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일담 1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 공간.
온갖 기묘한 색체가 혼란스럽게 뒤섞여 눈을 어지럽히는 그런 혼돈의 공간에, 한 존재가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럴,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어.]
평범한 인간을 아득히 넘어선 거대한 존재감.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행성에 버금가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머금고 있는 이 존재는 한때는 혼성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이야기의 왕 중 하나였다.
[이 내가. 비극의 왕이라 불리며 모든 텔러의 머리 위에 우뚝 서 있던 내가, 어찌 이런…….]
비극왕 카타르시스.
혼성계의 4대 텔러 조직 중 엑소도스를 이끌던 교황이었던 그는, 한때의 영광은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끔찍한 몰골이었다.
화려하던 그의 만툼은 사라지고 없었으며, 법복은 여기저기 찢겨 나가 있었다.
찢어진 의복 사이로 드러난 앙상한 그의 뼈는 곳곳이 파손되거나 금이 가 있었고, 그 상처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구성하던 텍스트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이야기의 왕인 그는 1세대 성령과 맞먹거나 능가하는 힘을 지녔고, 그렇기에 물리적으로 그런 카타르시스를 위험에 처하게 할 존재는 혼성계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건데?”
허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카타르시스는 끔찍한 해골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뻥 뚫린 공허한 동공이 허공을 응시했다.
그 순간, 어둠과 혼돈의 공간이 좌우로 쩍 갈라지더니 빛이 쏟아지듯 내려왔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한 남자가 빛을 등진 채로 천천히 내려왔다.
[네, 이놈…….]
카타르시스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자신의 눈앞에 멈춰선 상대를 노려봤다.
해골의 검은 동공 안쪽에서 증오에 가득한 푸른 불길이 일렁였다.
“한때 이야기의 왕이라 불리던 자의 몰골이라고 보기에는 매우 추하군.”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느냐. 이 건방진 인간이!]
눈앞의 남자.
검은 양복을 갖춰 입고 여유가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응시하는 저 남자는.
과거에 자신이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미천한 텔러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전에는 성령들의 여흥 거리에 불과했던 인간이었지 않은가.
“마치 그 모든 것이 내 잘못인 것처럼 들리는군.”
카타르시스의 증오 어린 일갈을 마주한 인간, 강유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이 모든 일은 결국 자업자득인 걸, 왜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걸까.”
[닥쳐라! 아버지의 자리를 탈취한 주제에! 네놈이 있는 그 자리는 원래 네 것이 아니다!]
“그래. 그리고 네 것도 아니었지.”
유현은 순순히 카타르시스의 말을 인정했다.
지금 그가 앉아 있는 이 자리는, 한때 로고스라고 불리던 세계의 조율자 자리였으니까.
그러나 로고스는 죽었고, 그 자리는 유현에게 돌아갔다.
로고스를 쓰러뜨린, 세계의 해방자이자 구원자인 그에게 말이다.
카타르시스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런 상황 자체가 꿈처럼 믿기지 않았다.
그런 카타르시스의 감정을 눈치챈 것일까.
유현은 피식 웃었다.
“언제나 비극을 갈망하고 울부짖던 녀석이, 정작 자신이 그 자리에 서게 되니 남의 탓이나 하면서 부르짖는 꼴이라니. 비극왕이라는 이름이 울겠군.”
[닥쳐라!]
“그러면서 여기저기 계속 도망치기나 하고 말이야. 아무리 나라고 하지만 너를 쫓느라 많이 애를 먹었어.”
유현은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하나의 우주에도 무수한 공간이 존재한다. 단순히 행성과 행성, 차원과 차원뿐만이 아니다.
그 틈새에 버려진 것들.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공간들까지.
옛날에 아포리아의 힘을 완전히 깨달았을 때 한번 와 본 적이 있던 곳이기도 했다.
“이런 토끼굴을 파 놓았을 줄이야. 어지간히도 살고 싶었나 보군. 그렇게 추한 몰골이 되어서도 말이야.”
[…….]
카타르시스는 유현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살고 싶어서 도망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유현은 이제 그가 우습게 보던 하찮은 텔러가 아니었다.
지금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신, 그 이상에 걸맞은 힘을 지닌 존재가 되었으니까.
정면에서 싸우면 필패.
그렇다고 다른 방법으로 그를 쓰러뜨릴 수 있냐고 한다면 또 그것마저도 아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끝이야. 깔끔하게 포기해.”
[내가, 끝이라고?]
“초짜답게 왜 이래? 알 건 다 아는 녀석이. 적어도 담천, 녀석은 너처럼 추하게 굴지 않았어.”
담천의 이름이 나오자 카타르시스는 몸을 크게 떨었다.
