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아는 주인공들-453화 (453/456)

# 후일담 3

결혼식이 시작됐다.

레안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얼굴로 케이라를 응시했다.

프리첸 또한 레이첼과 팔짱을 끼며 평소의 경박함 없이 긴장감이 가득한 얼굴로 목을 빳빳이 세웠다.

신랑 신부들을 축하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자 그러면, 신랑과 신부는 사랑의 의미를 담아.”

주례를 서던 손오공은 얼굴에 쓰고 있던 무테안경을 벗으며 씨익 웃었다.

“영원을 맹세하는 키스를 하겠습니다!”

“휘유!”

“와아아아!”

곳곳에서 자지러지는 함성이 터졌다. 특히 기뻐하는 것은 이런 오락이나 유희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성령들이다.

그들에겐 하계의 결혼식이라는 것은 그저 [시화]를 통해서 구경하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한때는 저런 것을 하고 싶다는 그런 욕구조차 거세당한 그들이었지만.

로고스가 사라지고 자유 의지를 얻게 된 그들은 이제 지금까지 누리지 못했던 문화를 누릴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신호탄이 지금의 결혼식이었다.

“이게 현실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

케이라를 응시하며 레안은 그녀의 손을 꼬옥 쥐었다.

마주 잡은 손에 온기가 느껴진다.

감각이 살아 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그녀는, 죽은 줄 알았던 그녀는 되살아난 것이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두려워.”

레안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만 들리게끔 작게 말했다.

“이 행복이,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미 한번 레안은 모든 것을 잃었었다.

겁쟁이였던 시절 그는 싸우는 것을 차마 선택하지 못했고, 결국 이야기마저 얼어붙은 행성에서 죽지 못해 살았다.

그때의 악몽은 지금도 생생하다.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면서도 죽는 것이 두려워 숨어 지냈다.

이겨 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내면에는 아직도 그때의 불안감이 응어리처럼 남아 있던 것이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죠.”

“케이라.”

“하지만 레안. 겨울은 언젠가 끝나요.”

케이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레안을 다독였다.

“저와 당신이 다시 만나게 된 것처럼. 겨울은 비록 길지언정 끝나지 않은 건 아니에요. 분명 다음에 또 다른 겨울이 온다고 해도, 봄은 언젠가 다시 오게 돼요.”

봄은 다시 돌아온다.

그들이 서 있는 이 땅도, 한때는 영원히 얼어붙을 동토의 땅이었으니까.

하지만 눈은 녹는다. 겨울이 와도 언젠가 봄은 온다.

세상은 언제나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갈 거다. 그럴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레안은 그 말에 방긋 웃었다.

“그래. 내가 괜한 걱정을 했어.”

이 순간, 레안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응어리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레안.”

“케이라.”

“……아주 꼴값들 떤다 진짜.”

보다 못한 손오공이 눈살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남들은 보이지 않고 둘만의 세계에 빠진 저 예비부부, 아니 이제는 완전히 부부가 된 커플을 보자니 뭔가 배알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키스나 해!”

이젠 격식을 차린 주례고 뭐고 그런 건 사라진 지 오래.

하지만 누구도 그런 손오공을 탓하지 않았다.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이 또한 그들이 영위하는 즐거움이라 여겼다.

케이라와 레안이 입맞춤을 나눴다.

프리첸과 레이첼도 마찬가지였다.

“끝! 결혼식 끝!”

“와아아아!”

하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손오공은 이 지긋지긋한 양복을 겨우 벗어던질 수 있어서인지 바로 도술로 환복을 했다.

황금쇄자갑을 입은 손오공은 겨우 살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갑주보다 이렇게 불편한 복장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야 사진 찍는다!”

누군가가 그렇게 외쳤다.

이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사진 촬영 차례였다.

신랑과 신부가 앞에 서고, 그 좌우로 가르디안들이 섰다. 그리고 그 뒤로는 하객들이 우르르 모여서 자신의 존재함을 과시하고자 했다.

갑옷을 입은 기사들, 아인종들, 천사와 악마, 꼴에 예의 차리겠다고 양복 입은 성령들까지.

온갖 존재들이 뒤섞인 엉망진창인 광경.

“유현 씨!”

레안은 그 상황을 즐겁게 응시하는 유현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여기로 오시죠!”

“네?”

모두의 시선이 유현을 향했다.

이미 한가운데의 진짜 자리는 정해져 있다는 듯, 그곳만 휑하니 비어 있었다.

“안 가고 뭐 하냐. 네 덕분에 이 순간을 즐길 수 있게 된 건데.”

“오엘로님.”

“그냥 가.”

오엘로는 유현의 등을 떠밀었다.

