로서 수발을 들 사람이나 부서가 없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시녀는 커녕 길바닥에 주저앉아 구걸이나 하거나, 창녀가 되어 몸을 팔아야하니까.

"다녀오시길……."
"응."


대충 손을 흔들며 일라이는 밖으로 나섰다.
리비카의 외모만 보자면 그다지 나쁘지 않다.
오히려 적당한 C컵 가슴에 몸의 비율도 상당히 좋다.
무엇보다 키가 170cm대라서 시원시원한 모델 같아 보이기도 했다.
묘하게도 아직 그녀에게 손을 대본 적은 없기에, 그녀가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내 시녀. 이미 내 손아귀에 들어온 밥줄이지."


이미 손에 들어온 건 관심없다.
지금 그에게는 자기만의 기사단에 넣을 실력 있는 여걸들이 필요했다.
그러한 절세미녀들이 어디에 있을지 궁금했다.

"또 외출이십니까?"
"아앙."
"마차에 오르시길 바랍니다."


대충 대답하며 마차에 오르는 일라이.
그는 하품을 하며 마차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본래 왕족이면 수발을 들 시녀가 따라다닌다.
그러나 일라이는 그것을 거부했다.
술과 여자를 탐내는 일라이지만, 이상하게 자기만의 여가시간에는 항상  수 있는 여자들은 배제하고는 했다.

"그러다 질릴 수 있으니까."


문득 든 의문에 대한 답을 내놓으며 일라이는 다시 하품을 했다.
마차에 오를 때면 항상 졸립다.
부디 일식이 진행될 때는 그러지 않기를 바라며 상쾌한 바람을 느꼈다.



***





항상 사람들로 넘치는 보르고트 광장.
왕성과 가장 가까이 있으며, 사방에서 온 모험가나 여행객들이 주로 찾는 관광지이기도 했다.
이곳에는  국왕인 '조슈아 브류스터드'의 동상이 서 있었다.
사람들은 항상 저 동상에 경의를 표하고는 한다.
허나 그것에 일라이는 의문을 지녔다.

'동상에 경의를 표하는  멍청한 짓이지. 정작그 사람을 만나면 표할 경의가 줄어들 텐데. 동상이 감사라도 하나?'

한숨을 쉬며 기사들과 함께 광장을 거니는 일라이.
가급적이면 기사들을 배제하고 혼자서 걷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다.
명색이 한 국가의 왕자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곳을 혼자서 걷다니.
그보다 더 무모한 짓은 없으리라.


"이봐,얘기 들었어?"
"뭔데?"

분수대 근처에서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게 보였다.
일라이는 좋은 터를 잡을 겸 쓸만한 여자를 찾기 위해 좀 더 두리번거렸다.


"동부전선 얘기인데. 거기 '백설마녀'가 나왔다나 봐."
"엥? 그거 괴담 아니었어?"
"내 친구가 거기 병사잖냐. 실제로 봤다는데?"
"에라, 터무니없는 소릴 하네. 차라리 내 얘기가  그럴싸 하겠다."
"하, 뭔데?"
"우리 수도를 감싸고 있는 산맥을 지나면 나오는 벌판 알지?"
"음…글로드 황야?"
"응! 거기서 '그랜드 앰피티어'가 출현했대! 그것 때문에 용병단들이 비상 걸렸다는데? 그놈 이름이 뭐였더라……."
"에라, 지랄을 해라!"

사람들의 얘기를  귀로 흘리며 일라이는 한숨을 쉬었다.
우선 특별히 물색할 여자는 보이지않았다.
무엇보다 아무리 일식이라지만 주변에는 시커먼 남정네들이 가득 했다.
여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일 기미조차 없어 보였다.
저절로 욕이 나올 상황이었으나 우선 하늘부터 올려다봤다.


"하아, 잘난 일식 좀 보여봐라."

하늘에 명령을 하듯 말하는 일라이.
그때 기사 중 하나가 해가리개를 가져오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길이가 3m는  법한 해가리개가 시야를 가리자 일라이가 따졌다.


"지금 뭐해?"
"햇빛이 강렬합니다."
"저기요, 지금 제가뭐하러 나온지 모르세요?"
"……하지만 햇빛이 강합니다."


