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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주인공들-450화 (450/456)

# 나만 아는 주인공들 450화

전쟁이 끝나고 1년이 지났다.

원래라면 허락되지 않았을, 이전 우주에서는 절대로 도달하지 못한 시간대였다.

살아남은 사람들과 성령들은 그 허락받지 못한 미래를 마주하게 됐다.

권지아는 올드 타운의 바깥, 창밖을 응시했다.

이번 전쟁에서 올드 타운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전쟁은 에덴과 판데모니엄, 천계삼십육천의 영역이 겹치는 경계 지역에서 벌어졌으니까.

조금만 시간을 더 끌었다면 재단의 요새가 움직여서 올드 타운을 비롯한 연합의 모든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었겠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들 열심히 살아가고 있구나.’

전쟁의 상흔은 1년 사이에 완벽히 복구될 정도로 작지 않았다.

올드 타운도 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전쟁의 사망자가 많은 것을 생각하면 큰 상처를 입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도시의 바깥에는 거대한 묘지가 설립됐고, 지금도 많은 사람이 묘지에 가서 꽃을 놓고 오거나 추모를 이어 나갔다.

“지아 누님. 준비하세요.”

“아. 영민이구나. 그래. 그래야지.”

권지아는 가볍게 짐을 챙기고 방에서 나왔다. 그런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전 백화 매니지먼트 사람들이었다.

백서련, 강혜림, 서수민,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는 유영민까지. 그리고 백서련의 품 안에는 자그맣게 몸을 줄인 백효가 안겨 있었다.

서로 웃으면서 인사를 나누고, 가져온 짐을 탈것에 싣는다.

“자. 그러면 출발합니다.”

운전은 유영민이 맡았다. 권지아의 시선이 차창 밖의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향했다.

그것은 강혜림도, 서수민도, 백서련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들이 향하는 곳은 이전 대성군 올림포스가 존재했던 영토,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오케아노스 해변가가 있는 곳이었다.

“정말, 많은 게 바뀌었네요.”

강혜림이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서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은 변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전쟁의 상처를 극복해 나가면서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성군과 대성군으로 나뉘던 세력은 사라졌다. 그들은 이제 하나 된 혼성계의 연합을 이루게 됐다.

인간과 성령의 경계를 가르던 군주 연합 또한 마찬가지.

이 세상은 더 이상 성령과 인간의 벽을 세우지 않았다.

“이렇게 모인 것도 또 오랜만인데, 다들 그렇게 입 다물고만 있을 거예요? 한 달 만인데, 다들 너무하시다.”

운전을 하던 유영민이 이 차분한 분위기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은 지 일부러 흥을 돋우려고 말문을 열었다.

백서련도 같은 생각이었는지라 옳다구나 하면서 말을 받아 줬다.

“그러는 영민이 너는 뭐 하면서 지내고 있었니?”

“저야 뭐, 아직도 용병일을 하고 있죠.”

유영민은 지난 1년 동안 혼성계 전역을 떠돌아다니며 용병일을 계속했다.

다만 이전과 다르게, 돈을 받고 임무를 해결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전쟁으로 인해 물자가 부족한 곳을 찾아가 물자를 지원해 주고, 힘은 일을 도와주는 자원봉사 위주로 활동했다.

세상에는 여전히 분쟁과 싸움은 남아 있었지만, 더는 더러운 일을 도맡아서 해 줄 용병은 필요하지 않았다.

유영민은 그런 버려진 용병들을 다시 규합해서, 하나 된 용병 세력을 이루며 민간 조직으로서 여러 곳을 도와주는 일을 도맡아서 했다.

“용병 업계도 이제 변해야죠, 뭐. 언제까지 피땀나는 일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는 서련 누님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나? 나야 늘 똑같지.”

백서련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연합의 중추로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썼다.

본디 자그마한 컬렉터 매니지먼트 대표 출신이었던 그녀가, 어느덧 군주 연합 세력을 대표하는 것을 넘어서 세계 연합의 중역까지 올라가게 된 것은 순수하게 그녀가 지니고 있는 수완과 능력 덕분이었다.

“안 그래도 바쁜데, 너희들 때문에 겨우 시간 내서 나온 거야. 알지? 그러니까 알아서 잘 모셔.”

