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아는 주인공들-456화 (완결) (456/456)

# 후일담 6

“그게 오빠의 지난 이야기였어요?”

“그래.”

유현은 곁에 쪼그리고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강서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서하는 눈을 반짝이며 유현의 이야기를 듣고는 이내 헷, 하고 미소를 머금었다.

“고생 많으셨네요.”

“그래. 하지만 충분히 그런 보람이 있었으니까.”

당장 눈앞에 살아 있는 강서하를 마주 보고 있는 지금만 봐도 그렇다.

그에게 있어서 트라우마이자, 그러면서도 그가 결정적으로 바뀌게 될 계기를 준 소녀.

한때 자신의 이름조차 갖지 못했던 소녀는, 이제는 가족과 함께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중이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가족을 만날 수 있게 됐어요.”

“그래. 그러니까 앞으로 잘 살아.”

“오빠는요?”

“나는 아직 할 일이 많거든.”

그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아직 미처 조율되지 못한 차원의 틈새도 확인해야 하고, 뿔뿔이 흩어진 로고스의 일부 잔당도 색출해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깥’의 일이다.

단순히 행성의 단위를 넘어 우주의 바깥, 또 다른 우주가 존재한다.

그리고 무수한 우주 중에서는 언제 터질 줄 모를 정도로 불안정한 곳도 있었다.

“슬슬 가 봐야겠어.”

“그렇네요. 오빠는 바쁜 사람이니까요.”

“가끔 생각나면 만나러 올게. 그때까지, 잘 지내.”

“네.”

그녀의 부모님께도 미리 말을 해 뒀기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으리라. 단지 굳이 지금 강서하를 만난 것은, 그녀에게 어느 정도 말을 전후 상황을 말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머리가 좋으니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고마웠어요. 그때도, 지금도.”

“그래.”

유현은 강서하와 인사를 나눈 뒤, 그녀를 다시 집으로 되돌려 보냈다.

강서하는 평화로운 삶을 되찾았다. 유현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더 노력해야겠지.

“끝나셨습니까.”

“예.”

등 뒤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롯피우트에게, 유현은 돌아보지 않은 채로 답했다.

“회의가 곧 시작됩니다.”

“그렇습니까. 바로 가죠.”

회의.

이 세상의 존망을 넘어 ‘바깥’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열리는 회의다.

당연히 이 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존재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극히 적다.

공간을 열고 도착한 그곳은 무수한 책이 꽂힌 도서관의 중심.

넓은 중앙에는 원형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초대받은 손님들이 먼저 와서 유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왔네.”

유현을 가장 먼저 반겨 준 것은 오엘로였다. 그리고 그 옆에 앉은 프라이티온이 안경을 고쳐 쓰며 유현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롯피우트를 포함해, 이전 이야기의 왕 중 생존한 세 명이 이 자리에 모였다.

“왔는가.”

중후한 목소리로 유현에게 인사를 건넨 것은 나이를 먹은 용인, 갈리아츠였다.

대성군 드래고니카의 대표로 온 그는 유현과의 인연도 있어서 이 자리에 오게 됐다.

“다들 모였군요.”

그 외에도 자리를 차지한 것은 대성군 판데모니엄 출신의 메피스토펠레스.

대성군 마왕연합의 중진이자 유현과도 인연이 깊은 1세대 성령 손오공.

그 외 빈자리가 더 있었지만, 유현이 부탁한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운 거라 누구도 그걸 따지지 않았다.

“자, 그러면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그렇지.”

갈리아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아내 분들과의 신혼 생활은 어떤가?”

“크흡!”

훅 들어오는 갈리아츠의 물음에 유현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하지만 누구도 갈리아츠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운 시선으로 유현의 대답을 기다리기까지 했다.

“갈리아츠님……? 여기서 갑자기 그런 질문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아니, 뭐 어울리고 자시고 할 것이 있나. 이 세계의 조율자가 예쁜 아내를 무려 넷이나 받아들였는데, 그들이 사이가 좋은지 아닌지 알 필요가 있지 않나.”

“……그러는 갈리아츠님은요?”

“나는 잘 지낸다네.”

갈리아츠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는 이미 드래고니카의 일곱 기둥 중 하나인 백룡왕 샤루리엘과 영원 지약을 맺었다.

이전부터 서로 마음에 있던 사이였기에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질 수 있었다.

전직 텔러 출신과 성령이 맺어지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지만, 지금 같은 자유로운 시대에서는 흔한 일이 됐다.