뭐든 배운대로, 지시한대로만 움직이는 기사들.
그들의 머릿속에 뇌보다 FM이 가득하지 않을까 고뇌하며 일라이가 겨우 미소를 지었다.


"햇빛이 강렬하든 말든 괜찮으니  비켜. 일식 안 보이잖냐."
"네, 네!"

기사가 옆으로 물러나자 일라이는 혀를 찼다.
주변에 남자들만 있어서 기분이 우울한데 기사들까지 이러다니.
어차피 이들도 온전히 자신의 사람이라 볼 수 없다.
대개 왕이 아닌 왕자에게 이전된 수행기사들은 어디까지나 국가의 것이었다.
즉, 필요하면 왕의 명령에 따라 왕자를 져버릴  있는 이들이었다.

'남자인데다  사람들이 아니기도 하지. 저럴 바에 차라리 나랑 계약한 절세미녀들로 기사단을 꾸리는 게 백배 더 낫다고.'

여전히 절세미녀 기사단에 대한 생각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일라이.
그때 마침내 일식이 시작됐다.


"오호, 저기 봐!"
"이야, 일식이다!"
"저런 건 언제 봐도 신기하단 말이야. 신께서 노하신 건가?"
"잠자코 지켜봐!"


하늘에 광휘를 내비치며 떠있던 태양이 서서히 까맣게 가려지기 시작했다.
일식을 보는 게 처음이 아닌 일라이인지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일식은 해가 서서히 가려진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처럼 빠르게 진행되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지금 그러고 있었다.


"어라……."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일식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절반쯤 가려질 때, 구경꾼 중 하나가 몸을 떠는 게 보였다.

"이거 좀 이상하지 않아?"
"뭔 헛소리야? 일식 처음 봐?"
"아니, 근데…뭔가  빠른데?"
"뭔 소리야. 관측자들이 오늘 일식한다잖아. 그냥 지켜 봐라, 좀."

쓴소리를 하는 동료 때문에 구경꾼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일라이도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지금 이 일식은 이상하다.
보기만 해도 몸이 떨릴 만큼 무언가가 감춰진 것 같았다.
그리고 태양은 완전하게 가려졌다.


"우와……."
"어두워!"
"밤인가? 아니지?"


태양이 완벽하게 가려지는 그 순간, 갑자기 비명이 들렸다.


"꺄아아아악!"
"아악, 살려줘, 살려줘!"
"뭐, 뭐야?"


갑작스런 소란.
그리고 평소에 들어본 적 없는 굉음.
새까맣게 어두워진 하늘에서 난데없이 운석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미티어 주문이라도 외운 것처럼 여러 개의 운석들이 왕성을 직격했다.


슈후우웃- 쾅쾅- 쉬히잇- 쾅- 콰직-!


"끄아아악!"
"커헉!"
"미친, 이게 뭔 개짓거리야!"

상황파악을 한 사람들이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도망치려 했다.
일라이 역시 얼굴을 찌푸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씨발, 어째 감이 좋지 않더라."
"왕자님, 끄아악!"


막 일라이를 챙기려던 수행기사 하나의 팔이 깔끔하게 잘리고 말았다.
일라이는 흠칫 놀라며 뒤로 몸을 내뺐다.
그러자 일라이가 있던 곳에 길게 빛줄기가 날아들더니 사라지는 게 보였다.
빛줄기에 닿은 기사들이 갑옷이고 몸이고 남아나지 않고 깔끔하게 절단되는 게 보였다.
갑작스러운 소란 사태.
세상이 어두워진 그 순간, 하늘 밑에서는 오직 혼란만으로가득 차고 있었다.

"제기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일라이가 상황파악을 하려고 일어설 때, 근처에 운석이 날아와 처박혔다.


쉬히이잉- 콰아앙-!

"어억!"

 힘을 다해 몸을 날리려던 일라이는 근처에 도망가던 사람의 칼자루에 부딪쳐서 쓰러지고 말았다.
정신을 잃은 일라이 주변으로 시체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평온하기만 하던 에레스트 대륙에마침내 혼란이 찾아온 것이었다.
그저 허망할 거라 여겨지던 예언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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