거대한 존재감을 지닌 그였기에 그 반응에도 공간이 바르르 울렸다.
“네 형제인 담천 또한 나에게 반기를 들고 로고스의 의지를 이어받았지. 하지만 적어도 녀석은 죽더라도 웃으면서 죽었어.”
카타르시스와 다르게 그저 순수한 ‘재미’를 위해 존재해 왔던 담천.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웃으면서 유현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다.
한때 세상을 뒤흔들던 희극단패의 두목이었던 그가, 별 볼 일 없던 인간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
그보다 더한 아이러니한 ‘희극’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에.
그렇기에 담천은 웃었다.
자신에게 걸맞은, 최고의 죽음이라고 외치면서.
“그렇다면 적어도 너도, 네 형제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최후를 맞이해야 하지 않을까?”
유현은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팔짱을 꼈다.
그리고는 노골적으로 멸시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 이미 그 꼴을 보니 물 건너간 것 같지만.”
[이노오오옴!]
유현이 던지는 누적되는 도발에 결국 카타르시스가 폭발했다.
카타르시스는 두 손을 마주하며 기도를 올렸다.
더 이상 기도를 올릴 대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카타르시스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 우습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의 세상을 지워 버리기에 충분한 거대한 힘의 격류가 카타르시스로부터 뿜어져 나와 유현을 덮쳤으니까.
“약해졌구나.”
하지만 그것조차 읽은 유현에게는 초여름에 불어오는 바람보다 더 우습게 보일 뿐이었다.
팔짱을 푼 유현은 오른손을 정면으로 뻗었다.
카타르시스가 전력을 다해 날린 일격이 좌우로 쩌억 갈라지더니 유현을 빗겨 나갔다.
유현은 펼쳤던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콰드득!
[크아악!]
카타르시스의 몸이 거대한 무언가에 붙잡힌 듯 압축되었다.
유현이 주먹에 힘을 주자 카타르시스의 몸이 점차 작아지기 시작했다.
“너는 죽어서도 이 세상의 이야기가 되지 못할 거다. 카타르시스.”
[안 돼! 안 돼! 살려 줘! 부탁이다! 나는, 나는 이대로 갈 수 없단 말이다!]
“네가 지금까지 뿌렸던 절망, 그 이상만큼. 너를 구성하던 모든 이야기는 이 세상의 틈새에 버려질 거다. 그리고 누구 하나 기억해 주는 이 없이 이곳을 떠돌겠지. 구천도 지옥도 되지 못하는 곳에서 말이야.”
[안 돼! 나는, 비극의 왕이다! 로고스가 창조한 이야기의 왕! 내가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단 말이다!]
죽음을 넘어서 존재의 소멸을 코앞에 둔 카타르시스는 온 힘을 다해 발버둥을 쳤지만, 그렇다고 없던 힘이 솟구치는 일은 없었다.
“잘 가라.”
유현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끝으로.
콰드득.
카타르시스의 몸이 완전히 압축되더니 이윽고 무수한 가루로 변했다.
유현은 그것을 말없이 응시하더니 이내 뿌리치듯 텍스트를 흩뿌렸다.
비극의 왕이라 불리던 자가 맞이하는 최후치고는 너무나도 초라한 결말이었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유현은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이 존재를 끌어드린 것도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유현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새하얀 석고 가면을 쓴 채로 지팡이를 쥐고 있는 롯피우트가 보였다.
“고민 중입니다.”
[무얼 말입니까.]
“제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
유현의 노골적인 말에도 불구하고 롯피우트는 어떠한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한때는 그가 유현보다 더 높은 회장의 자리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까.
롯피우트는 그저 이 상황 자체에 순응하기로 했다.
[당신이 바라시는 대로.]
“그때, 제가 천체주식회사를 나간다고 했을 때.”
[…….]
“당신은 제가 지닌 서재를 수거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죠.”
[단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상하단 말이죠. 결국 그 서재가 돌고 돌아서 사탄이 방송을 하게 해, 이 세상의 숨겨진 진실을 밝히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됐으니.”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유현이 처음 텔러가 됐을 때 사탄을 만난 그 순간이었다.
사탄은 천체주식회사에 초청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런 그가 남들의 시선을 피해서 혼자서 신입 텔러들이 있는 공간에 숨어들었을 리가 없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군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유현의 말에도 롯피우트는 고개를 저으며 자기는 모른다는 자세로 일관했다.
유현은 말없이 롯피우트를 응시하다가 등을 돌렸다.
“다섯이나 되는 이야기의 왕 중 둘이 죽었습니다.”
[예.]
“셋까지 죽이기에는, 이 세상의 빈자리가 너무 커지겠죠.”