유현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일단, 잘 지냅니다.”

“허허. 그런가?”

“예. 뭐.”

그날의 고백 이후로 유현에게는 아내가 넷이나 생겼다. 유현은 아직도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맙소사.

지금까지 여자와 사귀어 본 적이 없는 모태 솔로에게 아내가 넷이나 생기다니.

이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멸망할 뻔한 세상을 지키기 위한 대전쟁까지 겪었는데, 이런 부분에서만 과거의 상식을 들먹이며 비교하는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닐까?

유현은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아내분들은 지금 뭐하시나?”

“……일단, 제가 부탁한 일 때문에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거 아쉽군. 인사라도 나눌 걸 그랬는데 말이지.”

그 순간, 오엘로가 무언가 떠올렸는지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니 뭐, 그 넷은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지금 내가 부르면 새로운 둘 정도는 만날 수 있을 텐데.”

“새로운 둘?”

“그건 또 뭐야?”

오엘로의 말에 갈리아츠나 손오공, 메피스토까지 반응했다.

유일하게 오엘로가 뭘 말하는지 눈치챈 유현만 체한 것 같은 얼굴이 됐다.

“오엘로님? 헛소리는 하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헛소리라니? 애초에 뭐, 그 네 아가씨들이야 너와 같이 지내서 그랬다 치지만. 솔직히 더 있잖아? 정확히는 텔러였던 시절 만난 직장 동료가.”

“호오. 직장 동료라고?”

갈리아츠는 무언가 짐작 가는 것이 있는지 음흉한 미소를 머금었다.

유현은 자기도 모르게 두 존재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나는 자신을 보며 항상 라이벌 의식을 불태웠지만, 그 시선에 은은한 호감이 담겨 있는 알리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일을 도와주며 서로에 대한 친근함이 쌓인 셀린.

5년의 공백 사이에 둘과 만날 일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또 다르다.

“두 아가씨가 얼마나 극성인지.”

“오엘로님!”

“아, 알았다 알았어. 거 참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오엘로는 능글맞게 웃으며 주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이 자리에 모인 존재들은 전부 알게 됐으니 목적은 달성했다고 볼 수 있으리라.

“흐하하하! 조만간 또 결혼식 하는 거냐? 그때 내가 또 주례를 서 줄까?”

“손오공님…….”

“허허. 뭐, 이 세상의 조율자인데 거기에 둘 정도 추가된다고 뭐 달라질까?”

“갈리아츠님…….”

“서로가 좋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프라이티온. 당신까지…….”

유일하게 메피스토만 손에 깍지를 낀 채로 이 일련의 대화를 흥미롭게 구경 중이었다.

하지만 그건 명백히 관객의 입장이라 유현을 도와줄 생각은 코빼기도 없어 보였다.

정말 못 말리겠군.

유현은 고개를 저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건 다음에 이야기하고.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겁니다. ‘바깥’의 일이죠.”

바깥이라는 말이 나오자 자리에 모인 존재들의 표정이 대번에 진지해졌다.

“흐음. 역시 그런가. 우주 바깥에 또 다른 우주가 있다니.”

“그렇다는 건 로고스 같은 녀석이 또 있다는 건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유현은 자신이 확인한 것들만 말했다.

“우리가 사는 우주 너머,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소우주라고 말하죠. 바깥에는 여러 소우주가 존재하고, 그런 소우주들을 둘러싼 것이 대우주입니다. 앞으로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다른 소우주죠.”

“그렇게 심각한 일이야?”

“우주는 끝없이 움직이고 팽창합니다. 그러다 보면 필연적으로 다른 소우주와 부딪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제가 조율을 하면 그런 일까지는 가지 않겠지만요.”

“문제는?”

“다른 소우주에는, 저와 같은 조율자가 없는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제일 심각한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이 살고 있는 ‘무한서고’는 강유현이 조율자가 되어 외부의 위험을 방지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 소우주는 로고스나 유현 같은 조율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원래 있었지만 모종의 이유로 사라졌거나, 혹은 도망쳤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거나 살해당했거나.

“조율자는 각 소우주를 담당하는 자들. 자신의 소우주에서는 막대한 권능을 부릴 수 있지만, 그들은 전지전능하지 않습니다.”

로고스처럼 세계를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 자신이 멋대로 주무른다 하더라도, 유현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것처럼 ‘반드시’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다른 소우주에도 무조건 조율자가 존재할 수는 없었다.

메피스토가 입을 열었다.