“네네. 그리고 거기 우수에 잠겨 있는 지아 누님은요?”

“우수는 무슨.”

권지아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유영민을 흘겨봤다. 유영민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툭 던지듯, 권지아가 말했다.

“나는 그냥 뭐, 평범하게 살고 있다.”

유영민이나 백서련이 유명세를 떨친 것과는 다르게 권지아는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평범한 삶을 구가하고 있었다.

평범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너무 오래돼서 까마득하게 잊었지만.

그녀는 분명 이런 삶을 바라왔던 것이다.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고, 아침에 눈을 떠도 게으름을 피우며 침대 위에 뒤척이고, 오늘은 뭘 먹을지에 대해 행복한 고민을 하고.

소소하고 작은 것에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고,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짜증을 내기도 하면서.

그러면서 살아가고 또 살아가며.

언젠가는 평온하게 눈을 감게 되겠지.

“세상은 이제 성령이고 책벌레고, 그런 게 필요하지 않으니까.”

전쟁을 끝으로 권지아는 펜릴의 힘과 짐승의 힘 모두 소실했다. 그렇다 해도 그녀가 지니고 있는 힘과 격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평범한 일상에 녹아드는 것이 조금 적응되지 않고 힘들긴 하지만.

그것도 결국 시간문제이리라.

“혜림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네, 뭐.”

강혜림도 마찬가지였다. 검후로서 지내던 그녀는 전쟁이 끝나고 다른 사람들처럼 일상으로 돌아갔다. 다만 흑뢰군주로서 저질렀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꾸준히 봉사 활동을 나가며 구호 활동에 힘썼다.

선행을 쌓는다고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선행과 죄는 별개의 것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누군가를 위해 배려하고 노력하는 것은, 이것이 인간으로서 응당 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자신 같은 사람들이 더는 나타나질 않길 바랐기 때문이다.

“흠. 다들 보람찬 삶을 보내고 있었군.”

“수민이는 뭐 하면서 지냈는데?”

“나는 그냥 평범하게 도장을 운영 중이지.”

서수민은 도장을 하나 열었다.

남들처럼 봉사를 하는 것만으로는 그녀는 삶의 무료함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무에 재능이 있는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무술 도장을 열었다.

“이름은 천마도장이라고 지었다.”

“으엑.”

유영민이 자기도 모르게 그런 소리를 내뱉었다. 네이밍 센스 하고는. 속으로 그런 말을 삼켰지만, 서수민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것은 막지 못했다.

“왜 그렇지?”

“아, 아뇨. 아무것도.”

인간상성 때문인지 유영민은 곧바로 꼬리를 말았다. 하지만 서수민의 시선은 집요했고, 유영민은 화제를 전환할 것이 필요했다.

“엇! 저기 봐요.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오늘 찾아오려고 했던 오케아노스의 바다.

그 아름다운 해변가에 멈추자 일행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내렸다.

“예쁘다.”

새하얀 모래사장과 그 너머 끝없이 펼쳐진 해양. 하늘은 맑고 푸르렀으며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했다. 태양빛도 적당히 따뜻해서 좋았고 무엇보다 바다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시원했다.

신들이 머물던 바다라서 그런지 소금의 짠 내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머리가 청량해지는 기분.

오늘 이 자리에 모두가 모인 이유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같이 바닷가라도 놀러 가자고 했었는데.”

전쟁이 벌어지기 전, 유현은 모두 함께 예전처럼 놀러 가자고 했었다.

그리고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유현은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가 있는 이 자리에, 오직 유현만이 없었다.

지난 1년 동안.

유현이 어떻게 됐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방법은 없었다.

어쩌면 로고스와 동귀어진 해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모두가 시간을 내서 바닷가에 왔다.

그 남자가 없는, 약속의 장소에.

“어차피 고작 1년밖에 지나지 않았잖아. 5년간 기다렸는데, 1년이면 아무것도 아니지.”

“맞아요. 약속했잖아요? 그러니까 유현 씨는 분명 돌아올 거예요.”

시간이 얼마나 걸린다 하더라도 분명 그 남자는 돌아올 것이다.

스스로 약속했으니까.

그는 약속 하나만큼은 반드시 지키는 남자였다.