그것이 자신을 용서한다는 말을 돌려서 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롯피우트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자신의 책무를 다하세요. 이제 한 회사를 이끄는 회장이 아닌, 세상의 이야기를 모으는 사서로서.”
[본부대로 하겠습니다. 무한서고의 조율자시여.]
무한서고.
로고스가 집필했던 하나의 책인 코덱스는 무수한 존재들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하나의 서고가 되었다.
먼 과거 반복되었던 우주의 끝에서 지금의 현재까지.
그 모든 과정을 담은 책들이 가득 찬 도서관.
그것이 지금의 우주인 무한서고였다.
로고스가 만들어 내는 한 권의 책이 아닌, 무수한 이야기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세계.
“할 일은 끝났습니다. 로고스의 잔재인 담천과 카타르시스도 없앴으니까요.”
[이제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따로 할 일이 있어서요.”
[전쟁 이후의 뒷정리는 전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까?]
이해를 못 하겠다는 롯피우트의 말에 유현은 피식 웃으며 그를 돌아봤다.
“예. 그 일은 전부 끝났습니다.”
[그런데 가셔야 할 곳이라니.]
“결혼식입니다.”
[예?]
언제나 차분함을 유지하던 롯피우트라 하더라도, 이번만큼은 그렇게 멍청하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 * *
사실 결혼식이라고는 했지만, 누구의 결혼식이라고는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론, 그 결혼식은 유현의 결혼식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다른 사람, 아니 다른 존재의 것이었지.
“어색하군.”
이제는 어엿한 성령이 된 가르디안의 주인, 레안은 자신의 몸에 딱 맞는 턱시도를 매만지며 불편한 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오늘 있을 결혼식의 주인공인 그는 아직도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뭘 벌써부터 걱정하고 그래요.”
옆에서 그런 레안을 지켜보던 링우드가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좋은 날이잖아요? 그러면 기뻐하며 웃어야죠.”
“그건 이해한다만…….”
분명 기쁜 일이 맞다.
한때는 자신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절망에 빠지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 얼어붙은 행성에서 영원이 저주받은 삶을 이어 나가야 할지도 모를 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현실은 분명 꿈에서도 바라지 못한 가장 이상적인 일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걱정이 든 것이다.
과연, 자신이 이런 행복을 이어 나가도 되는 걸까.
“어이, 레안!”
그런 레안의 걱정이 무색하리마치 큰 목소리가 그의 뒤통수를 후렸다.
레안이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훤칠한 백발의 미남이 그를 보며 서 있었다.
똑같은 신랑 복장을 입은 채로.
“프리첸.”
“이제 황제라 부르지도 않는 거냐?”
“그러는 그쪽은 나를 신으로 떠받들지 않잖아.”
“그것도 그렇군. 하하! 내가 죽어 있는 사이에 세상이 참 많이 변했어!”
한때는 멸망해 버린 제국의 마지막 혈통이었고, 얼어붙은 세계를 구하기 위한 마지막 싸움에서 그 명을 달리했던 남자.
전쟁이 끝난 그 날.
죽음에서 다시 살아 돌아온 그 남자는 평소와 같은 당당한 태도로 레안을 대했다.
“뭘 그렇게 풀 죽은 얼굴이야? 얼굴 쫙 펴! 애초에 너만 하는 거 아니잖아.”
“그건 그래.”
이번 결혼식은 사실상 합동결혼식이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레안 뿐만 아니라 프리첸도 있었고.
레안은 프리첸을 볼 때마다 그가 죽었던 시절이 떠올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애매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묻고 말았다.
“프리첸. 다시 살아 돌아온 건, 어떤 느낌이지?”
“엉? 너답지 않게 엉뚱한 걸 묻는군. 뭐, 천하의 레안이라 하더라도 긴장되면 어쩔 수 없다 이건가.”
프리첸은 ‘흐하하하!’ 하고 웃으면서도 대답을 유보하지 않았다.
“뭐, 처음 죽었을 때는 분명 묘한 느낌이었지. 몸에 힘이 빠지고 드디어 끝이구나 하는 감정. 하지만 그 이후에는, 좋은 꿈을 꿨어.”
“좋은 꿈?”
“사랑하는 그녀를 만나, 약속의 땅으로 함께 걸어가는 꿈. 아니. 사실 꿈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프리첸은 아직도 그때가 생생한지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던 자신의 오른손을 들여다봤다.
그가 겪은 것은 분명 죽은 너머의 세계였다.
그것은 분명 행복한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다시 살아 돌아온 것이 최고지. 역시 이런 감각이 있어야 하니까.”
“그런가.”
너무 가볍기까지 한 프리첸의 말이었지만, 레안은 오히려 그의 행동에 위안을 얻었다.
“오늘의 주인공들이 여기에 있었군요.”
그 순간, 허공이 갈라지더니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유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