“바꿔 말하면, 조율자가 존재하는 세계 또한 있다는 거군요.”

“네. 그리고 저는 그 세상의 조율자들과 만나 볼 생각입니다.”

끝없이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우주가 충돌하지 않도록, 조율자와 조율자는 서로 자신의 우주를 잘 관리해야 한다.

유현은 일단 자신이 눈여겨본 다른 소우주의 조율자들과 회동을 가져 볼 생각이었다.

“대표적으로 누가 있지?”

“아직 이름까진 모릅니다만, 어떤 세계인지는 확인했습니다. 첫 번째는 바로 계약의 세계입니다.”

“계약의 세계?”

“예. 물론, 실제로 그런 이름은 아니고 제가 임시로 붙인 이름입니다. 그곳에는 우리 세계의 성령이라는 존재들이, 하계의 존재들과 ‘직접 계약’을 맺으며 힘을 빌려준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곳에 존재하는 조율자는 ‘계약의 신’과 함께 지내는 한 청년이었다.

물론, 평범한 청년은 아니다.

그 영혼의 깊은 곳에는, 한때는 가장 눈부시고 찬란했던 신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는 자신의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찌꺼기를 없애고, 자신의 세계를 조율하고자 열심히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제가 그를 인지한 것처럼, 그 또한 저를 인지했을 겁니다.”

“다른 곳은?”

“다른 곳은 조금 특이합니다. 각 별에는 수호자와 그것을 침공하는 마왕이 존재하는 세계거든요.”

유현이 확인한 또 하나의 세계는 마왕이 존재하는 세계였다.

정확히는 각 행성들은 저마다 명확한 수명이 정해져 있다. 그리고 그 힘을 다 사용하면 행성은 멸망의 기로에 접어들게 된다.

그 부족한 힘을 채울 방법은 다른 행성에서 빼앗아 오는 것 뿐.

그렇게 멸망을 앞 둔 행성의 ‘혼’이 자신의 행성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를 수호자로 삼아서 다른 행성의 힘을 빼앗아 오게 하는 것이다.

당연히 습격당하는 행성의 입장에선 멸망할 세계의 수호자들이 ‘마왕’처럼 비춰지는 것이고.

빼앗지 못하면 이쪽이 죽는 제한된 세계.

하지만 그것도 어느 기점으로 바뀌게 됐다.

수호자 중에서 특히 강력한 존재가, 다른 행성의 수호자들을 모아 마왕에게 저항하고, 타 행성을 ‘침략’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행성의 수명을 늘리는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저는 그곳을 영웅과 마왕의 세계라 보고 있습니다. 그 쪽과도 접촉을 할 생각이고요.”

“그렇군. 그 외에는?”

“아직 없습니다. 다른 세계는 조율자가 정해지거나, 혹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니까요. 다만, 눈여겨보고 있는 곳이 몇 군데 있기는 합니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거대한 나무’가 존재하는 세계였다.

유현이 사는 이 세계가 무수한 책으로 이루어진 ‘도서관’이라면, 그쪽 세계는 말 그대로 우주에 뿌리를 내린 거대한 나무가 지탱하는 세계였다.

그리고, 또 한 곳은 찬탈자들의 세계였다.

본래의 주인의 자리를 몰아내고, 자신이 그곳에서 신의 행세를 하며 체스 말을 움직이는 세계.

다만, 조율자는 그들 중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작은.

찬탈자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 아주 작은 체스 말 하나가, 그 가능성을 머금고 있었다.

“두고 보면 알겠죠. 당장에 조심해야 하는 것은, 역시 조율자가 존재하지 않는 혼돈의 세계일 겁니다.”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소우주가 대부분이었지만, 그중에는 아주 심각할 정도로 망가진 소우주도 존재했다.

멸망이라는 말로도 표현하기 부족할 정도로 처참하게 망가진 흑색 세계.

놀랍게도 그런 세상 속에서도 생명체는 살아가고 있었다. 다만, 언제 사라질지 모를 미천한 목숨을 부지한 채로.

그런 세상을 유지하는 것은 조율자가 아닌, 다른 무언가의 괴물이기도 했다.

“계속 지켜봐야겠죠. 그들이 우리 우주와 충돌하게 될지, 혹은 손을 잡게 될지.”

그것이 무한서고를 담당하는 조율자.

“그리고 확인해 보는 겁니다. 그곳에는 또 어떤 이야기가 존재하는지.”

강유현의 역할이니까.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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