모두가 그렇게 믿었다.

그렇게 믿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일렬로 서서 아름다운 대양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다들 놀러 오셨나 봐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들려서는 안 될, 그 남자의 소리가.

자리에 있는 모두가 몸을 덜컥 떤다. 그리고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잊었을 리가 없다. 이 목소리를, 고작 1년이 지난 지금 잊어버렸을 리가 없었다.

“저도 거기에 끼어도 될까요?”

그곳에.

이쪽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 남자, 강유현이.

“유현…… 씨?”

강혜림이 멍한 얼굴로 그 이름을 불렀다.

강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짜, 진짜 유현 씨에요?”

“네. 진짜 강유현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강혜림은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권지아와 서수민도 놀라서 눈을 크게 떴고, 유영민과 백서련은 숫제 귀신을 봤다는 반응이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너, 대체 어딜 갔다가 이제야 온 거야.”

“처리해야 할 일들이 좀 많았거든요.”

“처리해야 할 일?”

권지아의 물음에 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에게 물었다.

“다들,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간다니, 어디로?”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유현은 허공에 문 하나를 만들었다. 다른 곳으로 통하는 문을 열며, 유현은 모두의 대답을 기다렸다.

강요는 없다. 싫다면 굳이 데려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자리의 모두가, 그것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갈게요.”

“가겠습니다.”

“좋습니다. 따라오세요.”

유현이 문으로 들어갔고 그 뒤를 따라 백화 매니지먼트 일행이 움직였다.

문 너머는 긴 복도였다. 바닥에 깔린 것은 붉은 융단. 넓지도 크지도 않은 복도의 양쪽으로는 새하얀 유리 전시장들이 가득했다.

앞서 걸어가던 유현이 입을 열었다.

“제가 1년 동안 오지 못했던 것은, 로고스가 저질렀던 일들에 대한 뒤처리를 하느라 바빠서였습니다. 세상에 가해지는 온갖 억압과 제한. 그것을 푸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넘어갔죠. 본래라면 10년을 해도 끝나지 않았을 일이지만, 여러분들과의 약속을 위해서 최대한 줄이고 줄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반년이 걸렸죠.”

“반년이라니, 그러면 나머지 반년은요?”

“세상을 위해 싸운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섭니다.”

유현은 손가락을 들어 올려 한쪽 유리를 가리켰다.

“보십시오.”

그곳에 찬란한 도시가 있었다. 강혜림은 그 익숙한 모습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그녀가 처음으로 검후라는 칭호를 얻고, 유현과 함께 싸운 기념비적인 사상세계의 도시다.

유리 벽 안쪽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평화로운 광경이 비춰졌다.

안쪽에서 종소리가 울리며, 황제가 시찰을 위해 말을 타고 나섰다. 마지막 황제 드라가시스의 등장에 모두가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거나 꽃다발을 건네줬다.

어쩌면, 이렇게 됐을지도 모르는 또 하나의 가능성.

그것이 지금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유리 벽에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바닷가에 자리 잡은 한적한 마을이었다. 그 마을의 부두에 한 척의 큰 배가 정착했다.

풍채 좋은 중년인이 배에서 내렸다. 에이허브 선장이었다.

그런 에이허브의 뒤로 이스마엘과 익숙한 얼굴들이 더러 보였다.

영감. 놀러 왔다고! 에이허브가 그렇게 말했다.

그 외침을 들었는지 부두 앞에 자리 잡은 낡은 오두막의 문이 열리며 네모 함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이제는 제페토인 그는 옆에 귀여운 손주를 껴안고 있었다.

쯧. 여전히 야만스러운 외침이구나.

핫! 웃기시네!

그들은 서로를 보며 입으로는 헐뜯듯 말했지만, 눈가는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웃고 있었다.

“가짜가 아닙니다. 전부 저마다의 진짜 세계입니다.”

푸른 들판이 보인다. 그곳에 펼쳐진 아름다운 꽃밭의 위에서, 아름다운 금발의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 여인의 무릎 위에 늙었지만 강건한 기사가 머리를 얹은 채 누워 있었다.