유현은 어색해하면서도 안내된 자리에 섰다.

“자~ 찍습니다!”

새삼스럽게.

유현은 자신이 많은 일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존재. 비록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들이 웃을 수 있게 된 것은 분명 유현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으니까.

“찍습니다!”

“잠깐! 하계에서 이런 순간에 뭐라고 외치던데?”

“뭐였지? 치즈였나?”

“김치! 이렇게 외쳐야지!”

“김치!”

저들끼리 떠드는 성령들. 동시에 카메라의 셔터가 눌러진다.

이 순간을 추억하기 위해 많은 존재가 모였다.

그들의 웃는 모습이 사진에 담긴다.

지금도 앞으로도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세계가 오기를 바라며.

“부케 던집니다!”

“오오, 드디어!”

신부들이 부케를 던진다는 말에 일부 성령들이 눈을 빛냈다.

사실상 이 자리에 모인 일부 여성들은 지금 이 순간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하계에서 신부가 지닌 꽃다발, 즉 부케를 던지고 그것을 받은 자는 혼사가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그게 단순한 소문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혼성계니까. 즉 부케를 받으면 진짜 결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독수공방의 시대는 끝났다!’

‘성령도 이제 결혼할 수 있는 시대!’

‘나도 멋진 남편 얻을 거야!’

무시무시한 기세가 휘몰아치는 그 모습 속에서 유명인들도 적잖게 있었다.

대표적으로 올림포스 대성군 출신이었던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와 지혜의 여신 아테나.

천계삼십육천 출신의 선녀들도 있었고, 다른 신화 속의 솔로 여신들 또한 여럿이었다.

“이거, 좀 위험한 거 아니야?”

“무, 물러나자.”

뭔가 분위기가 험악하게 흘러가려는 것 같자 눈치 빠른 일부는 현장에서 멀리 물러났다.

유현도 이쯤 되면 자기가 나서서 말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흘러가는 분위기 자체는 막을 수 없었다.

“자! 신부! 첫 번째 부케를 던져 주십시오!”

사회자의 외침에 케이라가 눈을 질끈 감고 꽃다발을 허공으로 집어던졌다.

천천히 하늘을 부유하는 꽃다발. 그것이 회전하며 이윽고 아래로 떨어진다.

그 아래에는 고깃덩어리를 노리는 상어처럼 여성들이 포진해 있었다.

“내 거다!”

“아니, 내 거야!”

“저리 비켜!”

“아앗! 밀지 마세요!”

난전에 가까운 그 상황 속에서 부케는 천천히 그 중심으로 떨어졌다.

이쯤 되니 멀리 떨어져서 구경하는 존재들도 궁금증이 들었다.

저 영광스러운 꽃다발을 대체 누가 받게 될 것인가?

그 순간, 검은 그림자 3개가 허공을 향해 치솟았다.

‘빠르다!’

지켜보던 유현조차도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게 만드는 초신속의 움직임.

1세대 성령도 인식하는 것이 고작. 당연히 2세대 성령들은 반응조차 하지 못할 움직임이었다.

“잡았다!”

“음.”

“내 것이니라!”

부케를 잡은 것은 정확히 셋.

그중 누가 먼저 잡았는지는 판가름을 낼 수 없었다.

세 사람 다 동시에 잡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어라?’

유현은 속으로 감탄하면서도 뒤늦게 익숙하기까지 한 그 목소리에 의아함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야 그럴 것이, 지금 케이라가 던진 부케를 받은 사람은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아는 사람들이었으니까.

“혜림 씨랑 지아 씨, 그리고 수민 씨까지?”

각자 한 손으로 부케를 쥔 세 사람이 지면에 착지하고, 동시에 고개를 돌려 유현을 응시했다.

그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에 유현은 등골을 타고 오싹함이 스쳐 지나갔다.

“어, 이런.”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레안은 자신이 끼어들 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는 곧바로 케이라의 손을 잡고 유현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면 유현 씨. 저희는 이만.”

“레, 레안 씨?”

“후훗. 수고하세요.”

“케이라 씨?”

유현이 두 부부를 애타게 부를 때, 세 여성이 천천히 유현을 향해 다가왔다.

“유현 씨? 여기서 보네요?”

“음. 우연이지?”

“하하하! 이게 부케라는 거군.”

꿀꺽.

세 사람의 잡아먹을 것 같은 시선이 유현은 침을 삼켰다.

저 멀리서, 오엘로가 웃겨서 견딜 수 없다며 배를 잡고 낄낄대는 모습이 보였다.

침착하자.

유현은 자신에게 되뇌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어, 음. 여러분. 여기는 어쩐 일로……?”