돈키호테. 그가 무언가 말을 하자 여인은 살포시 웃었다. 돈키호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팔다리를 우스꽝스럽게 뒤흔들었다. 여인은 그 모습을 보더니 배를 잡고 자지러졌다.

멀리서 풀을 뜯고 있던 로시난테가 또 시작이라는 얼굴로 투레질을 하며 다시 풀 뜯기에 집중했다.

불어오는 바람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용감한 기사는 그렇게 자신이 바라는 소중한 여인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권지아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전부, 네가 한 일이야?”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런 걸 준비하느라 반년이 더 걸렸습니다.”

“대체, 왜?”

“왜냐면,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에 따른 보상이 필요하니까요.”

모두가 세상을 위해 싸웠다. 누군가는 소중한 것을 버려 가며 옳은 것을 위해 싸웠고, 또 누군가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이 잃은 것에 대한 보상을 해 주지 않는다.

세상은 잔혹했으니까.

현실이 그랬으니까.

그래서 유현이 선물을 주기로 한 것이었다.

다른 유리 벽 너머에 보이는 것은 위무혁이었다.

한때 한국 랭킹 1위 컬렉터였던 그 남자는, 지금도 혼자 고독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평소에 찾아오는 이가 거의 없었고, 위무혁도 이제 칩거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외딴 숲에 혼자 집을 마련해서 지내는 중 이었다

당연히 찾아올 손님이 있을 리가 없었다.

똑똑.

그런 그의 집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누구시죠?”

위무혁이 정중하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지나가던 여행객인지, 혹은 숲의 요정이 장난을 치는 것인지.

위무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대체 누…….”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는 한 여인과 어린아이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죽은 줄 알았던 아내와 딸이,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위무혁은 떨리는 입술을 가까스로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이건, 분명 꿈이 아니겠지?”

“네. 꿈이 아니에요. 여보.”

아내가 손을 뻗어 자신의 뺨을 가볍게 쓸어 줬다. 그 부드러운 감촉과 따스한 온기가 전부 진짜라는 것을 깨닫자.

위무혁은 딸과 아내를 와락 껴안았다.

그의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위무혁은 눈물을 흘리며 울고 또 울었다.

“계속, 계속 보고 싶었어. 꿈속에서도, 현실에서도. 보고 싶어서, 너무 보고 싶어서…….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전부 다 잊어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여보. 이제 괜찮아요. 우린 어디에도 가지 않으니까.”

“아빠. 울지 마. 앞으로도 같이 지낼 수 있어.”

서로를 껴안으며 눈물의 재회를 나누는 가족의 모습.

그런 광경이 비추는 유리 벽을 손끝으로 가볍게 쓸며, 유현은 멈추지 않고 걸었다.

“세상의 이야기에 해피엔딩만 있는 건 아니죠. 누군가는 기뻐할 때, 또 누군가는 슬퍼합니다. 그리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은 거의 없죠.”

잔혹한 현실 속에서 사람의 노력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니 이런 저라도, 손을 내밀어 주는 겁니다.”

노력하는 사람에겐 그에 걸맞은 보상이 필요했다.

아무리 달리다가 실패하고 넘어져도, 그들이 달리겠다고 다짐을 한 그 의지만큼은 절대로 저평가돼서는 안 됐다.

그 숭고한 의지가.

무언가를 향해 달려 나가겠다는 그 마음이.

비록 그 끝이 헛될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찬란하게 빛났기에.

그 빛이 꺼지더라도 아무것도 없이 버려지는 일 만큼은 있어서는 안 됐으니까.

“왜냐면 세상이 나아질 거라는 건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니까.”

문득, 멈춘 유현의 발걸음은 한 소녀의 모습을 보여 주는 유리 벽 앞이었다.

그곳에 한 소녀가 자신의 부모님 손을 잡으며 새로운 세상 위를 걷고 있었다.

강서하. 부모님의 얼굴도 모른 채 세계의 악의에 살해당한 그 아이가, 자신의 부모님의 손을 잡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이 하나둘 돌아오는 올드 타운으로 향했다.

새로운 삶을 얻고 새로운 세상으로.

원래라면 이루어지지 못했어야 할 만남. 누군가에게 잊혀 서서히 사라졌어야 할 이야기.

그 이후의 기적이,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강서하뿐만이 아니다.

혼성계 곳곳에서, 죽은 줄 알았던 사람들이 살아 돌아온다.

전쟁이 끝나고 1년.

슬픔의 위령제가 되었어야 할 날 기쁨의 눈물이 세상을 물들였다.

유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세상을 내려다봤다.

“때로는, 믿음 그 이상이 필요하니까.”

서로 투닥거리면서도 함께 지내는 오엘로와 프라이티온.

변해 버린 세상을 보며 즐겁게 미소 짓는 메피스토.

해결사로서 맡은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셀레스티나와 셀린, 아리샤.

이제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로믈락시스.

행복하게 지내는 강유라와 부모님.

근두운을 타고 모험을 떠나는 손오공.

자신의 제자들과 자리에 앉아 깨달음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석가모니와 그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출라판타카.

유현은 멈췄던 발걸음을 움직이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길었던 복도가 끝을 맞이했다.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돌아본 일행들은 이 복도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회랑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회랑의 위에는 이런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명예의 회랑]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존재하는 곳.

그리고 그들이 회랑의 끝에 도달한 거대한 홀은, 책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여러분들 그거 아십니까? 이 우주 바깥에는 또 다른 우주가 있다는 거.”

홀의 천장은 뻥 뚫린 대신 광활한 우주의 모습을 보여 줬다.

별빛도 거의 보이지 않은, 어둠만이 가득한 곳.

그러나 유현의 시선은 그 우주의 너머를 보고 있었다.

“신과 인간이 직접 계약을 하는 세계. 세계의 수명이 정해져서 다른 세계의 힘을 가져오는 마왕이 될 수밖에 없는 세계. 우리처럼 무수한 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거대한 나무로 이루어진 세계. 찬탈자들이 진정한 주인을 억압하는 세계. 그 외 다른 무수한 우주들.”

이 우주의 바깥에는 아직 그들이 보지 못했던 이야기가 가득했다.

그 장대하고 아름다운 경관에 일행들 모두가 시선을 빼앗긴다.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세상에는 어둠이 가득하죠. 우리 모두는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인류는 그런 어둠을 향했기에 빛을 만들고 뿌릴 수 있었죠.”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우주의 바깥은 분명 너무 어둡고 까마득하다.

하지만 분명, 저 너머에는 이야기가 있다.

광활한 우주는 검은 도화지이고, 거기에 아로새겨진 별빛은 역사의 글자니까. 그 무수한 별빛이 반짝이는 것은 곧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저 너머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리라.

앞으로 나아가며 저 어둠 속에서 빛을, 그리고 이야기를 찾을 거다.

“그러니, 모두 저와 함께하시겠습니까? 새로운 이야기를 찾으러.”

유현의 제안에 일행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시선을 마주한다.

각자의 눈동자에 담긴 열망을 읽어 낸 그들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바보 같은 질문이다.

여기까지 와서, 답은 이미 정해진 게 아니겠는가.

유현은 그 반응을 읽고 소리 내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유현은 무한의 심연을 응시했다. 무엇이 있는지 몰라, 오히려 두려움마저 불러일으키는 그 광경을.

그래도 분명 저 안에는 있다.

별빛과 같은 이야기가.

“갑시다.”

앞으로, 그리고 위로 나아가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먼 과거부터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불을 발견해 빛을 퍼뜨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정착지를 찾았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 나아가 삶의 의의를 찾기 위한 끝없는 고행이었다.

이 세상을 한 권의 책으로 집필하며 자신의 마음대로 써 갔던 로고스는 죽었다. 그러나 로고스가 집필한 책은 아직 이렇게 남아 있다.

세계의 신이, 이야기의 저자가, 책의 작가가 죽어도.

이 세상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는다.

그 이후.

그리고 그 너머.

이야기는 언제나 길처럼 이어진다.

그리고 세상의 바깥에는 아직 보지 못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우주의 너머, 새로운 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이제 그들은 새로운 세상으로 향한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미지가 가득한 어둠의 너머로.

그것은 분명 힘들기도 하고 괴롭기도 할 거다.

때로는 주저앉고 쉬고 싶기도 하겠지.

그래도 그들은 분명.

언제까지고 멈추지 않고.

──끝없이 나아갈 것이다.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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