“어머. 어쩐 일이라뇨. 당연히 세기의 결혼식이 열리는데, 저희가 참가하는 것이 이상하기라도 할까요?”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하는 강혜림.

그러나 그 아름다운 미소의 어딘가에 날카로운 칼날이 숨겨진 것 같은 섬뜩함이 느껴졌다.

착각이, 아니겠지?

유현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 그건 아니지만요.”

“그보다 우리도 슬슬 대답을 들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네? 지아 씨. 대답이라뇨?”

유현은 자기는 그런 건 모른다는 듯 살짝 삑사리가 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서수민이 혀를 찼다.

“어휴. 이렇게 줏대가 없어서야.”

“어, 음. 그러니까…….”

유현은 당황하며 눈알을 굴렸다. 그 순간 하객들 사이에서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한 손에 접시를 쥐고서 차려진 뷔페 요리를 집어 먹고 있는 남성.

“아! 영민아!”

“어? 형?”

만찬을 만끽하던 유영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유현을 응시했다.

“오! 형도 여기 왔어요?”

그렇게 기뻐하며 그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찌릿!

강혜림, 권지아, 서수민.

세 여성이 찢어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유영민을 노려봤다.

한쪽 손을 들며 다가오려던 유영민의 얼굴이 삽시간엔 하얗게 질렸다.

“어, 크흠. 이상하다. 요새 헛소리가 자꾸 들리네?”

그리고는 자연스러운 뒷걸음질을 치며 인파의 사이로 사라졌다.

“여, 영민아!”

유현은 그런 유영민을 애타게 불렀지만, 이미 그는 죽음을 직감하고 도망친 지 오래였다.

“자. 어서 대답하시죠!”

“빨리!”

“아직도 뜸 들일 건가!”

“저, 저는…….”

유현은 필사적으로 대답을 회피하려 했다.

그 순간, 멀리서 또 다른 함성이 터져 나왔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더니 프리첸과 맺어진 레이첼이 던진 2번째 부케의 소유자가 나타난 것이다.

“어라? 여러분! 저 부케 받았어요!”

그 대상자는 심지어 대단한 성령도 아닌, 이쪽을 보며 헤실헤실 웃고 있는 백서련이었다.

“서, 서련 씨까지? 아니, 그보다 그 부케는 대체 어떻게 받았습니까?”

“네? 모르겠어요. 그냥 혹시 몰라서 자리에 서 있었는데, 저한테 뚝 떨어지던데요?”

그게 말이 되는 확률인가.

유현은 얼굴을 찡그리며 누군가를 떠올렸다.

‘너희들이냐?’

[크, 크흠. 그렇지 않습니다, 주군.]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

필사적으로 대답을 회피하거나 침묵을 유지하는 아포리아의 네 악마들.

하지만 말로는 아니라곤 해도 이 녀석들 말고는 저 말도 안 되는 기적의 확률을 자아낼 수 있는 녀석이 없기도 했다.

실제로 주군을 향한 과도한 충성심 때문에 네 악마들이 일을 벌인 것이 맞기도 했고.

“유현 씨. 이거 받아 주실 거죠?”

이제는 넷까지 늘어나 버린 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 유현은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여기서 도망치면, 아시죠?”

“진짜 완전히 연 끊고, 얼굴도 안 보고 살 거다.”

“그냥 시원하게 말하지 그러느냐.”

“맞아요!”

번갈아 가면서 한마디씩만 던져도 4배가 되어 이쪽의 머리를 때린다.

유현은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저기, 그러니까…… 제가 그 대답을 좀 하기 힘든 게…….”

“왜요!”

버럭 호통치는 네 여인을 앞두고 유현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아니. 사실은 이미 왜 이런지 알고는 있었다.

“그, 그러니까.”

막상 말을 꺼내려고 하자니 부끄러움이 밀려 들어왔다. 평소에 당당하던 그였지만, 이런 상황은 난생처음이라 내성이 전혀 없었던 것이 컸다.

유현은 얼굴을 살짝 상기시키면서 네 사람의 시선을 피했다.

“제가,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좀, 당황스러워서.”

“…….”

“…….”

“…….”

“…….”

언제나 당당하던 유현이 처음으로 보여 주는 부끄러워하는 모습.

유현은 조금 진정해 달라는 의미로 그렇게 말했겠지만.

그 모습이 네 여인의 가슴에 불을 지필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안 되겠어.”

“그래. 이렇게 된 이상.”

“강제로라도.”

“저도 끼겠어요.”

“여, 여러분들?”

유현이 당황하는 그 순간이었다.

“여전히 시끌벅적하군.”

이 기묘한 분위기를 단번에 차갑게 식히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